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농담 삼아 묻는 것인가 싶었지만 그녀는 진지해 보였다. 앞장선 그녀가 향한 곳은 인적 드문 언덕 위 숲길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가파르다 싶던 경사는 걸으면 걸을수록 비탈진 길이 되었다. 바위와 수풀이 무성해 길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재빠르게 바위들을 지나쳐 길을 안내했다. 원피스를 입어도 날렵한 것은 변함없었다. 다른 이라면 진즉에 지치고도 나가떨어졌을 길이었지만 리히르트는 조금의 지친 기색도 없이 묵묵히 뒤따라갔다.
산행은 무려 한 시간이나 더 이어졌다. 붉게 타들어 가던 석양도 종적을 감추고 고요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거대한 바위들을 기어오르듯 올라가던 아나샤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윽고 도착한 것인지 그녀가 꼭대기로 추정되는 넓적한 바위 앞에 멈춰 섰다. 먼저 편하게 자리를 잡더니 그에게 옆자리를 양보했다.
“예쁘죠?”
그녀와 같은 자리에 앉은 순간 리히르트는 그녀가 왜 자신을 이곳에 데려오고 싶어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탁 트인 시야에 수도의 아름다운 야경이 들어찼다. 수도 한가운데를 차지한 황성을 중심으로 작은 불빛들이 반딧불처럼 옹기종기 퍼져있었다. 성의 불빛을 머금은 강과 넓게 펼쳐진 별 가득한 하늘, 그리고 그 사이로 작은 손이 뻗어졌다.
“보세요. 하늘도 예뻐요.”
어느 곳에서 보든 하늘은 다 같다고 여긴 그조차 잠시 넋을 놓을 정도였다. 인공적인 빛에 조금도 노출되지 않은 별들이 새벽녘의 이슬처럼 빛났다. 셀 수 없을 만큼 끝없이.
“수도에서 제가 가장 아끼는 곳이에요. 물론 저도 선물받은 곳이지만요.”
뿌듯한 얼굴로 수도를 내려다보던 아나샤가 고개를 돌렸다.
“저의 새로운 단장님이 되신 기념으로 선물해 주고 싶었어요. 앞으로도 항상 이 풍경처럼 좋은 것만 보셨으면 해서요!”
“…….”
“단장님은 되게 무뚝뚝할 거같이 생겼는데 정말 좋은 분인 것 같아요. 처음엔 대귀족이라고 해서 엄청 깐깐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고요. 그래서 기뻐요. 단장님이 새 단장님으로 와줘서요.”
그는 본래 무뚝뚝한 사람이 맞았다. 이렇게 편하게 말을 걸고 다가오는 아나샤가 오히려 더 특별할 정도였다.
“저도 그대와 만나서 기쁩니다.”
그리고 리히르트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제 감정을 표현했다. 크게 기쁘다고 여겨본 적도, 사소하게나마 기쁘다는 감정이 들었어도 무시하고 말았을 그가 처음으로 그 감정을 인지하고 인정했다.
이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변화의 폭풍을 불러일으킬지 알 리 없는 아나샤는 그저 말갛게 웃었다.
* * *
리히르트는 항상 정직함을 제 인생의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그것은 아버지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스스로든 타인이든 죄를 숨기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영지에선 심문에 응하지 않는 범죄자를 본인이 직접 맡아 고문할 정도로 그는 솔직하지 않은 자에게 있어서만큼은 자비가 없었다.
그리고 현재 그의 앞에서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자가 있었다.
“잊지 않았어요.”
“솔직히 말하는 것이 저는 좋습니다.”
“정말이에요! 분명 외웠단 말이에요. 그저… 갑자기 떠올리려고 하니까 당황해서 그런 거예요.”
그게 잊은 것과 의미가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는 것 같았다. 리히르트는 오늘에 와서야 자신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실망감을 드러내던 귀족 여인들의 반응이 이해가 갔다. 자신도 지금 그런 기분이었다.
“잠시만요! 으으, 방금! 방금 기억이 났어요.”
“…….”
“리히로트……? 리히로트 맞죠?”
“아샤 경, 알겠습니다. 힘들면 그만해도 됩니다.”
리히르트는 조금도 서운하지 않은 얼굴과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포마드 형태로 깔끔히 쓸어 넘긴 백금색 머리칼은 한 올 내려오지 않았고, 자세도 네 시간 전과 비교했을 때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다시 서류를 검토하는 그의 모습은 석상과도 같았다.
다시는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 모습에 아나샤는 급히 입술을 떼어야만 했다.
“그러면 더 서운해 보인다고요!”
“서운하지 않습니다.”
“네? 완전 서운해하는 얼굴인데요? 지금도 막 서운하니까 갑자기 서류 보려고 하고…….”
“원래부터 보고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아샤 경 그대가 나와서 말을 걸기 전까지.”
“갑자기 보는 거 맞잖아요! 이러면 제가 더 마음이 불편하단 말이에요… 단장님.”
아나샤는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업무 책상 주위를 기웃거렸다.
“혹시 저한테 시킬 일 뭐 없을까요오?”
“괜찮습니다.”
“갑자기 뭐가 당긴다거나. 사다 줄 수도 있는데.”
“천장으로 오고 가면서 사다 주는 것이라면, 미안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제대로 바깥으로 다닐 거예요!”
장담한다며 가슴 위를 통통 두드리는 모습에 리히르트는 사무적으로 근처에 있는 주전자를 눈으로 가리켰다.
“그럼 목이 마르니 저기 있는 주전자에 물을 채워와 주겠습니까?”
