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사랑에 빠질 때-10화 (10/87)

10화

아나샤는 곧장 나무를 타고 올라 나뭇가지마다 놓여있는 둥지들을 살펴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까마귀들의 공격까지 막아내느라 시간은 더 지체되었다.

이 중에 하나는 있겠지 하는 희미한 기대를 품고 전부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끝내 브로치는 찾을 수 없었다.

그때, 가장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까마귀가 날아올랐다. 아나샤는 곧장 까마귀의 뒤를 쫓았다. 벽을 기어올라 지붕 위를 내달리며 최대한 가깝게 까마귀의 행적을 쫓았다. 날지만 않을 뿐 거의 날아다니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서쪽을 향해 날아가던 까마귀는 어느 집의 굴뚝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몇 번 기웃하더니 굴뚝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나샤는 낡은 지붕에 올라서서 굴뚝 안을 살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건물인지 굴뚝에서는 연기는커녕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새까만 굴뚝 안에서는 희미하지만 새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곳에 둥지를 튼 모양이었다.

아나샤는 천천히 굴뚝 속으로 내려갔다. 밑이 잘 보이지 않는 어둠이 두려울 만도 할 텐데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 어둠을 손으로 훑었다. 두 발로 벽 안쪽의 틈을 찾아 밟아 내려가며 두 손은 좁은 굴뚝을 꽉 붙잡았다.

얼마나 더 내려갔을까 희미하던 울음소리가 더 가깝게 들려왔다. 아나샤는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 자신의 왼발 아래에 깊은 홈이 자리 잡은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을 피해 최대한 오른쪽으로 붙어 내려가자 홈 속에 만들어진 작은 둥지가 보였다.

‘브로치다!’

나뭇가지와 함께 얼기설기 모여있는 잡동사니 가운데 은색의 브로치가 보였다. 아나샤는 조심스럽게 브로치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까악 하고 아나샤의 얼굴을 향해 까마귀가 사납게 부리를 벌렸다. 아나샤는 재빠르게 브로치를 움켜쥐는 데 성공했지만 동시에 중심을 잃고 굴뚝 아래로 떨어졌다. 다행히 가까스로 두 팔과 다리를 펼쳐 굴뚝 바닥에 세워진 쇠꼬챙이에 찔리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아슬아슬했다…….’

십 년은 감수한 얼굴로 아나샤는 조심스레 쇠꼬챙이를 피해 굴뚝 아래로 기어 나왔다. 역시나 폐가인지 드러난 집 안 풍경은 누가 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문을 열고 빠져나온 그녀는 곧장 기사단으로 돌아갔다.

늦은 저녁쯤이라 생각했으나 꽤 늦은 시간인지 단장실의 불은 꺼져있었다.

아나샤는 바로 기사단 숙사 건물로 향했다. 벽을 타고 단숨에 3층까지 올라간 그녀는 왼쪽 다섯 번째 창문을 두드렸다.

“삼촌! 삼촌! 자?”

“…이럴 때만 삼촌이지? 왜 무슨 일인데?”

“단장님 사는 곳이 어딘지 알아?”

자다 일어난 얼굴로 창문을 연 크리스가 여전히 감긴 눈으로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그 어디냐, 호레이슨 50번가, 그 남쪽 거리에 유명한 백작 저택 있고 거기서 더 가면 휑한 숲 하나 보이잖아. 거기 너머에 네가 예전에 성 같다고 했던 큰 저택 기억나? 거기서 머무른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보다 너 꼴이 왜 그…….”

“고마워!!”

눈을 뜬 크리스가 경악에 차 묻기도 전에 아나샤는 잽싸게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 * *

수도 남쪽에 위치한 웨일그레슬 공작 가문의 저택은 거의 20년 동안 방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 공작이 일찍이 타계한 후 그 뒤를 이은 리히르트가 줄곧 직할령에서만 머물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용인들의 부지런한 관리 덕에 저택은 주인이 언제 돌아와도 될 만큼 깨끗하고 호화로운 상태였다.

은과 금으로 장식된 자기와 황실의 가구에 버금가는 고급스러운 가구들, 샹들리에 아래 반질거리는 넓은 바닥마저 하나하나 세심한 손길들이 닿았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이 저택의 주인 리히르트는 야심한 시각 홀로 집무실에 앉아있었다. 사적인 공간이라 린넨 셔츠와 면바지의 간편한 옷차림이었지만 그럼에도 옷매무새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영지에서 올라온 서류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얼마나 집중한 채 앉아있었을까. 리히르트는 똑똑 하고 들려온 작은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문이 아니었다. 그 반대편에 있는 창문이었다.

달도 뜨지 않아 어두운 창밖에는 작은 실루엣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일단 이곳은 4층이었다. 이 높이를 자유자재로 다닐 사람은 그가 아는 한 한 명밖에 없었다. 리히르트는 창가로 다가가 잠긴 창을 열었다.

“단장님, 약속한 대로 찾아왔습니다!”

기다렸단 듯 불쑥 나타난 아나샤는 해맑게 브로치를 그의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리히르트는 무표정했지만, 되찾아 온 브로치보다는 그녀의 모습에 더 놀란 참이었다. 새어 나오는 방의 불빛을 고스란히 받은 여인의 모습은 상당히 많이 엉망이었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옷의 팔꿈치 부분은 찢어져 있었다.

할 말을 잃은 듯한 그를 대신해 아나샤는 한발 먼저 운을 뗐다.

