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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11화 (11/87)

11화

자신보다 일찍 출근한 그는 이미 업무를 보는 중이었다.

“단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네.”

기합이 잔뜩 들어간 인사에 비하면 김빠질 만큼 단조로운 대답이었지만 아나샤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그럼 오늘도 힘내시고, 저는 이만!”

“잠시만.”

천장 위로 올라가려는 그녀를 리히르트가 불러 세웠다.

“오늘 점심은 같이 먹지 않겠습니까?”

“식사 말인가요……?”

‘점심’과 ‘같이 먹다’를 조합하여 도출해 낸 결과였다. 역시나 점심 식사가 맞는지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저야 당연히 좋죠!”

“그러면 식사는 그대 것까지 해서 따로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네!”

크게 고개를 끄덕인 아나샤는 후다닥 천장 위로 올라갔다. 작은 흥얼거림이 천장 너머로 들려왔지만 리히르트는 애써 못 들은 체해주었다.

그렇게 점심시간은 약 세 시간 뒤에 찾아왔다. 미리 사항을 전달받은 황실 주방장은 두 개의 쟁반을 가져왔다. 책상은 한 사람만 앉을 수 있다 보니 손님 응접용 테이블에 식기가 놓아졌다. 기다려 왔던 시간인 만큼 아나샤는 들뜬 모습으로 스푼과 포크를 동시에 들었다.

목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을 입은 여자와 잘 차려입은 귀족적 생김새의 미남자. 마주 보고 앉은 모습부터가 참으로 묘한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아나샤는 푸짐한 식사를 모조리 먹어치울 것처럼 손을 댔으나 실제로 그녀의 접시에는 아기 주먹만 한 양이 덜어졌다. 직업상 조금씩 나눠 먹는 것이 몸에 아예 뱄기 때문이다.

물끄러미 그녀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리히르트가 운을 뗐다.

“그걸로 됩니까?”

“네?”

“활동량에 비해 먹는 게 너무 적은 게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기사란 체력이 중요합니다.”

“괜찮아요. 딱 이 정도 양이 적당하달까, 아무래도 첩자는 민첩함이 생명이다 보니까요. 체중 관리를 하다 보니까 이젠 습관이 돼서 맛있는 것도 적게 먹게 되네요.”

헤픈 웃음소리가 뒤따랐지만 그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이었다. 몸매가 드러나는 옷은 아니라지만 한눈에 봐도 그녀의 팔다리는 가늘어 보였다. 조그맣고 날렵한 초식동물도 이렇게까지 마르진 않았을 것이다.

“맛있는 것을 한두 개 더 먹는다고 해서 민첩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브라운소스가 어우러진 고기 요리가 담긴 접시를 그녀 쪽으로 밀어주며 그가 말했다. 아나샤는 그와 접시를 번갈아 가며 보다가 슬며시 고기 한 조각을 집었다. 평소보다 과식한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식사가 끝나자 두 사람은 자연스레 후식으로 차를 마셨다. 그녀가 따뜻한 차를 호호 불어 마시는 동안, 리히르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이었으나 그는 깊은 고뇌에 차있는 중이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남들보다 감각이 배로 예민한 아나샤는 그것을 자연스레 읽어내었다. 갸웃하며 그를 마주 보자 그제야 리히르트는 느리게 운을 뗐다.

“정을 주는 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저는 사람 사귐에 많이 서툰 편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대와 가까워질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싶더니 정말이지 답지 않은 귀여움이었다. 아나샤는 입술을 꾹 다물어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내야 했다.

“그러니 그대가 가르쳐 주겠습니까?”

“그래서 식사를 하자고 하신 거였어요? 약속대로 정 주려고요?”

“그렇습니다. 혹시 그대가 원하던 것과는 달랐습니까?”

“아니요. 전혀요! 솔직히 엄청 기뻐요. 약속 지켜주시려고 고민까지 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아나샤는 슬금슬금 기어 나오려는 웃음을 해맑은 표정으로 바꾸었다.

“그보다 정말 남한테 정을 준 적이 없어요? 진짜 정 없이 살았나 보네요.”

돌려 말할 생각이 없는 입은 직설적이었다. 신기하다는 눈으로 아나샤는 그를 직접 훑어보기까지 했다.

“단장님이 준 적은 없어도 다가온 사람은 많았을 거 아니에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야 단장님은 좋은 사람이니까요. 특별히 성격이 못되거나 그러지 않잖아요? 그런 사람 주위엔 늘 사람이 많거든요.”

리히르트는 ‘마치 그대같이?’ 하고 속으로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오히려 그는 눈앞에 있는 그녀가 더 신기했다.

“다가온 사람은 몇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다 떠나더군요.”

“헉! 그런 사연이……. 너무 안타깝네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제 발로 떠나갔다는 말이었습니다.”

“아, 그런 거라면 뭐.”

언제 슬픈 눈망울을 빛냈냐는 듯이 담담해진 얼굴로 아나샤가 후릅, 차를 들이켰다. 입맛에 맞았는지 얼굴에 밝은 감정이 떠올랐다. 그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 변화를 하나하나 눈에 새기듯 리히르트는 그녀를 보고 있었고 말이다.

