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설마 자신을 잊은 건 아닌지 문득 불안함이 들자 아나샤는 문에 대고 그를 불렀다.
“단장님? 저 들어가도 되죠? 들어갑…….”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아나샤는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그와 마주한 까만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제가 연무장에 있는 동안, 계속 단장실에 있었습니까?”
“소파에 누, 아니 앉아있었어요. 왜요?”
“책상 위에 올려둔 브로치가 사라졌습니다.”
“네?”
금방이라도 아나샤의 두 눈은 튀어나갈 것만 같았다. 그야 정황상 자신이 가장 의심받을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곧장 그를 지나쳐 단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밑에 떨어져 있지는 않을까 책상 아래에 기어 들어가 살펴보았으나 브로치는 보이지 않았다.
“그 은색 브로치 말하는 거죠? 정말 책상 위에 둔 거 맞아요?”
리히르트는 이미 책상 주변은 모두 살펴보았다고 얘기했다. 브로치를 따로 빼두어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 고작 두 시간 전이었다. 헷갈릴 리가 없는 것이다.
“혹시 많이 비싼 거예요?”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겁니다.”
그는 담담히 얘기했지만 듣는 입장은 달랐다. 그가 공작이면, 전 공작님은 돌아가셨다는 얘기일 텐데 즉 유품이란 말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아나샤는 책임을 느꼈다. 브로치에 발이 달리지 않은 이상 자신이 수건을 전해주러 간 사이 누군가가 침입해 훔친 것 같았다. 자신이 단장실을 잘 지키고 있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약간의 가책이 들었다.
그가 자신을 꾸짖기는커녕 의심하는 것 같지도 않아서 더 그랬다. 자신을 의심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일 텐데 그는 정말 한 점의 의심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이 착하다고 해야 될지…….’
기사들이 들었다면 기함할 생각을 하며 그를 바라보던 아나샤는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범인을 추정할 수 있는 작은 증거가 떨어져 있진 않을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기사들은 아니었다. 다들 연무장에서 훈련을 받았으니 몰래 빠져나올 순 없었을 테다.
‘외부인이 침입한 건가? 아니면…….’
그때였다. 창가 아래에 떨어져 있는 검은 깃털이 눈에 들어온 것은. 아나샤는 검은 깃털을 주워 들었다. 열려있던 창문,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반짝이는 브로치, 마지막으로 창문 아래 떨어져 있는 까마귀 깃털.
“까마귀, 까마귀가 물어갔나 봐요!”
까마귀가 반짝이는 것을 물어가는 습성이 있다고 어디서 들은 적이 있었다. 제 추리에 감탄하던 것도 잠시 아나샤는 곧바로 창문을 타 넘어 나무 위에 올라섰다.
“찾으러 갔다 올게요!”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당장 근처에 있는 둥지란 둥지는 모조리 다 뒤져보려던 아나샤는 그의 말에 그 자세 그대로 멈췄다. 아나샤는 뒤를 돌았다.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그의 얼굴을 살폈으나 그는 조금의 동요도 없는 얼굴이었다.
“이런 사사로운 일로 그대가 움직일 필욘 없습니다.”
“네……?”
“애초에 그대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거잖아요.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렸는데…….”
“제게도 사적인 일일 뿐입니다. 공무에 지장이 없다면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그대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처음으로 그가 몹시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중하다 못해 좀 딱딱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아나샤는 그가 이렇게 냉정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
“단장님은… 뭐랄까 정이 없네요.”
돌아서려던 걸음을 멈춘 채 리히르트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감정을 숨긴 것인지, 아니면 그새 털어낸 것인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아나샤는 아까 이미 그의 얼굴을 본 후였다. 처음 보는 다급해 보이는 얼굴이었었다. 왜 그러냐고 반사적으로 물어봤을 정도로.
“임무도 없어서 저 진짜 시간도 남아돌고 할 일도 없어요. 아침부터 계속 소파에 앉아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아나샤는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단장님은 바쁘니까 찾을 시간도 없고 바로 일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시간 많은 제가 대신 찾아드릴게요.”
“하지만 그렇게 할 이유가 그대에겐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얻을 이득도.”
“정이요.”
또렷하게 들려온 말에 리히르트의 푸른 눈동자가 미묘하게 커졌다.
“제가 무사히 브로치를 찾아오면 저에게 정을 주세요.”
불어오는 바람에 짧은 단발머리가 흩날렸다. 아나샤는 그와 눈을 마주친 채 말을 이었다.
“할아버, 아니 예전 단장님과는 거의 가족처럼 지냈거든요. 뭐, 가족이나 다름없죠. 임무가 없을 땐 종종 심부름도 하고, 어깨가 결린다고 하면 어깨도 주물러 줬어요.”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아나샤는 작게 웃었다.
“단장님이 도와달라고 하면 전 도와줄 거예요. 어떤 사소한 것도, 개인적인 것도 말이에요. 처음 만났을 때도 제가 도와드렸잖아요.”
