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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5화 (5/87)

5화

“오전 중으로 간단한 서류 몇 개가 올라갈 겁니다. 오늘은 그것만 처리해 주시면 됩니다. 결재만 받으면 되는 서류이기에 아래쪽에 서명만 해주시면 됩니다.”

칼리프는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새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궁금하신 사항이나 다른 시키실 일은 언제든 제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이곳에 여성인 기사는 없는가?”

“네? …여성 말씀이십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칼리프는 자신도 모르게 굳은 얼굴을 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어느 인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성인 기사는 없습니다만…, 이곳에 소속된 첩자는 있습니다.”

칼리프는 빠르게 굳은 표정을 갈무리하고서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제 대답이 마음에 안 든 것인지 그는 무거울 만큼 긴 정적을 지켰다.

이에 칼리프는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생각을 엿보기 힘들 만큼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은 확실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체감상 2분은 흐른 것 같았다. 굳게 다물려 있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왜소한 체구에, 머리 길이는 단발로 검은 머리의 여성이었다. 혹시 내가 말한 인상착의와 동일한가?”

“…첩자이다 보니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저도 얼굴은 잘 몰라서 찾으시는 여성이 맞는지는 모르겠군요.”

사무적으로 대답했으나 하마터면 크게 사레에 들릴 뻔했다. 그는 정확히도 자신이 생각한 그 인물에 대해 묻고 있었으니 말이다.

“혹시 무슨 연유로 그 여인을 찾으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서늘하다 못해 냉기가 흐를 것 같은 얼굴은 상념에 잠긴 지 오래인 것 같았다. 칼리프는 조용히 묵례한 후 단장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복도로 나오자마자 어딘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오 분 뒤, 기사단 연무장.

“아나샤 경!”

허옇게 사색이 된 칼리프가 냅다 연무장에 쳐들어와 외친 말이었다. 훈련 중이던 기사들은 일제히 검을 내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보다도 품위와 체면을 중요시하는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나샤…, 아나샤 경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아샤야 뭐, 지금쯤 방에서 자고 있겠죠?”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마브릭이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칼리프는 곧바로 몸을 돌려 연무장을 벗어났다. 그 모습이 흉흉해 말려야 되지 않느냐는 말도 나왔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기사단 내에서 제일 날랜 아나샤라면 알아서 잘 도망치겠지 하는 결론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편, 숙사에 도착한 칼리프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복도 맨 끝에 위치한 방문을 열었다.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아나샤는 놀라 눈을 떴다. 누군가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키자 아주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부단장님이 왜 내 방에 있는 거지?’

설마 꿈인 건가 싶어 가늘게 실눈을 뜬 채 그를 응시할 때였다. 다가온 칼리프가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무, 무슨 사고를 쳤다고 그래요! 나 오늘 가만히 있었는데!”

억울함에 아나샤는 대뜸 소리쳤다. 그야 자신이 오늘 한 것이라고는 지금 일어난 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럼 새로 오신 단장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알며, 왜 당신에 대해 묻는 겁니까!”

“나에 대해 물었다고요?”

아나샤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진지한 그의 얼굴을 보건대 자신이 옳게 들은 게 맞는 것 같았다.

“나를 어떻게 알고요? 아니 왜, 아니…….”

당혹스러운 건 아나샤도 마찬가지였다. 설명을 요구했지만 그는 자신을 의심하는 눈길로 뚫어져라 볼 뿐이었다.

“나 아무것도 안 했어요! 취임식도 안 갔단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당신의 인상착의를 줄줄이 읊는 거냔 말입니다!”

“그거야 나도 모르죠!”

그렇게 외친 아나샤는 정말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칼리프는 그녀의 항변을 믿지 않았다. 이제까지 줄곧 새 단장 취임 반대를 외치던 그녀였다. 취임식 전에 새 단장님을 찾아가 무슨 사고를 저지른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자연스레 드는 것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새 단장님께서 당신을 찾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에 대해 얘기한 뒤 매우 심기가 안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일단 당신에 대해 모른다고 둘러댔습니다만. 아나샤 경, 이것은 매우 심각한 일로…….”

계속 이어지는 잔소리에 아나샤는 귀를 틀어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잔소리가 두 배로 늘어난다는 것을 과거에 겪어 잘 알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전혀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만, 새로 오신 단장님께서는 매우 유명하신 분입니다. 그것도 적들 사이에서 자비 없이 잔혹하기로 말입니다.”

“잔혹하다고요……?”

“네. 그분의 가문에서 대대로 사용되는 고문법을 전문 고문 기술자들이 감탄하며 배웠다고 전해질 정도로요.”