“약속한 대로 정 주셔야 해요. 발뺌하기 없기예요?”

리히르트는 브로치를 건네주는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그가 한참 동안 받지 않고 가만히 서있자 아나샤는 손끝으로 시선을 내렸다.

방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받은 제 손의 상태는 상상 이상으로 더러웠다. 굴뚝 안에서 묻은 건지 손끝에도 손등에도 까만 재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헉, 죄송해요!”

그제야 그가 왜 브로치를 받지 않은 것인지 납득이 갔다. 아무리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지저분한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런 손으로 전해주면 꺼려지는 게 당연할 테다.

아나샤는 자책했다. 어둠 속에 있느라 못 본 것도 있지만, 들뜬 마음에 확인을 하지 않은 제 실수였다. 빨리 전해줘서 톡톡히 칭찬받으려던 것이 최악의 결과를 낳은 셈이었다.

“진짜 죄송해요. 가져오다가 묻었나 봐요. 저…, 이건 여기다 놔둘 테니까…….”

“고맙습니다.”

“네?”

뜻밖의 말에 아나샤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내 소중한 물건을 더럽혀 줘서 참 고맙다’라는 비꼼일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는 여느 때처럼 정중함이 묻어나는 단정한 얼굴이었다.

“그대에게는 항상 도움만 받는 것 같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옷이 찢어졌는데 어디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멍하니 그의 말을 듣던 중이었다. 몸의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덩달아 풀린 손힘에 브로치가 떨어졌다.

아나샤는 반사적으로 브로치를 낚아채기 위해 몸을 숙였다. 허공에서 브로치를 잡아챈 그 순간 강한 악력이 그녀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곧이어 굵은 팔이 허리를 와락 낚아채듯이 안았다.

“……?”

아나샤는 흡사 엄마 품에 매달린 아이처럼 창문턱에 앉혀져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크게 눈을 키웠다.

“…악!! 단장님 옷이!”

비싼 재질의 하얀 셔츠 위에 지저분한 재가 얼룩덜룩 번져있었다.

“괜찮습니다.”

“그치만 엄청 시커멓게 묻었는데요? 진짜 죄송해요. 빨면 지워질까요……?”

물어줘야 하나, 낭패한 얼굴로 옷 상태만 묻는 아나샤는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덕분에 리히르트는 재차 입을 열어야만 했다.

“저는 괜찮지 않은 걸 괜찮다고 말할 성격이 못 됩니다. 옷이야 갈아입으면 될 일입니다.”

“…단장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니까 저도 마음이 조금 놓이네요.”

아나샤는 그의 대답에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하긴 공작님씩이나 되는 사람이 옷 하나 버린 것에 크게 신경을 쓸 리 없는 것이다. 똑같은 걸로 다시 사면 될 테니 말이다.

“아무튼 늦은 시간에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브로치는 한번 깨끗이 씻으세요. 폐가 굴뚝 안에 있었거든요.”

할 말을 마친 아나샤는 그에게 브로치를 전해주고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그럼 내일, 저 단장님……?”

“밤이 늦었습니다.”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이대로 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객실을 내어줄 테니 자고 가십시오.”

“객실요? 제가 감히 그런 곳에서 자도 될는지……. 보다시피 몸도 지저분한데.”

“목욕 시중을 들 자를 붙여드리겠습니다.”

“아, 아니요! 욕실만 빌려주세요. 그냥 제가 씻을게요.”

얼떨결에 아나샤는 그의 제안을 수락해 버리고 말았다. 뒤늦게 아차 싶었으나 피곤하기도 하고, 언제 또 이런 호화로운 저택에서 머물러 볼까 싶으니 편하게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곧바로 저택의 시녀에게 객실을 안내받은 아나샤는 가장 먼저 욕실로 들어갔다. 따스한 물이 콸콸 쏟아지는 넓은 욕조 안에 눕자 천국이 따로 없었다.

‘사흘 동안의 고생을 이렇게 보상받는구나.’

이런 보상이면 까마귀 둥지 뒤지는 일을 매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여러 차례 탁한 물을 흘려보내고 깨끗해진 상태로 욕실을 나온 아나샤는 시녀가 가져다 놓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그대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푹신하고 보드라운 이불 속에서 아나샤는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이 기대되었다.

* * *

“…어제 뭐 별일은 없었고? 단장님의 표정이 좀 별로였다거나 널 좀 피하는 것 같았다거나.”

크리스는 별관 식당에서 아나샤를 만나자마자 조용히 물었다. 어젯밤 그녀의 몰골을 직접 목격한 그로서는 걱정이 안 될 리 없었다.

“놀라지나 마시라!”

“역시 뭔 일 있었구나? 그 마음에 담아두진 말고……. 솔직히 좀 많이 더러워 보였어.”

“나는 오늘부로 단장님이 총애하는 부하가 될 거니까!”

아나샤는 조식으로 나온 사과를 크게 베어 물고서 외쳤다.

“아, 총애… 뭐? 총애?”

더럽다고 경멸하지만 않으면 다행이라 여겼던 크리스는 크게 눈을 떴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말에도 아나샤는 콧방귀만 뀌어댈 뿐이었다.

“아침부터 무슨 얘기 중이야?”

“아까 총애 뭐라고 하지 않았어?”

“누가 누구를?”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하나둘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그러나 아나샤는 마저 남은 사과 조각을 입 안에 밀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의문만을 남기고서 그녀는 가벼운 걸음으로 단장실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