뒤늦게 아나샤가 감싸 쥐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잡아두고 싶었던 사람은 없었어요?”

“없었습니다.”

있었다고 해도 아마 그 인연을 오래 이어가지 못했을 거라고 리히르트는 생각했다.

전투 중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주가 되었을 때가 열넷이었다. 영지와 가문을 다스리는 것으로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내었고, 성년이 된 이후부터는 국경 지대에 직접 나가 싸웠다. 그것이 그가 일평생 걸어온 길이었다.

“누군가를 신경 쓸 여력도,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나눌 시간조차 없이 대부분의 나날이 바빴습니다.”

“힘들었겠네요.”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침묵이 깔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칼 같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리히르트 그가 먼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힘듭니까?”

“저요? 음…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확실히 입이 근질근질해서 힘들 것 같아요. 저 근데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요. 제 이름 까먹었죠? 예전부터 계속 저보고 그대라고 해서…….”

“숨길 생각은 없습니다.”

까먹었다는 말이었다. 아나샤는 역시! 하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며칠 전 일이기도 하고 워낙 갑작스럽게 시작된 소개라 따로 새겨들을 경황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준다면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이제까지 몇 명의 귀족 여인들이 그를 지나쳤는지 모른다. 이름이란 곧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렇기에 사교계에서는 상대의 이름을 잊는 것이 대단한 실례였다. 즉 관심이 없다는 말이니까.

하지만 리히르트는 이론적으로만 사교술을 배웠을 뿐 이런 귀족 사회에 통용된 상식은 알지 못했다.

수도와는 거리가 멀다 보니 황실의 큰 행사가 아니고야 사교계 쪽으로는 잘 참여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여유도 없었다. 사교 행사에 직접 참석한 횟수를 세자면 아마 열 손가락은커녕 다섯 손가락 정도 꼽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대단한 실례라는 것은 숙지하고 있었고, 그 나름대로의 변명까지 첨언한 상태였다.

“다행이다, 사실 저도 까먹었거든요.”

그리고 그보다도 무지한 자가 있었다. 아나샤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단장님 이름을 까먹어서 어떻게 또 물어봐야 할지 몰랐거든요. 몰래 다른 사람한테 물어볼까 했는데, 단장님도 제 이름을 까먹으셔서 마음이 편하네요.”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네! 휴~ 역시 혼자 고민하는 게 아니었어요.”

리히르트 역시 불쾌하다거나 괘씸하다거나 하는 감정은 느끼지 않았다. 그저 잊었다면 다시 외우면 되는 것이라 여겼다.

그때 아나샤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히르트는 자신의 얼굴 앞에 얼굴을 들이민 그녀의 행동에도 당황하지 않고 담담히 자리를 지켰다.

“아샤예요. 다음에도 물어볼 테니까 잊으면 안 돼요?”

“이번에는 확실히 기억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리히…….”

“아! 제가 맞혀볼게요. 왠지 맞힐 수 있을 것 같아요!”

“…….”

“리히루트! 리히라트? 아니다! 리히리트, 리히리트 맞죠?”

그리고 아나샤는 결국 끝까지 맞히지 못했다.

* * *

아나샤는 자칭 ‘총애받는 부하’답게 매일 그의 주변에 있었다. 딱히 내려진 임무가 없다 보니 주로 하는 일은 단장님과 담소 나누기가 되었다.

리히르트도 다른 자들과는 지극히 업무에 국한된 얘기만 짧게 하는 것에 반해 그녀와 있을 때는 일상적인 얘기를 주로 나누었다.

시답지 않다고 할 만큼 사소한 얘기였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보면 대화의 주제에서 어느덧 멀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만큼 영양가 없는 내용이 주를 이뤘으나 이상하게도 그는 이 대화 시간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미묘하지만 수다의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는 참이었다.

“네?! 정말요?”

물론 그걸 받아주는 상대가 과할 만큼 잘 받아줘서인 탓도 있었지만. 아무튼 아나샤가 그에게 수다의 묘미를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진짜로요? 여기 와서 한 번도 수도 구경을 해본 적이 없다고요?”

“네.”

“저번에 휴일도 있었잖아요. 모처럼 수도에 왔는데 둘러보시지! 얼마나 재밌는 곳도 많은데요.”

본인이 더 열을 내며 아쉬워하는 모습에 리히르트는 그저 차분히 물을 뿐이었다.

“어느 곳을 가야 재밌습니까?”

“음, 일단 서쪽에 큰 시내 쪽도 재밌고요. 그 주변에 구경할 거리도 많아요. 그리고 엘레니움 광장이라고 있는데 가끔 악단이 와서 공연도 해요. 아, 시장도 재밌어요!”

누가 보면 여행객을 꼬셔서 한몫을 챙기려는 관광업자처럼 보일 만큼 아나샤는 현란하게 혀를 놀렸다.

“근데 혼자 가시게요?”

“네. 그대가 이렇게까지 말해주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좋은 생각이세요!”

잘 생각했다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비장하게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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