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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6화 (6/87)

6화

그녀는 분명 스스로를 제5기사단의 기사라고 얘기했지만 소속을 속인 것인지, 아니면 기사가 아닌 것인지 기사단 내에 그녀로 추정되는 인물은 찾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여성이라는 첩자는 아직 얼굴조차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부단장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른 지역에 있다고 말할 뿐 첩자가 언제 기사단으로 돌아오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계속해서 미뤄지고 있는 상황에 리히르트는 답답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의 재회를 고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걸은 것인지 창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리히르트는 걸음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곧 난관에 봉착했다. 세 갈래로 나뉜 복도 중 자신이 어느 방향에서 왔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잠시 멈춰 서서 고민하던 그는 우측 복도로 들어섰다. 그리고 묵묵히 걸음을 옮길 때였다.

무언가가 떨어지는 작은 소리가 휑한 복도 위로 울려 퍼졌다.

리히르트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복도 바닥 위에는 작은 무언가가 떨어져 있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부서진 호두 껍데기 조각이었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 갑자기 떨어졌다고 하기엔 상당히 의심쩍은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창밖의 나무를 응시할 때였다. 톡, 하고 조금 더 먼 곳에서 작은 껍데기 조각이 떨어졌다.

리히르트는 그것이 떨어진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 위에서 일부러 떨어뜨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천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멈춰 서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좀 더 먼 곳에서 천장 타일이 살짝 들리더니 그 좁은 틈 사이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이번에도 견과류 껍데기 조각이었다. 리히르트는 천장 위에 있는 자가 이것들을 떨어뜨려 자신을 인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순순히 조각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단장실과 이어지는 익숙한 복도 풍경이 나타나자 그는 높은 천장으로 고개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조용히 울린 목소리가 복도 안을 채웠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 이곳 첩자입니까?”

하지만 그는 여전히 천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물었다. 운명이나 직감은 잘 믿지 않는 그였지만 왠지 저 위에 있는 자가 자신이 찾고 있는 자일 것 같다는 감이 들었다.

혹여라도 작은 목소리를 놓칠까, 천장 위에서 들려올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단장님!”

엉뚱하게도 대답은 먼 곳에서 들려왔다. 끼어든 목소리에 리히르트는 입을 다문 채 천장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부단장님께서 찾으십니다. 급하게 처리해 주셔야 될 서류가…….”

한걸음에 달려온 행정관은 그의 뒤에 서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뒤를 돈 기사단장과 마주하고서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상대를 압도할 만큼 서느런 눈이 행정관에게 향했다. 눈이 마주친 그 짧은 시간 동안 행정관은 자신이 어떠한 큰 결례를 범한 것은 아닌지에 대해 온갖 고찰을 해야 했고 말이다.

리히르트는 행정관에게서 시선을 떼고 천장 위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이미 떠난 것인지 더 이상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거의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와있던 작은 초식동물을 눈앞에서 놓친 소년처럼 그는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겉으론 냉랭한 무표정을 짓고 서있었지만.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리히르트는 행정관을 뒤로하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오면서 주웠던 견과류 껍데기들을 수북이 한 손에 쥔 채로 말이다.

* * *

“다른 영지에 있는 것이 확실한가?”

다음 날 오전, 업무 보고를 위해 찾아온 칼리프에게 날아든 질문이 이것이었다.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시종 과묵한 기사단장이 아나샤에 대해서만은 집요하게 묻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단장님. 죄송합니다만, 제가 질문을 이해 못 했습니다. 무엇에 대해 말씀하신 것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기사단장이 묻는 것이 무엇인지 날렵하게 눈치채었으나 애써 모른 척 그에게 되물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칼리프는 그가 혹시 무언가 눈치챈 것이 있지는 않은지 빠르게 그를 훑었다.

표정으로 알아채는 것은 쉽지 않으니 주변에 무언가 단서가 있지 않을까 매의 눈으로 훑어볼 때였다. 넓은 책상 가장자리에 흩어져 있는 견과류 조각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기사단 전속 첩자에 대한 얘기다.”

“아. 그자라면… 아마 이르면 오늘 오후쯤에는 기사단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확실한 건가.”

“네.”

감정이 담기지 않은 벽안 앞에서 칼리프는 매끄럽게 가죽을 당겨 웃었다. 다행히 걸리는 것은 없는지 기사단장은 시선을 거두고서 서류를 넘겨보기 시작했다.

‘후…….’

속으로 안도한 칼리프는 용무가 끝나자마자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연무장 근처에서 한가롭게 기사와 떠들고 있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나샤 경!”

나무 위에 앉아있던 아나샤는 자신을 부르는 외침에 화들짝 놀라 나무에서 떨어졌다. 물론 깃털이 내려앉는 것처럼 가벼운 착지였다.

“간 떨어지게!”