“네!”
밝게 대답한 아나샤는 그대로 소리 없이 열린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2층이었지만 아무 소리도 없는 것이 잘 내려간 듯했다.
아나샤는 거친 나무줄기 표면 위를 마치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그리고 기사단 분관에 위치한 식당 부엌 창문을 빠르게 타 넘어갔다.
“어이고야!”
부엌에서 마른 접시를 나르던 중년 여성이 갑작스러운 검은 인영의 등장에 소스라치게 놀라 접시를 떨어뜨렸다.
접시가 요란하게 바닥에 부딪치기도 전에 먼저 아나샤의 손이 그것을 낚아챘다. 그리고 가볍게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착지해 멀쩡한 접시를 중년 여인의 앞에 내밀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놀라셨죠?”
“…아, 괜찮아요.”
시커먼 옷을 두르고 있는 자가 작은 체구의 여자라는 것을 눈치챈 중년 여인의 표정이 조금은 부드럽게 풀렸다.
접시를 건넨 아나샤는 물주전자를 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실 물을 찾는 거라면 저기예요. 내가 갖다줄게요.”
“정말요?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나야말로 고마운걸요. 그보다 혹시 아가씨는 암살자나 뭐 그런 건 아니죠……?”
“네?! 아뇨, 아뇨, 여기 기사예요. 제가 보다시피 이런 옷차림이라… 하하. 놀랄 만도 하죠?”
“아아, 그런 것도 모르고 미안해요! 요즘 기사님들은 이렇게 은밀한 복장들을 하고 다니시는군요. 여기서 일한 지 얼마 안 돼서, 호호.”
괜한 오해를 했다며 넉살 좋게 웃어 보이는 중년 여인과 아나샤는 그 자리에서 빠르게 통성명까지 했다. 세 달 전부터 주방에서 일하게 됐다는 얘기부터 시작해 별의별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물주전자의 존재는 까맣게 잊혀가고만 있었다.
“그보다 얘기 들었어요. 새로 기사단에 오신 공작님 말이에요. 정말 잘생기셨다면서요. 호호,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는데 듣기론 정말 잘생기셨다고 그러더라구요. 벌써 수도 밖까지 소문이 쫙 돌았는걸요?”
“맞아요, 엄청 잘생기셨어요!”
“어머나, 정말요? 어떻게 생기셨대요? 역시 기사님이시라 벌써 아시나 보네!”
“새하얀 금발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지셨어요. 장담컨대 제가 이제까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울걸요?”
“거기다 결혼도 안 하신 상태라면서요? 귀족 아가씨들이 지금 난리래요. 이번 연회 때 입을 드레스를 벌써부터 서로 앞다퉈서 제작하는 바람에 지금 없어서 못 판대요, 글쎄.”
“정말요? 단장님 때문에요?!”
아나샤는 크게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그의 존재가 이렇게까지 대단할 줄은 몰랐는데 역시 귀족 중의 대귀족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기사님은 뭐 따로 준비 안 해요?”
“네? 저요?”
“네, 기사님도 아리따운 아가씨잖아요. 혹시 또 모르잖아요, 공작님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에이, 아니에요. 단장님은 단장님일 뿐인걸요?”
크게 손사래를 치며 아나샤는 말했다. 그러다 뒤늦게 목말라하고 있을 그를 깨닫고 서둘러 발을 움직였다.
“아, 그보다 물 가져가야 하는데! 이만 가볼게요.”
창문을 타 넘고서 재빨리 단장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단장실로 돌아온 그녀는 가라앉은 푸른 눈과 마주치자마자 머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안해요, 목 많이 말랐죠? 중간에 부엌에서 아주머니를 만났다가 그만 같이 떠들다 와버렸어요.”
“괜찮습니다.”
“근데 아세요? 단장님이 지금 수도에서 최고로 인기 만점이라는 거? 귀족 아가씨들이 다 단장님한테 잘 보이려고 앞다퉈서 새 드레스를 산대요, 글쎄!”
물주전자를 원래 자리에 내려놓기 무섭게 아나샤는 아까 전 아주머니의 말을 흉내 내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정작 그는 별 반응이 없었다.
“왜 반응이 없으세요? 안 좋으세요? 전 듣자마자 감탄했는데.”
“좋아해야 하는 겁니까?”
“혹시… 이젠 너무 당연해서 놀라지도 않는…….”
“그저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 무덤덤한 목소리에 아나샤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의 반응은 뭐랄까 너무 김이 샜다. 수도의 아리따운 귀족 영애들이 모두 그를 위해 치장에 열을 내고 있다는데 이런 무반응에 가까운 반응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나샤는 세 가지의 경우를 생각했다. 그가 정말 관심이 없거나, 속으로만 좋아하고 있거나, 이미 애인이 있거나.
“단장님 혹시 애인 있으세요?”
“…그건 갑자기 왜 묻습니까?”
“그냥, 요?”
“없습니다.”
왜 물어보는 거냐고 당황해 묻던 것치곤 칼같이 깔끔한 대답이었다.
없을 리가 없을 텐데, 하는 의심을 담아 그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펴보았지만 진실인지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긴 이런 걸로 왜 거짓말을 치겠냐는 생각에 아나샤가 먼저 뒤를 돈 순간이었다.
“…아샤 경은 애인이 있습니까?”
“저요?”
그가 질문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아나샤는 놀란 얼굴로 그를 봤다. 왠진 모르겠지만 어딘가 초조한 기색을 띤 얼굴로 그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푸하하 하고 아나샤는 조금 경박할 정도의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