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사랑에 빠질 때-14화 (14/87)

14화

“없어요! 없어! 제가 있어 보여요?”

“네.”

“애인은커녕 한 번도 연애해 본 적도 없는데요 뭘.”

“그대가… 말입니까?”

그대 같은 사람이 애인이 없었을 리가 없다는 물음에 되레 아나샤가 놀란 반응이었다. 반쯤 벌렸던 입을 서서히 다문 그녀는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단장님 정말, 사람을 기쁘게 만들 줄도 아시구. 정말 좋은 분이세요!”

어떤 부분에서 그녀가 감명을 받은 것인지 리히르트는 알 수 없었다. 고작 한 달간 알고 지낸 사이라지만 그가 본 아나샤는 이제껏 만나온 그 어떤 사람보다도 좋은 사람이었다.

솔직한 매력과 독특한 행동으로 상대를 편안하고 즐겁게 만들 줄 알았다. 사람 사귐에 있어서는 대가나 다름없으니 당연히 연애 경험도 풍부할 거라 여겼던 것이다.

“단장님. 오늘 오전 중으로 처리하셔야 할 서류 가져왔습니다.”

그때 문밖에서 들린 노크 소리에 아나샤는 단장실 천장 위로 잽싸게 올라갔다. ‘조금 있다 또 내려올게요.’ 하고 입 모양으로 말한 그녀는 천장 타일을 덮었다. 뒤미처 행정관이 들어왔다.

“서류는 그게 단가?”

“네.”

“열한 시쯤에 다시 오도록.”

“알겠습니다.”

리히르트는 사무관이 나가자 쥐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당장 일을 시작해도 시간 안에 맞추기에 빠듯한 감이 있었지만 지금 그에겐 아무것도 개의치 않아 보였다.

애인이 없다. 이 말이 왜 이렇게 머릿속에 오래 남는지 그로선 알 수 없었다.

* * *

훈련을 마치고 연무장을 빠져나오던 기사들은 수돗가에 있는 두 남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예전이라면 헛것을 본 게 아닌가, 혹은 아나샤가 실수라도 할까 걱정했을 기사들은 이제는 익숙하게 그 광경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저거, 저거. 또 찰싹 붙어있네.”

오늘도 나란히 붙어있는 두 남녀의 모습에 크리스는 혀를 찼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새 단장님을 절대 인정할 수 없다던 태도는 온데간데없는 모습이었다.

크리스의 옆에 서있는 기사들도 저 변화가 신기하긴 마찬가지였다. 정확히는 아나샤보다는 단장님 쪽이.

“묘하게 단장님도 아샤 앞에서는 물러지시는 것 같기도 하고.”

“난 잘 모르겠다. 표정이 워낙 한결같으신 분이니.”

“잘 봐봐. 분위기가 달라졌잖아. 저게 훈련에서 보던 그 단장님이냐고.”

기사들은 한마디씩 내뱉었다. 대화의 주제는 단장님에서 어느새 아샤의 태도 변화로 돌아와 있었다.

손바닥 뒤집듯이 바뀐 태도는 그렇다 쳐도, 아샤가 단장님에겐 유독 살갑게 군다는 것을 기사들은 모두 눈치채고 있었다. 꼬리가 달렸다면 그의 앞에서 연신 살랑거렸을 모습인 것이다.

“총애받는다느니 뭐라 했던 거 보면, 승진하고 싶은 건가?”

“승진은 무슨. 그냥 잘생긴 외모에 약해진 거지.”

“쟤가 그런 거에 휘둘릴 성격이냐. 나는 아샤를 그런 애로 키운 기억이 없다!”

“네가 뭘 키웠다고! 백에 오십은 내가 키웠지!”

“이 자식들이 뭔 소리야. 아샤가 제일 좋아하는 삼촌은 나랬어.”

몇몇이 삼촌부심을 부리는 사이, 크리스만이 알 수 없는 찝찝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간 어미 오리를 졸졸 따라다니는 새끼 오리인 양 기사단장을 따라다닌 아나샤였다.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진다고 여길 때 마브릭이 지나가듯이 말했다.

“어릴 적 보는 것 같네. 리온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래! 리온!!”

크리스의 외침에 마브릭이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흠칫 놀라며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갑자기.”

“저거 리온 녀석한테 하던 거 그대로 하고 있잖아.”

“응? 리온? 뭐 비슷해 보이기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단장님과 리온은 성격도 다르고 생긴 것도…….”

“리온 녀석도 연한 금발이지 않았냐……?”

“그러고 보니…….”

마브릭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무거운 침묵을 지키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그 광경을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다.

“그래도 뭐… 둘이 덥석 눈이 맞거나 그런 일은 없겠죠?”

“젊은 남녀잖아. 누가 알아? 일 년도 안 돼서 결혼까지 갈지.”

낭만주의 연애론자 니콜라스가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곧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손길에 푹 고개를 숙여야 했다.

“야, 단장님이 스물여덟인데! 그러면 순 도둑놈이지!”

“아샤가 나이가 몇인데, 결혼은 무슨!”

“이르다 일러. 적어도 우리들 다 결혼하고 나서 보내야지.”

기사들의 결사반대가 이어지는 동안 그 대화의 주인공들은 한가롭게 날씨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오늘 정말 날씨 좋네요. 이럴 때 놀러가야 되는데 말이에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파랬다. 오늘도 아나샤는 대부분의 시간을 리히르트 그와 함께 보내고 있었다. 그가 어딜 가든 따라다녔는데 최근엔 그를 따라 연무장에서 훈련을 돕고 있었다.

