16화
“속일 수 없을 거야. 네가 나로 아무리 비슷하게 변장한다고 해도 말이야.”
“역시 그렇겠지?”
“무도회에 같이 가자는 얘기였어. 너에게 지금 파트너 신청한 거야.”
“뭐……?”
아나샤는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가 뒤늦게 농담은 아닌가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 그녀에게 테윌러는 친절하게도 재차 나긋한 어조로 얘기해 주었다.
“이번 무도회 때 나의 파트너가 되어줬으면 해. 아샤.”
* * *
저택으로 귀가한 리히르트는 집무실 책상에 놓인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중앙 귀족 가문들의 이름과 최근 정치적 행보, 재정 상태가 간략히 적힌 서류였다.
귀족은 물론 황족들까지 오는 공개적인 자리였다. 표면적으로는 이성적으로 호감을 가진 파트너와 참석하는 자리이지만, 상류층 귀족들의 사회는 마냥 낭만적이지 않았다. 대동하는 파트너로 친분과 세력을 과시하는 것은 물론 은연중에 정치적 행보를 드러낼 수도 있었다. 귀족들 간의 결합이란 그런 것이니 말이다.
특히나 리히르트는 지방에 있다 수도로 올라온 거물급 귀족이었다. 그의 정치적 행보에 많은 관심이 쏠릴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렇기에 무도회의 파트너로 어느 가문의 영애를 대동하느냐는 쉽게 결정할 사항이 아닌 것이다.
밤새 검토한 끝에 대략 열 개의 가문을 추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적으로 그리 여유로운 편은 아니었다. 파트너 신청을 위한 서신을 보내려면 넉넉잡아 이번 주까지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다음 날 그는 출근 준비를 마치고 파트너 후보들이 적힌 서류철을 챙겼다. 기사단에서도 틈틈이 보기 위함이었다. 파트너를 고르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으니 없는 시간을 쪼개려는 것이다.
물론 그가 시간이 없는 이유라면 있었다.
“운반하다가 실수로 떨어뜨렸는데 하필이면 그게 경례 자세를 하고 있던 분대장 발등 위로 떨어진 거예요. 순간 놀란 분대장이 단장님께웩!! 하는데 방금 나온 할아버지가 그걸 듣고 누가 돼지 소리를 내냐고 화를 낸 거 있죠! 푸하하! 아, 지금 생각하니까 또 웃겨 죽겠어요!”
아나샤는 소파에 편히 앉은 상태로 제 허벅지 위를 팡팡 두들겨 댔다. 그 얘기를 들은 리히르트도 살짝 웃겼던 건지 슬그머니 고개를 모로 돌렸다. 업무 중에 즐기는 다과 타임이었다. 이렇게 즐길 건 다 즐기고 있으니 시간이 남아돌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리히르트는 이 휴식 시간만큼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 인생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바빠도 시간이야 또 쪼개고 쪼개면 된다는 게 근래 들어 든 생각이었다.
“아, 이제 슬슬 일해야 되는 거 아녜요?”
오히려 늘어져 있던 아나샤가 다 걱정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해야 할 일이 생각난 그가 다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업무는 아니었고 원래 이 시간에 살펴봤어야 할 서류철이 떠오른 것이다.
1시간 16분 만에 다시 업무 책상 앞에 앉은 그는 서류 사이에 따로 놓아둔 서류철을 들었다. 그때 그를 따라 일어선 아나샤가 호기심을 띠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처음 보는 건데 뭐예요?”
다른 서류철과는 확연히 다른 붉은 벨벳의 재질이었으니 관심을 가질 만도 했다. 평소라면 간략하게라도 설명해 주었을 리히르트였지만, 그는 그녀가 볼세라 빠르게 서류철을 소리 나게 덮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 저한테 보여주면 안 되는 기밀 사항 같은 거예요?”
깜짝 놀란 아나샤가 멈춰 섰다. 그가 이렇게 반응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알겠어요! 궁금하지만 절대 안 볼게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니에요. 원래 이렇게 상관의 서류를 불쑥불쑥 훔쳐보는 게 잘못이죠.”
언제 당황했냐는 듯 아나샤는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웃으며 뒤로 물렀다. 빠른 포기였다.
“아샤 경.”
그녀가 제게서 한 걸음 더 물러서자 리히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다급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낮은 목소리에 아나샤는 모든 행동을 정지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대가 옆에서 서류를 본다고 해서 그것을 단 한 번도 무례라 여겨본 적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여주지 못할 중요한 기밀 서류도 아닙니다.”
“…정말요?”
“그저 제가 예민했습니다.”
그녀와 자신 사이에 벽이 생기는 것만은 원치 않았다. 리히르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지만 역시나 손에 든 서류철은 덮인 채였다. 보면 안 되는 서류도 아닌데 왜 보여주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들 만도 할 텐데 아나샤는 그저 밝은 얼굴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고마워요. 저, 정말 신뢰받고 있군요!”
눈을 반짝인 그녀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가련한 여주인공처럼 과장되게 훌쩍였다. 뻔뻔하게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은 얼굴로 말이다.
