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이렇게 열까지 내니 도저히 거짓말을 하는 걸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걸로 거짓말할 애도 아니었고 말이다. 하지만 크리스는 그녀가 말하는 단장과 자신이 아는 단장의 사이에 괴리감을 느꼈다.
딱히 가까이 두는 부하라고 해서 정을 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는데, 생각보다 인간미가 있는 사내였던 모양이다. 물론 그것마저도 아샤에게 한정된 것 같다지만.
“노파심에 하는 말이긴 한데… 단장님이 너를 보는 눈빛이 조금 끈적하다거나 사적으로 만나자고 한다거나 그러지는…….”
“우리 단장님을 뭐로 보고!”
아나샤는 크리스의 등에 주먹을 먹였다. 작은 주먹이었으나 워낙 잽싸서 그런지 아프기는 더럽게 아프다고 크리스는 생각했다.
“녀석아! 단장님 안 지 얼마나 됐다고!”
“안 지 얼마 안 됐지만 단장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라고. 영원히 단장님 밑에서 일하겠다고 약속할 수도 있어.”
“그래 봤자 외간 남자야. 좀 거리를 두란 말이야. 아버트 단장님이나 리온이랑은 다르…….”
“…여기서 리온 얘기가 왜 나오는데?”
아나샤는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앞에 있는 크리스는 그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조용해진 아나샤의 반응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치안대 건물이 보이자 그는 서서히 고삐를 당겨 속도를 줄였다.
“갑자기 리온 얘기 꺼낸 건 미안하다. 근데 너 하는 행동이 꼭 예전에 리온한테 하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 타고 있던 아나샤가 먼저 말 등 위에서 뛰어내렸다.
“난 먼저 들어갈게. 수고!”
“…진짜 저게.”
저 혼자 건물로 쏙 들어가 버리는 행태에 크리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걸 총애하는 단장님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근처 나무에 고삐와 이은 밧줄을 꽉꽉 조였다. 뒤늦게 건물에 들어서자 이미 제집인 양 의자에 앉아 떠들고 있는 아나샤가 보였다.
‘누가 보면 치안대 소속인 줄 알겠네.’
크리스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아나샤의 뒤통수를 보고 있을 때, 그의 앞으로 기사 하나가 다가왔다. 익숙한 얼굴에 크리스는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이야, 테윌러 경. 예전에 봤을 땐 신참 병아리였는데 말이야.”
“크리스 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 비번이기도 했고. 쟤도 데려왔지.”
그가 힐끗 아나샤를 눈으로 가리키자 테윌러라 불린 기사가 눈웃음을 머금었다.
노랗게 보일 만큼 밝은 갈색 머리에 연두색 눈을 가진 사내는 이젠 제법 몸에서 기사 태가 났다. 크리스가 기억하는 그의 일 년 전 모습은 더 앳됐었는데, 젖살이 더 빠져서 그런지 선하고 준수한 얼굴엔 약간의 날렵함이 배어있었다.
‘그때도 아샤랑 친했었지.’
당시 기사 견습생 신분이었던 테윌러가 다른 곳으로 발령받아 아쉽다고 징징대던 아나샤의 모습이 떠올랐다.
“경도 그렇고 아샤도 그렇고, 안 변한 것 같아 보여도 생각보다 모습들이 많이 변했어. 하긴 뭐 그땐 아샤는 십 대였으니까.”
“네. 아샤도 많이 예뻐졌네요.”
테윌러의 조용한 대답에 크리스는 ‘어쭈? 요것 봐라?’ 하고 속으로나마 생각했다. 그때 멀리 떨어져 있던 아나샤가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테윌러는 오늘 어디로 순찰 도는데?”
“나는 오늘 동편 시가지 쪽 상가를 돌기로 했어.”
“일단 크리스 경은 저와 함께 가시죠. 생각보다 순찰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리고 테윌러, 너는 이 아가씨를 부탁하마.”
곰처럼 거대한 체구의 중년 기사가 다가와 그들 셋에게 말했다. 그의 말에 테윌러는 어색하게 시선을 내리며 애써 “네!” 하고 힘차게 대답했고, 아나샤는 상가 쪽이 볼거리가 많아 좋다며 웃었다.
그렇게 두 조로 나뉘어 가게 된 지 오 분도 지나지 않아 뜻밖의 시련이 찾아왔다. 먼저 출발한 크리스가 말을 타고 가버려 졸지에 아나샤는 발이 묶이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여분의 말을 또 구해오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테윌러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차있을 때 아나샤가 아무렇지 않게 그의 말 옆에 서며 말했다.
“말 타고 갈 거지? 같이 타자.”
“네가 불편할 것 같은데…, 아샤 괜찮겠어?”
“뭐 어때? 그리고 불편할 게 뭐 있겠어?”
먼저 훌쩍 말 위에 오른 아나샤가 재촉하자 테윌러도 뒤따라 안장에 올랐다. 넉넉히 뒷공간만 남은 상황에 당연하게도 그의 자리는 그녀의 뒤가 되었다.
“미안. 실례할게.”
테윌러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지나쳐 고삐를 쥐었다.
천천히 말을 모는 동안 팔뚝 안쪽에 스치듯 그녀의 가녀린 허리가 닿았다. 동시에 불어오는 바람에 단발머리가 그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짧았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을 하던 테윌러는 다시 단단히 고삐를 움켜쥐었다.
속도를 높이자 살짝씩 제 품에 닿던 그녀의 등이 품에 안기듯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다시 속도를 줄여야 하나 고민할 때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런 사심 없이 그저 맑은 까만 눈동자가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테윌러는 순간 제 가빠진 심장 소리를 들킨 건가 싶어 침음을 삼켰다.
