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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7화 (7/87)

7화

“제 자리가 원래 이 천장 위라서요. 그럼 저는, 원래 자리로 가보겠습니다…….”

“기다리십시오.”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려 했으나 뒤에서 자신을 붙잡는 목소리에 아나샤는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알아본 건가……? 목소리도 일부러 깔았는데,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그 짧은 시간 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으나 결국 도달한 결론은 하나였다. 엎드려서 빌자.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아나샤가 뒤를 돌아본 순간이었다.

“어… 그거.”

바로 바닥에 넙죽 엎드리기로 결심한 것이 무색하게도 아나샤는 어정쩡하게 멈춰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손에는 들려있는 푸른 구슬의 머리핀을 보았다.

“고마워요.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에게서 머리핀을 건네받은 아나샤는 언제 긴장했냐는 듯이 작게 미소를 띠었다.

“엄청 마음에 들어 했던 거였거든요. 사자마자 잃어버린 줄 알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

“혹시 저 찾으신 이유가, 이거 전해주려고…….”

“한 가지 더 남았습니다.”

아나샤는 다시 흠칫하고 몸을 굳혔다. 이제 본론인 건가 싶은 것이다. 당근을 주고 채찍을 휘두르려는 것인가, 긴장해 있는 그녀에게 리히르트는 담담히 말을 건넸다.

“그날은 감사했습니다.”

“아, 아니에요! 오히려 공작님이신 줄도 모르고 그쪽이라느니, 버릇없게 말해서 죄송해요! 제가 예법이나 그런 거에 많이 무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네……?”

머리를 숙이고 있던 아나샤는 슬그머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공작님이신데요?”

귀족이 예법을 신경 쓰지 않는다. 마치 물고기가 물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말처럼 괴상하게만 들렸다.

부단장 칼리프도 지금이야 조금 풀어지긴 했어도 전에는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날 정도로 예법에 미친 자였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신분의 사내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수도의 귀족들이라면 몰라도, 저는 그런 것에는 둔한 편입니다.”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사교계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그는 예법이나 겉치레 따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휴, 다행이다. 저는 그날의 무례를 벌하려고 저를 찾는 게 아닌가 싶어서 엄청 걱정했거든요.”

“무례하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다시 한번 이어진 그의 말에 아나샤는 비로소 모든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며칠 동안 숨어 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허탈한 기분도 들었지만, 그를 오해한 것에 살짝 미안한 기분도 들었다.

‘좋은 사람 같아서 다행이다.’

아나샤는 그 모르게 살포시 미소 지었다.

“아 그러고 보니, 책상 두 번 두드리는 거요. 모르고 하셨을 것 같은데 이게 원래 전 단장님과 저의 신호였거든요. 하긴 할아버지가 미리 알려줬을 리 없겠죠.”

그가 조금은 편해지자 아나샤는 그의 곁에서 조잘조잘 떠들어 댔다.

“앞으로는 저한테 뭐 시키실 일 있으면 책상을 두 번만 두드리시면 돼요! 어, 그 외에 알려드릴 건, 아! 제 이름은 아나샤 라이나예요.”

“리히르트 폰 웨일그레슬입니다.”

“저는 편하게 아샤라고 불러주세요. 여기선 다들 아샤라고 부르거든요. 물론 부단장님은 빼고요.”

리히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딱히 시킬 일이 있을 때 말고도 그냥 심심할 때 아무 때나 불러주셔도 돼요. 왜냐면 특별한 임무가 있지 않은 이상은 한가하거든요. 보통 단장실 천장 위에 있으니까 언제든 불러주세요!”

말을 끝낸 아나샤는 벽을 타고 올라가더니 천장 구멍 사이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뚫려있던 천장의 타일도 원래대로 다시 맞춰놓았다.

리히르트는 그녀가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 *

“단장님, 식사는 밖에 두고 가겠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 리히르트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덧 정오를 넘긴 시간이었다.

문을 열자 식사가 담긴 트레이가 놓여있었다. 그는 식사를 안으로 가져왔다. 막 식사를 시작하려던 그때 문득 어제 만났던 여인이 떠올랐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천장으로 향했다. 리히르트는 책상 위로 손을 가져갔다. 약간의 망설임이나 고민조차 없이 가볍게 책상을 두드린 순간이었다.

책상에서 조금 먼 거리의 천장 타일이 들리더니 어둠 속에서 작은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가뿐히 착지한 여인은 어제 보았던 모습 그대로 새까만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뭐든 명령만 내려주세요!”

까만 눈동자엔 열정이 가득했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울 만도 할 텐데 리히르트는 미동 없이 무표정했다.

“확인차 두드려 봤습니다.”

“네?”

“용무는 없습니다. 다시 올라가 보십시오.”

“아, 아니에요! 그냥 막 불러도 돼요!”

아나샤는 외쳤다. 그러고는 머뭇대면서 몸을 일으켰다.