아나샤는 홱 하고 칼리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자신을 눌러버릴 것처럼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절대 단장님 눈에 띄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을 텐데 말입니다…….”

“잠깐만요. 무서워요.”

아나샤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어딜 도망가려는 겁니까!”

하지만 붙잡혀 다시 코앞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시작되려는 잔소리에 아나샤는 빠르게 입을 열어 항변했다.

“맹세코 새 단장님 눈에 띈 적은 없어요! 저를 봤을 리 없다고요!”

“그 말은 단장님 근처에 간 것은 사실인 모양이군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단장님께 그딴 견과류 찌꺼기들을 준 겁니까?”

“찌꺼기라뇨! 제 소중한 식량인데!”

“어찌 됐든 말입니다!”

찌릿하고 매서운 눈길이 쏘아지자 아나샤는 주눅 들었다.

“…아무튼 전 천장에 있었다고요. 그리고 길을 헤매는 것 같아서 좀 도와주자 싶어서 그, 견과류를 떨어뜨려서…….”

“떨어뜨려서?”

“길을 좀 알려줬을 뿐이에요.”

“알려줬을 뿐?”

기가 차다는 듯한 어조였다. 칼리프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다가 곧 한숨 쉬듯이 말을 이었다.

“오늘 오후에 단장실로 가십시오.”

“네?! 대신 상황 지켜봐 준다면서요! 그때까지 저 다른 곳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그대가 이미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 변명은 이제 무효입니다.”

“모습 드러낸 적 없다니까요. 그게 난 줄 어떻게 안다고요!”

“상식적으로 첩자가 아니고서야 천장 위에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더 이상 둘러대는 것도 한계인 것 같고, 아무튼 저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조심성 없는 행동을 탓하십시오.”

후련해 보일 만큼 싱그러운 미소를 만들어 낸 칼리프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의 제복 자락을 아나샤는 냉큼 붙잡았다.

“이렇게 버리는 게 어디 있어요!”

“버리다니, 처음부터 그대를 주운 적도 없습니다!”

“너무해요. 같이 고민해 주기로 해놓고서!”

“혼자, 알아서, 잘, 해결해 보십시오. 알아들었으면 놓으시죠.”

“못 놔줘요! 내 새끼손톱이 달렸다고요!”

“사이좋아 보이네요.”

한 걸음 떨어져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엘빈이 말했다.

“어디 가!”

하고 아나샤가 외치는 사이, 칼리프는 그녀의 손을 제 몸에서 떼어냈다.

“앗!”

간발의 차로 아나샤는 그를 놓치고 말았다. 쫓아가서 끈질기게 달라붙어 볼까 싶었지만 그렇게 해도 도와주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잔소리만 듣고 올 가능성이 컸다. 그렇담 이제 남은 것은…….

“엘…….”

“미안. 휴식 시간 끝나서.”

엘빈에게마저 버림받은(훈련 시간이 되어 돌아간 것뿐이었다) 아나샤는 한동안 그 자리에 덩그러니 서있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시무룩해 있던 것도 잠시, 그녀는 결심한 듯 발을 움직였다.

* * *

기사들의 훈련을 봐주고 단장실로 돌아온 리히르트는 잠시간의 휴식조차 없이 서류를 처리했다. 살짝 젖어있던 백금색의 머리칼이 자연스레 마르고 집중하는 눈빛에도 피곤함이 떠오를 때였다.

마지막 서류까지 전부 처리한 그는 서류철을 덮고 창밖을 응시했다. 슬슬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는 만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여인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였다.

리히르트는 그녀가 기사단의 첩자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기사라 하기엔 많이 왜소해 보였던 체구나 감옥 문을 쉽게 열던 모습, 몸놀림이 유난히 날랬던 것을 떠올리면 기사보다는 첩자일 확률이 더 높은 것이다.

그리고 어제, 천장에 있던 자 또한 그녀가 맞을 것이다.

이제까지 기사 부단장은 그녀가 이곳에 없다고 했지만, 리히르트는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런 거짓말을 제게 한 이유에는 그녀의 부탁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어제 자신의 앞에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그녀는 자신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드러내기가 곤란한 건가.’

하지만 스스로를 감춰야 했다면 소속을 알려주지 않았어야 옳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채 그는 무의식중에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무언가가 그의 앞에 착,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리히르트도 제법 빠르게 반응했지만 검 손잡이에 겨우 손이 가 닿은 정도였다. 만일 적의 습격이었다면 간발의 차로 치명상을 입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의미에서 놀라있었다. 검은 천이 눈 밑 아래를 가리고 있었지만 리히르트는 눈앞의 상대가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오해예요! 후, 훔쳐본 거 아니에요!”

그보다 더 놀란 아나샤는 허둥거리다 책상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리히르트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서기도 전에 여인은 잽싸게 몸을 일으키더니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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