웬만한 연인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하는 이 둘이었지만, 아나샤도 리히르트도 그런 쪽의 자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서로를 무척이나 아끼는 상관과 부하일 뿐이었다.

“애옹.”

수돗가 근처의 수풀이 바스락거리더니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아나샤를 발견한 고양이가 곧장 그녀에게 다가가 다리 주변을 맴돌았다.

“단장님은 처음 보죠? 여기 자주 오는 애예요. 누가 키우는 것 같은데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기분이 좋은지 골골거리기 시작했다. 아나샤는 조심스럽게 고양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리고 리히르트와 마주 보게 했다.

“새로운 단장님께 인사해야지.”

관심이 없다는 듯이 고양이는 나른하게 입을 벌릴 뿐이었다.

“야옹 해봐. 야옹.”

“먀.”

“야옹, 야옹 해야지.”

“애―옹.”

“아유, 착해라.”

고양이를 땅에 내려준 아나샤는 그 옆에 쪼그려 앉아 부드러운 털을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이 좋은지 고양이는 완전히 드러누워 버렸다. 개가 아닌지 의심이 들었으나 아나샤는 계속해서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주인에게 사랑을 많이 받나 봐요. 사람을 엄청 잘 따른다니까요.”

“먀아.”

“그래그래. 여기가 기분 좋아? 보세요. 너무 귀엽죠?”

“…네.”

올려다보며 묻는 그녀의 말에 리히르트는 무의식중에 대답해 버렸다. 그것이 속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곧 그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려버렸다.

왠지 놀란 것 같기도 하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그의 모습에 아나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양이를 귀엽다고 말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건가? 아무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아나샤는 알지 못했다. 그의 눈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양이가 아닌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었단 사실을 말이다.

4장 자각의 순간 (1)

“오늘 낮 진짜 덥네요! 이 날씨에 검 휘두르다 돌아가시겠어요. 먼저 단장실에 가서 차가운 냉수라도 준비해 놓을까요?”

“괜찮습니다.”

“그래도요. 목마르잖아요. 임무도 없이 한가한 저를 부려먹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요?”

“그대도 오늘은 훈련을 돕느라 힘들었지 않습니까. 가만히 있어도 됩니다.”

리히르트는 세상 무심한 투로 말했지만 아나샤는 그의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단장님이 또 어디 있을까! 거짓말을 좀 보태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저 오늘도 든 생각인데 영원히 단장님 밑에서 일하고 싶어요.”

“그렇습니까?”

무표정한 얼굴처럼 보여도 이젠 그의 희미한 웃음기를 알아채 낼 수 있었다.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면 훨씬 더 잘생기셨을 텐데 아쉽기도 했다. 아나샤는 나무 위에서 평소처럼 재잘대다가 다시 업무를 하러 들어가는 그를 배웅했다.

“단장님은 일하러 가시고, 삼촌들은 다 훈련 중이고, 이제 난 뭐 하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 다리만 한들한들 흔들어 댈 때였다.

“너 오늘도 할 일 없지?”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져서 무시했는데 역시나 나무 밑에 온 사람은 크리스였다. 아나샤는 으쓱 눈썹을 들었다 놓았다. 왜, 라고 묻는 거만한 표정에 크리스는 짐짓 근엄한 척 팔짱을 끼고 서서 입을 열었다.

“나랑 같이 가자.”

“어디를?”

“시내 순찰.”

“오예!”

언제 지루한 얼굴이었냐는 듯 아나샤가 밝게 외쳤다. 그리고 한 바퀴 공중제비 돌기를 하며 사뿐히 그의 앞에 착지해 섰다.

“근데 왜 우리가 시내 순찰이야? 그쪽 관할 치안대는 뭐 하고?”

“난들 알겠냐? 인력이 부족하니까 오라는데 어쩌겠어. 마침 비번은 나뿐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호오. 비번도 다 반납하고 참 부지런하셔라.”

“너야말로 아까 할 일 없다고 하늘 보면서 궁상을 떨던 건 기억 안 나나 보지?”

평소와 같이 티격태격하며 두 사람은 마구간에 도착했다.

아나샤의 몸이 워낙 가볍다 보니 말은 한 필이면 충분했다. 크리스의 뒤에 뒤돌아 앉은 아나샤는 달리는 말 위에서 두 다리를 접기까지 했다. 묘기처럼 아슬아슬해 보이는 자세였지만 그녀 본인은 평지에 앉은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성문을 벗어나 수도 거리로 말을 몰던 크리스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러고 보니까 말이야. 줄곧 궁금했는데 단장님은 왜 너한테는 존댓말로 말씀하시냐?”

“그야 내가 총애받으니까지, 뭐겠어. 삼촌도 불만이면 총애받는 부하가 되든지.”

“총애 좀 받더니 예전보다 더 건방져졌다? 아주 살맛 나나 보네?”

“응! 가끔씩 단장님이 맛있는 과자 같은 것도 주시고, 차도 같이 마시자고 하시고, 소파에 누워있는 것도 허락해 주시고, 이것저것 챙겨주시고, 부럽지? 부러운 거 다 알아.”

나무 위에서 개를 놀리는 원숭이처럼 아나샤는 얄밉게 혀를 놀렸다. 그러나 크리스는 전혀 그것이 얄밉게 느껴지지 않았다.

“…단장님이?”

믿기지 않는 사실을 받아들이느라 얄밉다고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쥐고 있던 고삐마저 놓을 뻔한 크리스는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아버트 단장님이 아니라……?”

“삼촌도 참! 할아버지가 나한테 과자 챙겨주고 차 따라주고 그럴 위인이야? 오히려 뺏어 먹고 시치미 떼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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