“벌써 점심시간인가 보네요.”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리히르트 그가 워낙 과묵한 데다 남과 대화를 즐겨 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둘 사이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리히르트는 식사를 했다. 상대를 앞에 두고 편히 먹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그 특유의 무신경함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보통은 상대도 이쯤에서 어색함을 못 견디고 말을 걸거나 돌아가 본다고 할 텐데 그런 무신경은 아나샤도 보통이 아니었다.

“소파 앉아도 돼요?”

책상 위를 구경하던 아나샤가 그에게 물었다. 옛날엔 허락 따윈 받지 않고 드러누웠던 전용 소파를 허락 맡고 앉아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 시무룩한 기분이 들 때였다.

“허락받을 필요 없습니다.”

들려온 대답에 아나샤는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가 그가 취소할세라 황급히 소파에 앉았다.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리히르트는 문득 든 생각을 입 밖으로 내었다.

“그대는.”

“네?”

“식사는 안 합니까?”

“아, 괜찮아요. 사실 저기 위에서 꾸준히 먹고 있었거든요.”

‘무엇을?’ 하는 물음이 담긴 시선에 아나샤는 부끄럽다는 듯이 허리에 매달고 있던 주머니를 그에게 보였다. 성인 주먹만 한 주머니에는 견과류와 말린 과일, 육포가 들어있었다.

“조금씩 틈틈이 먹기 때문에 언제든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답니다!”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날 것처럼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그사이 리히르트는 이틀 전 일을 떠올렸다. 그 많은 견과류 껍데기들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길을 알려준 일은 감사했습니다.”

“뭘요.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순 없죠. 혹시라도 오해하실까 봐 말하는 건데 그날 몰래 훔쳐본 거 아니에요. 저도 지나가다가 우연히 복도에 계신 걸…….”

아나샤는 조잘조잘 떠들다가 서랍을 여는 그의 행동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손수건에 감싸인 무언가를 꺼내 들었는데 곧이어 손수건을 펼치자 그 안에 쌓여있는 견과류 껍데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거 설마… 주워서 보관하고 있었어요?”

“보관했다기보다는 버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게 그거잖아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아나샤는 그에게 다가갔다.

“주세요. 제가 버릴게요.”

감히 대귀족에게 자신이 먹다 남은 쓰레기를 보관하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에게서 손수건째 건네받은 아나샤는 창문을 열고서 견과류 껍데기들을 탈탈 털어내었다.

비싸 보이는 매끄러운 재질의 손수건에게 다 미안할 지경이었다. 아나샤가 깨끗해진 손수건을 돌려주자 그는 그것을 받아 들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뭘요.”

‘정말 보기완 다르시네.’ 대귀족이면서 예법이나 격식엔 관심이 없어 보이고, 조금도 오만하게 굴지 않았다. 오만은커녕 오늘만 해도 자신에게 감사 인사를 두 번이나 했다.

아나샤는 그가 신기하면서도 조금 친근하게 느껴졌다. 어마어마한 신분 차이 때문에 거리감을 느꼈던 것이 허무해질 지경이었다.

‘친해지면 좋을 텐데.’

새 단장님과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을까. 다시 소파에 앉은 아나샤는 견과류를 야금야금 꺼내 먹으며 그를 관찰했다.

식사를 끝내고 다시 일을 시작하는 그의 모습은 변화 없이 정적이었다. 흐트러짐이라곤 없는 자세로 조용히 손과 눈만 움직이고 있었다.

보는 사람마저 마음이 고요해지는 풍경에 아나샤는 절로 터져 나오는 하품을 참느라 고될 정도였다. 배도 부르고 딱 졸리기 좋은 시간이었다. 새 단장님은 일하느라 바빠 보였다. 잠깐 눈을 붙여도 모를 것 같았다.

아나샤는 무거워진 눈을 감았다. 하지만 딱 5분만 자야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깊이 곯아떨어졌다.

그로부터 약 두 시간이 지나서 아나샤는 눈을 떴다. 안 잔 척하려 했지만 이미 옆으로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에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아나샤는 곧바로 책상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망했다.’

새 단장님과 친해지려는 계획이 물거품 됐음을 그녀는 직감했다. 누구는 일하는 동안 그 부하 되는 사람은 한가롭게 낮잠이나 퍼질러 잤으니 눈 밖에 나도 할 말이 없었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을 때, 스르륵 하고 허리께에서 무언가가 흘러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나샤는 그제야 제 몸을 덮고 있는 큼직한 제복 재킷을 발견했다.

분명 새 단장님이 입고 있던 옷이었다. 아나샤는 그것을 잠시 쥐고 있다가 혹여 귀한 옷에 먼지라도 묻었을까 여러 번 털어서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 * *

리히르트는 최근 들어 작은 쪽지를 받고 있었다.

[단장님 좋은 아침이에요!]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지만 그는 이것을 매일 업무 책상 위에 두고 가는 자가 누군지 금방 알아차렸다. 리히르트는 쪽지를 다시 곱게 접어 제 주머니에 넣고서 일을 시작했다.

두 시간 정도 업무를 보고, 한 시간 정도 기사들의 훈련을 봐주고 돌아오자 어김없이 책상 위에는 쪽지가 놓여있었다.

[오늘은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아요. 오늘도 점심 맛있게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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