서서히 달아오르던 귓불이 뜨겁다. 이대로라면 분명 그녀가 눈치챌 것이라는 조급한 생각에 더 심장 소리가 크게 쿵쾅거렸다. 결국 테윌러는 도중에 고삐를 잡아당겨야만 했다.
“역시 마차를 타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안 될 것 같아.”
테윌러는 고개를 숙이고서 말했다. 근 1년 만에 만난 짝사랑 상대 앞에서 태연하기란 역시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말하지 그랬어, 참 나. 아픈 걸 왜 숨긴 거야?”
시내 마차로 이동하자는 그의 말에 이상함을 느낀 아나샤가 그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댄 것이 오해의 시작이었다.
달아올라 있던 그의 얼굴 열에 아나샤는 감기라고 판명 지었다. 테윌러는 애써 웃으며 가벼운 감기일 테니 걱정 말라고 했지만 그녀는 조금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늘은 나한테 맡기고! 절대 무리하지 마. 알겠지?”
“하하.”
“웃지 말고. 테윌러 넌 무리하는 그 버릇은 여전하구나?”
“아샤 너도, 여전히 너다운 것 같네.”
“나답다고? 내가 뭘?”
“이런 다정한 점은 변함없구나 싶어서……. 기억나? 예전에 내가 몸 상태가 안 좋은 채로 훈련을 받았을 때.”
그녀는 까무룩 잊어버린 것 같았지만 테윌러에게는 아직도 그 기억만큼은 생생했다. 견습생 시절, 견습생들 중에서도 실력이 썩 좋지 않았던 그는 항상 남들보다 무리하는 버릇이 있었다. 성실한 건지 필사적인 건지 그때는 그랬다.
팔 상태는 생각하지 않고 무리하게 검을 휘두르다가 어느 날은 팔 윗부분이 퉁퉁 부어오르는 경지까지 이르렀었다. 어떻게든 힘든 내색 하지 않고 오기로라도 훈련 시간 동안 버텨보려고 했던 그때, 아나샤가 그를 잡아챘다. 그리고 무작정 연무장 밖으로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이봐, 아샤 이 녀석아!! 훈련 중에 테윌러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지금이 쉬는 시간인 줄 알아?’
‘나 일손 부족해서 좀 데려갈게!’
임무에 필요한 인력이라고 하니 선배들도 별말 없이 보내주었다. 그리고 연무장을 벗어나자마자 아나샤는 사악하게 입꼬리부터 끌어 올렸다.
‘바보 같은 삼촌들, 일손 부족하다는 건 거짓말이지.’
‘이래도 돼?’
‘응? 괜찮아. 안 들켜, 안 들켜. 평소에도 자주 속이고 땡땡이 쳤는걸 뭐.’
‘…….’
‘사실 일이 있긴 한데 나 혼자 해도 되는 일이거든. 넌 가서 쉬어. 아프잖아?’
‘…어떻게 알았어?’
‘맞혔어? 오늘 어딘가 안색이 안 좋아 보이길래 찍어본 건데.’
‘나 잘했지?’ 하고 말하는 그 해맑은 얼굴에 그 당시 테윌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 말대로 그날 하루 푹 쉬자 다음 날 팔 상태도 괜찮아졌었다. 그리고 아마 그 뒤부터였을 것이다. 그녀가 자꾸만 눈에 밟히게 된 건.
“내가 그랬었다고? 그때도 삼촌들은 멍청했었군.”
작게 소리 내어 웃은 아나샤는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뒤따라 내린 테윌러는 그녀와 함께 나란히 순찰 지대를 걸었다. 귀족들이 이용하는 상점가 주변이라 그런지 거리는 깔끔했다.
두 사람은 간만에 여러 얘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다른 기사들은 잘 지내는지, 제일 많이 떠든 아나샤가 새 단장님에 대한 얘기를 막 꺼내려던 찰나였다.
“착오가 있었다니요?”
“죄송합니다.”
의상점 앞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레이스 양산을 쓴 금발 머리의 귀족 아가씨는 의상점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말했다.
“고작 이런 일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직접 걸음해야 되나요?”
“다시 한번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보고 판단하시는 게 나을 것 같아…….”
“자수야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기간 내에 완성만 해줘요.”
“지금이라도 허락해 주신다면 수정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우격다짐이 매일같이 일어나는 다른 거리에 비하면 실랑이라 하기에도 뭐한 실랑이였다. 끼어들어 중재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아나샤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긴 거리를 걸으면 걸을수록 시종을 대동한 귀족 영애들이 많이 보였다.
“아, 혹시 무도회 때문인가?”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말하자 테윌러가 그런 것 같다고 얘기했다.
“테윌러, 너도 무도회에 참가해?”
“그렇지. 가족들이 참가하니까.”
“무도회는 어떤 곳이야? 한 번도 안 가봐서 잘 모르거든.”
“글쎄. 우아한 연주 소리가 흐르는 정신없는 곳?”
그의 비유에 아나샤는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사람 많고 시끄러운 장소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다운 비유였다.
“가보고 싶어?”
“물론! 난 축제 분위기 좋아하거든. 내가 너 대신 가면 딱일 텐데.”
“…그럼 갈래?”
잠시 뜸을 들인 테윌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나샤는 놀란 얼굴로 멈춰 서서 그를 돌아보았다.
“농담이었는데, 진짜로? 근데 키부터가 이미…….”
이 키 차이는 어떻게 해도 속일 수가 없겠다며 그녀가 진지하게 고민에 빠지자 테윌러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엉뚱한 것도 여전하단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