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리히르트는 무표정하게 쪽지를 챙겼다. 잠시 천장에 시선이 머물렀지만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고 퇴근할 시간이 되어서도 그는 쪽지를 보낸 범인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볼 수 없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쪽지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오늘은 날씨가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오늘도 기운차게 하루를 시작해요!]
[오늘은 왠지 비가 올 것 같아요! 날씨가 우중충하네요. 혹시 우산 안 가져왔으면 부단장님한테 빌리면 돼요. 부단장님 우산 두 개거든요!]
[오늘 아침에 배식으로 나온 사과인데 맛있더라고요. 단장님도 좋아하실 것 같아서 하나 가져왔어요! 드셔보세요!]
쪽지 옆에 놓여있는 새빨간 사과를 집어 든 그는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한 입 베어 물자 달콤한 과즙이 입 안에 퍼져나갔다.
사과는 몹시도 달았다. 단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였으나 특별하게도 그는 맛있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사과를 더 맛보던 그는 뒤늦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거기 있습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타일이 들리며 머리가 불쑥 내밀어졌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의 앞에 착지한 아나샤가 경례 자세를 취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사과가 안 보이는 것처럼 딴청을 부렸다.
“저도 방금 막 도착한 참인데 그게, 우연이네요. 하하.”
“이건 고맙습니다.”
“…저란 거 언제 눈치채셨어요?”
아나샤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볼을 긁적거렸다. 숨길 생각은 아니었지만 대놓고 감사 인사를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다 보니 괜히 머쓱해졌다. 물론 그것도 잠시, 그의 손에 들린 사과에 시선이 닿자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갔다.
“그보다 어때요? 맛있죠?”
“네.”
상대가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대답이었으나 리히르트로서는 의도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이런 일상적인 대화가 익숙지 않을 뿐이었다.
“맛있다니 다행이에요. 이번 달이 사과가 제일 잘 익을 시기래요. 맡아보면 향도 되게 달달해요.”
단답 정도로 대화가 끊길 아나샤가 아니었다. 그녀는 방긋 웃었다. 사과를 챙겨온 보람이 있었다.
“앞으로는 굳이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 아나샤는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은 듯한 얼굴을 했다. 곧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어깨가 조금 내려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나샤는 새 단장님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할아버지만큼 친해지지는 못해도 적어도 서로 신뢰할 만큼 가까워지고 싶었다.
과묵한 그를 귀찮게 할까 봐 일부러 쪽지로 대신해서 다가간 것이었지만, 이것마저도 그를 귀찮게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 말은…….”
그때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아나샤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금빛 머리카락 아래로 조금 곤혹스러운 듯 눈매를 일그러뜨린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잠시 한숨을 내쉰 후 운을 떼었다.
“쪽지가 아니라 그대와 직접 대면하고 싶다는 말이었습니다.”
약간은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이었다. 아나샤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환하게 벌어지려는 입술을 애써 다잡으며 말했다.
“진짜요? 정말 그래도 돼요?”
“네.”
“제가 틈만 나면 내려와서 엄청 귀찮게 굴지도 모르는데요? 그리고 또 말도 많아서 일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고, 자칫 무례하게 굴 수도 있는데도요?”
“괜찮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대답이었다. 아나샤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기쁜 티를 내었다.
“그럼 일단은요! 아직 기사단 건물 전부 돌아다녀 본 적 없으시죠? 오늘 점심 먹고 나서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특별히 지름길이랑 비밀 장소도 알려드릴게요.”
새 친구를 사귀어서 들뜬 소녀처럼 조잘대던 아나샤는 뒤늦게 “그럼 점심에 봐요!” 하고 외치고서는 단장실을 빠져나갔다.
* * *
그리고 그날 점심, 기사단 별관 복도에 나타난 두 사람의 모습에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온 기사들은 일제히 멈춰 서야만 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헛것을 보는 게 아닌가 눈을 비비던 마브릭을 선두로, 뒤이어 온 기사들도 따라서 먼발치의 광경을 응시했다.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는 두 남녀가 보였다. 정확히는 한 명만 신나게 떠들고 있었지만.
“…아샤 아니야? 건물 안내를 해주는 건가?”
“…그보다 왜 단장님이랑 같이 있는 거야?”
쟤가 왜 저기에 있냐는 물음에 기사들 중 아무도 대답해 줄 수 없었다.
매우 기묘한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애당초 ‘그 단장님’이 누군가와 함께 있는 모습부터가 기묘하다지만.
그동안 기사들이 봐온 기사단장은 상당히 과묵하고 조금의 인정도 기대할 수 없는 메마른 성미의 소유자였다.
전 기사단장 아버트도 왕년엔 기사들을 굴리기로 유명했다지만 그래도 인간미는 있었다. 하지만 이번 기사단장은 인간미가 완전히 소멸된 것 같았다.
훈련 첫날, 무표정한 얼굴로 연무장을 돌라고 지시한 뒤 두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지켜본 사건은 유명했다. 기사들 중 절반 정도가 지쳐 쓰려져서야 “그만.” 하고 말하던 그 무감정한 얼굴은 악마나 다름없다고 기사들은 생각했고 말이다.