그녀의 입에서 조금은 툴툴대는 말투가 흘러나왔다. 그때 일은 없는 셈 치고 차갑게 선을 긋는 그가 조금은 괘씸해진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저는 단장님이랑 더 많이 친해지고 싶어요. 앞으로도 딱딱하게 공과 사니 따지면서 지내고 싶지도 않고요.”
“…….”
“그러니까 도와드려도 되죠?”
그 말에 리히르트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공적인 일이 아니고서는 이제껏 누구도 자신의 곁에 다가오려 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눈치를 살피거나 불편해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자신은 남들에게 있어서 대하기 힘든 유형인 것이다.
그렇기에 친해지고 싶다는 그녀의 말이 지극히 낯설게만 느껴졌다.
낯섦은 곧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뭐든지 간에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것에 손을 뻗기란 어려운 법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제안을 거부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마음은 정해져 있었단 듯이, 망설여도 그는 결국 운을 뗄 수밖에 없었다.
“…부탁하겠습니다.”
솔직한 그의 대답에 아나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눈을 접었다. 그러곤 벌떡 나뭇가지 위에 일어서서는 곧바로 눈 깜빡할 새에 사라졌다.
* * *
아나샤는 반짝이는 것들을 모조리 모아 본관으로 돌아왔다. 건물 주변을 한번 둘러본 뒤 눈에 잘 띄는 곳에 반짝이는 것들을 놓기 시작했다.
나무 위로 올라간 아나샤는 아래를 주시했다. 유인할 미끼도 있겠다, 곧 범인이 나타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다. 세 시간이 넘도록 까마귀 한 마리도 볼 수 없었다. 해가 기울어지고 지면이 붉게 물들어 갈 때쯤 주변 수풀에서 파스스, 소리를 내며 작은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애옹.”
새하얀 털의 고양이가 나무 아래에서 길게 울었다. 가끔 기사단에 나타나기에 놀아준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 아나샤만 보면 쓰다듬어 달라고 울어댔다.
“안 돼. 저리 가.”
“애옹― 애옹.”
“어허!”
“애옹.”
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나무 밑동을 긁기 시작하자 아나샤는 하는 수 없이 나무 아래로 내려와야 했다.
“쓰다듬어 주니까 기분 좋아?”
아나샤는 제 손에 머리를 부비며 그르렁거리는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털 상태가 깔끔하다 못해 윤기가 흘렀다. 역시 주인이 있는 모양이라고 여기며 엉덩이를 두드려 줄 때였다.
까악, 하고 긴 울음소리가 아나샤의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아래를 향해 비스듬히 날아온 까마귀는 곧바로 반짝이는 물건이 놓인 땅에 내려섰다. 그리고 부리로 물고 재빠르게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아!”
아나샤는 쭈그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까마귀를 뒤쫓았다. 홀로 남게 된 고양이는 그 자리에서 애옹 하고 한번 울다가 다시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 * *
창밖에선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리히르트는 하던 업무를 내려놓고 책상 위에 손을 가져갔다. 톡톡 하고 두 번 두드렸으나 천장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에서 불쑥 나타나는 여인의 모습에 완전히 익숙해져 버린 것인지 잠잠하기만 한 천장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매 시간마다 그녀가 오진 않았는지 확인하고 있는 스스로도 말이다.
리히르트는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있어도 마음이 술렁이며 자꾸만 초조한 기분이 드는 것이 업무를 보기엔 틀렸다고 여겼다. 그는 창가에 서서 바깥에서 비를 맞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았던 것이 사흘 전이었다. 아직까지도 브로치를 찾고 있는 것인지 그녀는 그 뒤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유품인 그것은 자신에게 있어 몇 안 되는 소중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건 제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그녀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리히르트는 그녀에게 부탁한 것을 후회했다. 찾더라도 자신이 직접 찾는 것이 옳았다.
혹여라도 비를 맞고 있지는 않을지. 차라리 이만 찾기를 포기하고 돌아오기를 바랐다. 동시에 무엇이 이렇게까지 그녀를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정이라…….’
그녀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리히르트는 창문 유리에 맺힌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내린 빗방울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으나, 답지 않게 긴 고민에 잠긴 그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저녁에 가까워진 시간이 되어서야 아나샤는 눈을 떴다. 하루 종일 내리던 비가 그친 것인지 방 안엔 노을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눅눅한 습기를 털어내듯 빠르게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나갈 준비를 마쳤다.
이틀 동안 수도를 돌아다니며 눈에 띄는 까마귀란 까마귀는 모조리 쫓아다녔으나 브로치를 찾을 순 없었다. 오늘 아침엔 비가 와서 수색이 힘들 것 같아 퍼질러 잤다지만, 덕분에 체력은 쌩쌩했다.
아나샤는 성곽을 지나 외곽으로 나왔다. 웬만한 수도 안은 다 뒤져봤으니 이제 외곽만 남은 것이다.
수도 외곽을 돌아다니던 아나샤는 거의 해가 진 뒤에나 까마귀를 찾을 수 있었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여러 마리를. 고목나무 위에 한데 모여 앉아서 깍깍대고 있는 까마귀들의 모습은 으스스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