“저 사실 좀 감동했어요. 사실 제가 잘못한 게 맞긴 하지만요. 믿고 아껴주신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고……. 그래서 든 생각인데 저도 단장님한테 이것저것 털어놓고 싶어요. 시간만 된다면요.”
“시간이야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시간이 없다는 자각은 온데간데없이 그는 차분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 와중에 그의 손은 서류철을 책상 아래에 딸린 서랍 속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숨겨야 할 필요가 전혀 없을 내용일 텐데 이상하게도 그녀에게만큼은 이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 * *
열 명이었던 후보는 다섯 명으로 줄어있었다.
리히르트는 간만에 깊은 생각에 잠겼다. 황태자를 지지하는 브리태너 공작가와 사업 쪽으로 영향을 넓히고 있는 펠덴 후작가, 그 외 나머지 세 가문도 썩 나쁘지 않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일회적인 관계가 아닌 혼인까지 생각했을 때의 얘기일 테지만 말이다.
그는 본인의 혼인에 대해서도 무덤덤했다. 그저 최대한 가문에 이익이 되는 쪽을 선택하고자 신중할 뿐이었다.
상념에 잠겨있던 그때, 위에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살짝 벌어진 천장 타일 틈 사이로 나타난 까만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단장님, 저 내려갈까요?”
“네. 마침 업무도 끝난 참이었습니다.”
리히르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서류철을 덮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보다 먼저 응접용 소파에 착석한 아나샤는 상체를 흔들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지만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흡사 뭐 마려운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그가 차분히 기다려 주며 그녀 앞에 물을 따라주자 아나샤는 냉큼 컵을 집어 들었다. 목이 말랐는지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마신 그녀가 다시 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양손의 손가락들을 꼬았다가 풀었다가 하며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저 뭐 하나 여쭤볼 게 있는데요.”
“뭐든 물어봐도 좋습니다.”
“…무도회에 같이 가는 파트너 말이에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뭐든 물어봐도 좋다 말했던 리히르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가 어째서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제가 아는 게 맞나 싶어서요… 그 호감 있는 사람한테 신청하는 거예요?”
“…….”
자기 생각만으로 가득 찬 터라 그는 대답해 줄 경황조차 없어 보였다.
“친한 사람한테 파트너 신청하는 경우도 있겠죠? 그렇겠죠? 마땅히 데려갈 사람이 없으면 그냥 친한 사람을 데려갈 수도 있는 거겠죠?”
아하하… 하고 어딘가 영혼이 없는 얼굴로 웃던 아나샤가 그대로 쾅 하고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그 큰 소리에 그제야 리히르트는 굳은 표정을 풀었다. 아나샤는 엉엉 우는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요…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애기를 들었거든요오…….”
고개를 든 아나샤가 굳어있는 리히르트를 응시했다.
“무도회 파트너가 대체 뭐죠?! 대체 뭐길래 사람을 이렇게 혼란하게 만드는 거죠! 아악! 이런 거 삼촌들한테 말했다가는 분명 평생 놀림당할 게 틀림없어요……. 단장님도 이런 제가 너무 바보 같겠지만… 들어주세요.”
물기는 없었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에 젖을 듯 애처로운 눈이었다.
“친구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런 말 하니까…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서요. 괜히 혼자 너무 과대 해석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무래도 제 착각이겠죠?”
애초에 무도회 같은 곳에 가본 적도 없어서 파트너 역할을 잘해낼 자신도 없었다.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아나샤는 그래서 더 문제라 여겼다.
“그치만 만약, 만약! 진심이면… 절 진짜 호감 가는 상대로 보고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한 거면……. 단장님……? 듣고 있어요?”
심각하게 고민을 털어놓고 있던 아나샤는 문득 맞은편이 조용하자 그의 얼굴을 살폈다. 뭐랄까, 그는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것도 많이. 떨떠름한 맛이 나는 무언가를 입에 문 사람처럼 굳은 얼굴이었다.
“혹시 어디 아프세요?”
“…아닙니다.”
리히르트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내리뜨며 대답했다. 어딘가 얼이 빠진 그답지 않은 모습에 아나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들갑을 떨었다.
“완전 아파 보이세요! 오늘은 이만 쉬세요. 열은 없어 보이는데, 잠시만요.”
그녀가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 리히르트의 눈이 좀 더 크게 떠졌다. 따스한 손이 느껴졌다. 앉은 채로 그녀를 올려다보던 그의 푸른 눈동자는 다시 천천히 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길고 옅은 속눈썹 사이로 잔잔한 떨림이 일었다.
“열은 없는데… 아무래도 좀 쉬셔야 할 것 같아요.”
아나샤는 그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픈 줄도 모르고 혼자 이것저것 떠들어서 죄송해요. 이만 쉬세요! 전 약 받아올게요!”
“아닙니다. 괜찮…….”
“괜찮아요! 앉아계세요. 아니 누워계세요!”
말릴 틈도 주지 않고 아나샤는 곧바로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잽싸게 기사단 의무실로 달려간 그녀는 의무관을 붙잡고 그의 증상을 줄줄이 나열했다. 안색이 창백하고, 눈빛이 떨리고, 어딘가 넋이 나간 사람같이 멍하다. 그리고 그 애기를 들은 의무관은 단순 감기인 것 같다는 소견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