훈련 중에도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활발한 분위기를 띠던 기사들이 그가 나올 때마다 누구 하나 죽어나간 것처럼 칙칙한 분위기를 띠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냉한 벽안이 닿을 때마다 기사들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스레 오금이 저렸다. 차라리 불만 사항이 있다면 말로 해줬으면 좋을 만큼, 그는 말이 없어서 더 무섭다는 말을 아주 혹독한 예로 잘 보여주고 있었다.
다행히 멀리 보이는 그는 훈련 때보다는 조금 풀어진 표정이었으나 그럼에도 특유의 차갑고 무심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저럴 때 보면 아샤도 참 대단해……. 아버트 단장님 앞에서도 곧잘 어리광 부리곤 했다지만.”
입담이라든가, 붙임성이라든가. 어떻게 저 무표정한 얼굴 앞에서 혼자 떠들 수 있는지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실수를 안 해야 될 텐데.”
마치 혼자 심부름을 보낸 아이를 몰래 지켜보는 부모 같은 심정으로 그들은 한동안 복도 벽 뒤에 숨어 아나샤를 지켜보았다.
3장 그와 친해지는 법
평소와 달리 리히르트는 제복이 아닌 가벼운 차림으로 연무장에 나와있었다. 기사들과 직접 대련하기 위해서였다.
“혹시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단장님의 검을 받을 수 있는 첫 번째 영광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처음 나선 자는 기사단 내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분대장이었다. 가르침을 받는다는 명목하에 나섰으나 젊은 기사단장의 실력이 궁금하던 차였던지라 그의 눈은 호승심으로 타올랐다.
그것을 읽어낸 리히르트도 쉽사리 봐주지 않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담담한 시작이었으나 막상 검을 겨루자 분위기는 돌변했다.
노련한 분대장의 검은 이기기 위해 전력으로 휘둘러졌다. 훈련을 빙자한 대련이었으나 두 사람의 검 사이로 전장에서나 흐를 법한 살기가 오갔다.
대련은 십 분간 지속되었다. 흙먼지 속을 구르면서도 멈추지 않는 두 사람의 치열한 대련은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으나, 분대장이 어깨에 피를 보면서 끝이 났다.
스치듯이 베인 상처에 불과했지만 분대장은 만일 대련이 아닌 실제 전투였다면 팔 하나는 떨어져 나가지 않았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을 해야만 했다. 그 대련을 지켜보았던 기사들 또한 머릿속이 아찔하긴 마찬가지였다.
그 뒤로도 다른 기사들과의 대련이 이어졌으나 전부 승을 가져간 리히르트였다. 그는 승부가 나기 무섭게 깔끔히 검을 거뒀지만, 그와 상대한 기사들이 느꼈던 위압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련을 마친 리히르트는 연무장 뒤편에 위치한 수돗가로 향했다. 흙먼지와 땀을 씻어 내리고 손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려는 그때 그의 머리 위로 수건이 내려앉았다.
리히르트가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하기도 전에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장님이 다 이겼다면서요? 아까 오다가 들었어요.”
아나샤는 나무 위에서 사뿐히 뛰어내려 그의 옆에 착지했다.
“언제 저랑도 대련해 주시면 안 돼요?”
“…대련 말입니까?”
“네! 솔직히 장검이랑 싸울 때 제가 좀 불리해서 전투 연습을 틈틈이 해놓고 싶어서요. 사람 인생이라는 게 한 치 앞도 모르는 거잖아요.”
첩자는 직접 적을 상대하기보다는 적의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는 직업이라지만, 아나샤는 호오옥시 모르는 일이라며 그에게 연거푸 설명했다.
“이참에 장검도 배워볼까 싶기도 하고요. 예전에 할아버지한테도 부탁해 봤는데 저한테는 무거워서 안 된다나, 뭐라나.”
툴툴대던 아나샤가 그의 검으로 시선을 옮겼다.
“단장님 검 한 번만 휘둘러 봐도 돼요?”
리히르트가 끄덕하고 괜찮다는 의사를 보이자 아나샤는 냉큼 그의 검을 집어 들었다. 손잡이를 두 손으로 붙잡고 힘껏 휘둘러 댔으나 점점 팔에서 힘이 빠지자 도로 내려놓아야만 했다.
“엄청 묵직하네요. 단검만 써야 되나…….”
“얇고 가벼운 소재로 된 것을 쓰면 될 겁니다.”
수건을 쥔 리히르트가 젖은 머리칼을 털어내듯 닦아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흡사 비라도 맞은 듯 흐트러진 모습이었지만 그마저 뭇 여성들에겐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단검보다는 중간 길이의 검을 사용하는 게 전투에 더 용이할 겁니다.”
“오. 중간 길이면 휴대하기도 괜찮을 것 같고, 봉급 나오면 사야 될까 봐요.”
물론 그의 모습보다는 검 얘기에 눈을 빛내는 아나샤였다.
두 사람은 집무실로 걸어가며 검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대화의 8할은 아나샤가 담당했지만, 그에게서 2할의 대답을 이끌어내었다는 것만으로도 예전에 비하면 눈부신 발전이었다.
단장실에 도착한 리히르트는 제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뒤따라 들어온 아나샤를 바라보았다.
“아. 나가있을게요. 다 입으면 말해주세요!”
아나샤는 서둘러 문을 닫고 나가주었다. 문밖에서 몇 분을 기다렸을까. 충분히 다 갈아입고도 남을 시간일 텐데 이상하게도 안에선 들어오라는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