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꼭 가봐야 하는 명소를 제가 지도에 표시해 드릴게요. 일정은 휴일 날 단 하루죠? 그럼 한 다섯 시간 정도 돌아다닌다고 치면, 음 시장이 나을 것 같아요. 주변에 먹을 거랑 구경할 거리가 많거든요. 제 말대로 다녀온다면 분명 후회하지 않을걸요?”
“그렇군요. 그대 말대로 해보겠습니다.”
“길은 잘 찾으세요? 지도 볼 줄 아시죠?”
좋다고 추천할 때는 언제고 그녀는 한편으로는 그가 못내 걱정된다는 얼굴이었다. 마치 세 살배기 어린 아들을 물가에 내놓은 어머니처럼 말이다.
“그, 혹시라도 불쌍한 척하면서 돈 달라고 접근해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요. 그리고 길거리 공연을 봤다고 해서 무조건 돈 내야 되는 건 아니에요.
너무 잘 봐서 돈을 내고 싶다면 줘도 되는데 너무 큰 액수는 좀 위험해요. 그런 거 엿보고 있다가 삥 뜯으러 오는 불량배들이 간혹 있거든요. 그리고 길 알려주겠다고 따라오라고 해도 절대 따라가면 안 되고요!”
“…이해했습니다.”
“단장님은 뭔가 너무, 아니에요.”
곱게 자란 귀족 중의 귀족이라는 이미지가 너무나도 딱 들어맞는 그였다. 예의가 바르고, 청렴결백하고, 남에게 따지기는커녕 조용히 넘어갈 것 같은 심성마저 여린 그였다.
물론 아나샤가 그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다지만, 그녀의 눈에 비치는 그는 그랬다. 보호해 줘야 할 아름다운 사슴 같았다.
“아! 아니면 휴일 날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불안해할 바에는 차라리 같이 가는 게 나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그녀였다.
“제가 길도 안내해 드리고 이것저것 소개해 줄게요. 어떠세요?”
“이번 달 한 번뿐인 휴일인데 괜찮겠습니까?”
“에이, 저도 한 번뿐이면 단장님도 한 번뿐인데요 뭘. 그리고 휴일에는 원래 놀러가 줘야 하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리히르트는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좋다는 뜻을 보였다.
* * *
그리고 약속 전날 밤 리히르트는 늦게까지 서재에 있었다. 이전부터 읽어왔던 것으로 추정되는 책들이 그의 책상 왼편에 가득히 쌓여있었다.
책의 제목들은 하나같이 ‘에스코트 이론서’, ‘귀족 남녀 간의 만남’, ‘데이트의 기본 매너’로 그가 평상시 읽던 전투서나 관련 보고서와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사실 리히르트는 이제 와 복잡한 심경이었다. 여성과의 사적인 만남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감히 공작인 그에게 대놓고 만남을 신청할 여인이 어디 있겠으며, 또 그렇다 해서 쉽게 만나줄 그도 아니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녀는 그런 이성적인 접근을 원한 게 아니겠지만 어찌 됐든 사전적 의미로는 데이트였다. 구체적으로 남성으로서 어떤 매너를 갖춰야 하는지 정도는 배워둘 필요는 있다고 여겼다.
밤새 남은 책들을 마저 완독한 그는 다음 날 아침 시녀들이 준비한 옷을 갖춰 입었다. 따로 신경 써서 준비하라 이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첫 휴일 외출복에 시녀장이 특별히 신경을 쓴 것이었다.
검은 조끼를 안에 입고 짙푸른 계열의 정장 코트를 덧입은 그는 누가 봐도 귀족들의 초대에 응한 사람 같았다.
마차에 오른 리히르트는 미리 말해둔 목적지로 향했다. 작은 시계탑이 서쪽을 향해 세워진 광장 거리 앞에서 마차는 멈췄다. 한적한 거리를 둘러보며 그가 세 걸음 정도 내디딘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작은 무언가가 그의 가슴팍에 부딪쳐 왔다. 일부러인지 오히려 그의 팔을 꽉 잡아채더니 다시 마차 안으로 그를 밀어 넣었다.
리히르트는 얼떨떨한 감정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제 품에 반쯤 묻힌 것 같은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아나샤가 팩 하고 고개를 들었다.
“세상에! 우리 오늘 시장 간다고 했는데!”
아나샤는 그의 품에서 서둘러 떨어지고선 혹여 누가 보진 않았나 창문 밖을 응시했다. 다행히 한적한 거리라 아무도 없었다. 다시 그에게로 고개를 돌린 그녀는 앉아있는 그 앞에 서서 조용히 타이르듯 말했다.
“…이렇게 시장에 가면요. 바로 폭력배들한테 찍혀서 뒷골목으로 끌려가요. 탈탈 털리고 싶으세요?”
“탈탈, 말입니까?”
“저도 한 번 털려봤는데 진짜 숨겨놨던 동전까지 턴다니까요? 아무튼 일단 위에 그 옷 좀 벗으시고요. 바지는 어쩔 수 없겠지만, 확실히 셔츠 하나만 입는 게 눈에 덜 띄고 낫네요.”
그의 정장 코트와 조끼를 차례로 압수한 아나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벗은 옷들을 마차 소파 한편에 대충 던져놓고서 그녀는 나가려는 그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아직 덜 됐어요!”
“……?”
동시에 리히르트의 시야가 비스듬히 가려졌다.
“짜잔, 이제 됐어요.”
방긋 웃으며 아나샤가 그의 머리 위에 암갈색 베레모를 눌러 씌운 것이다.
사실 뭘 입든 간에 그는 너무 눈에 띄는 외양이었다. 잘생긴 얼굴이야 그렇다 쳐도 머리마저 무려 백금발이니 말이다. 모자를 챙겨오길 잘했다고 여기며 아나샤는 그 모르게 얕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가요. 놀러.”
손을 잡고 앞장서는 모양새가 흡사 그의 보호자였다. 아나샤는 익숙하게 길을 찾아 걷다가 뒤늦게 제 손바닥 안에서 조금씩 꿈틀대는 긴 손가락들을 눈치챘다.
“헉, 미안해요. 들떠서 그만 생각 없이 잡아버렸나 봐요.”
“…아닙니다.”
색소가 옅은 긴 속눈썹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하고, 차가운 인상 때문인지 몰라도 어딘가 불쾌한 것 같기도 했다. 역시 친하지도 않은데 허락 없이 손을 잡아서 불편했던 걸까? 아나샤는 정말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그 티 나는 얼굴에 리히르트는 빠르게 입을 열어 해명했다.
“정말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불편했던 건 아닙니다. 그저…….”
“그저?”
“조금 당황한 탓에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은 것 같습니다.”
이상했다. 손을 잡는 것이면 그저 잡는 것일 텐데, 순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단지 그녀가 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접촉에 묘한 기분을 느끼는 것도 이상했다. 리히르트는 새삼스레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당황할 만하죠!”
그리고 그런 그의 심각한 내적 고민을 아나샤는 한 방에 부숴버렸다.
“저 같았으면 미친놈이 아닌가 생각했을 거예요. 당황할 만해요, 암.”
“그렇습니까.”
그녀가 그렇다니 그런 것이리라, 리히르트는 넘겨짚었다. 더 깊게 생각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아나샤는 바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부터 저어어어기까지가 전부 시장이에요. 아마 여기만큼 다양한 물건을 살 수 있는 곳도 없을걸요?”
열 걸음 정도 앞서서 걷던 아나샤가 몸을 돌려 뒤따라오던 리히르트를 바라보았다. 하늘색 원피스 자락이 둥글게 퍼졌다가 다시 잠잠히 가라앉았다.
“왜 그러세요? 목말라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녀의 옷차림새에 줄곧 눈길을 두고 있던 리히르트는 숫제 아닌 척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무늬 하나 없이 수수한 원피스는 계속해서 그의 눈에 밟혔다.
다시 그의 눈길이 머무르자 아나샤가 대번에 눈치채고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 제 옷 때문에 그러시는구나. 하긴 신기할 만도 해요. 삼촌들도 가끔씩 제가 이렇게 입고 나돌아 다니면 못 알아보거든요.”
쾌활하게 재잘거리던 아나샤가 짐짓 눈에 힘을 주었다.
“그치만 저도 원래는 평범하게 입고 다닌다고요. 이런 밝은 색깔의 샤랄라한 원피스도 좋아하구요. 처음 봤을 때도 원피스 차림이었잖아요.”
“미안합니다. 이상해서 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더 이상해서 봤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이상한 것은 본인이라,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리히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그를 올려다보던 아나샤는 다시 먼저 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아까의 사과의 의미로 맛있는 거 사주려고 했는데, 흠. 좀 생각해 봐야겠어요!”
“사는 것이라면 제가 하겠습니다. 오늘도 절 위해 일부러 나온 것이 아닙니까?”
“전 그냥 같이 놀려고 온 것뿐이에요. 뭔가 해주지 않아도 돼요. 애초에 단장님, 돈은 바꿔서 온 거죠? 막 금화를 들고 온 건 아니죠?”
리히르트는 대답 대신에 조용히 허리께에 차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렇게 했는데 무언가 잘못되었냐는 표정이었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말로만 들어본 ‘번쩍거리는 금화’를 하나도 아닌 주머니째 본 아나샤가 기겁했다. 물건을 사고 이걸 지불한 순간 이 시장 바닥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오늘은 그냥 제가 낼게요.”
“하지만.”
“갚으세요. 나중에.”
역시나 따라오길 잘했다고 아나샤는 생각했다.
* * *
시작부터 위태로웠던 관광은 예상외로 순조롭게 잘 흘러갔다. 아나샤의 걱정과는 달리 그는 튀는 일 없이 시장 분위기에 완벽히 스며들었다. 시끄럽고도 활기찬 분위기 속에 덩달아 들뜬 아나샤는 그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많은 것을 구경시켜 주었다.
“아까 본 건 렌티나라는 춤이에요. 좀 격했죠? 귀족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평민들이 축제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추는 춤이에요. 그래서 일부러 그렇게 춰요. 원래는 수도에서는 가끔씩만 공연하는데 오늘은 정말로 운이 좋았어요!”
반을 가른 열매 껍데기를 잔 삼아 파는 과일 음료를 마시며 그녀가 말했다. 여전히 흥에 겨운 모습이었다.
석양이 져가는 하늘은 아름다웠다. 시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언덕 위에 앉아 두 사람은 오늘 하루 경험한 것을 얘기했다. 대부분 그가 질문하고, 그녀가 답하는 식이었다.
“마지막으로 단장님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시간 괜찮아요?”
“네.”
“그럼 갈까요?”
먼저 일어난 아나샤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까지 리드는 모두 아나샤가 맡고 있었다. 에스코트는 남자가 여자에게, 라는 이론 상식을 머리에 담은 것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리히르트는 이제는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그런 형식적인 것은 무의미했다. 오히려 그녀가 이끌어 줬기에 오늘 하루가 더 즐거웠던 것이리라.
“아직 안 지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