아나샤는 딱딱 소리를 내며 깨물던 손톱을 입에서 떨어뜨렸다.

“…손톱을 뽑나요?”

“손톱만 뽑히겠습니까? 손가락을 자르시겠죠.”

순간 섬뜩한 감각이 등허리를 훑고 지나갔다. 아나샤는 곧바로 이불 속에 들어가 심신의 안정을 취했다. 하지만 따스한 이불 속에서도 왠지 등허리는 계속 서늘하게 느껴졌다.

동그랗게 이불을 말고 앉아있는 아나샤를 내려다보던 칼리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이었다.

“소리 없이 사람도 죽이면서 고작 손가락에 겁먹은 겁니까? 당신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내 손가락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히 무섭다구요!”

“대체 무슨 잘못을 한 건진 모르겠으나 이미 엎지른 물. …일단 제가 새 단장님의 곁에서 그분이 당신을 찾아서 어떻게 하려는 건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니 그동안 그대는 절대 새로 오신 단장님 눈에 띄지 마십시오. 제가 허락할 때까지, 절대. 절―대.”

“안 그래도 피해있으려고 했거든요.”

‘절대’를 두 번씩이나 강조하는 그에게 아나샤는 소심하게 반박했다.

그가 나가자 아나샤는 다시 이불 속에 들어가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 며칠 동안 새 단장님의 눈 밖에 날 만한 일을 저지른 기억은 없었다. 아니 저지르기는커녕, 그와 만날 수나 있었던 건지 의문인 것이다.

‘…정말 나에 대해 어떻게 아는 거지?’

새 단장님이 높으신 대귀족이라는 것은 귀가 닳도록 들었었다. 그런 사람과 자신이 우연이라도 길에서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자신이 귀족들이 다니는 무도회장이나 연회에 갈 리 없으니 말이다. 기껏해야 수도 외곽 시장에나 놀러가는 자신이 그런 대귀족을 어디서…….

‘잠깐.’

아나샤는 가느다랗게 눈을 접었다. 비록 무도회장에서 본 건 아니지만, 귀족처럼 생긴 아름다운 미남자를 만난 적은 있었다. 거기다 그는 검술 실력까지 뛰어났었다.

앞뒤가 착착 맞아떨어지는 기분에 팔등 위로 살짝 소름이 돋았다. 단번에 머리를 베어내던 모습은 솔직히 좀 잔혹하긴 했었다. 웬만해선 그렇게 잘 안 죽이니까.

마지막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던 남자의 말까지 떠오르자 아나샤는 벌떡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아나샤는 서둘러 침대 아래로 내려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창문을 빠져나와 벽을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달리던 그녀는 이윽고 본관 지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나샤는 조심스럽게 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단장실의 창문 위에 매달려 슬그머니 창문 안을 훔쳐보았다.

뒤집어진 풍경 속에 새하얀 백금발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금색 수가 놓인 근사한 제복을 차려입고 단장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는 그는 그날 본 그 남자가 맞았다.

‘이럴 수가.’

아나샤는 다시 창문 위로 몸을 숨겼다. 놀란 가슴이 벌렁벌렁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게 그날 자신이 무례하게 느껴질 만한 행동을 했었는지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다행히 그런 행동은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감히 높으신 대귀족님께 ‘그쪽’이라고 부른 정도? 그리고 검을 버렸다고 ‘미쳤냐’고 말한 정도?

‘하지만 몰랐다고!’

아나샤는 머리를 감싸 쥐고서 끙끙거렸다. 감히 대귀족님을 그쪽이라고 부르고, 미쳤냐고 화를 내기까지 했다. 손가락까지는 아니더라도 새끼손톱 한 개 정도는 뽑힐지도 몰랐다.

한동안 지붕 위에 쭈그려 앉은 채 부르르 몸을 떨던 그녀는 빠르게 몸을 일으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왜 자신을 찾는지, 찾아서 무얼 하려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숨어 지내야겠다고 다짐했다.

* * *

기사단에 부임한 지도 열흘째가 되었다.

그동안 리히르트는 쉴 틈 없이 업무에 시달려야만 했다. 넘겨받을 중요한 자료나 밀린 서류들이 섞여 올라오다 보니 일 처리는 자연히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공작령에서 올라오는 업무까지 처리하느라 며칠째 철야였다.

다행히 오늘은 제시간에 업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리히르트는 잠시 하던 일을 내려두고 밖으로 나왔다.

머리를 쓰는 것보다 몸을 쓰는 것이 더 익숙한 그로서는 이런 장시간 업무는 맞지 않는 편이었다. 검술 훈련이라도 하며 몸을 풀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현재 정무를 보기에 적합한 제복 차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잠시 나와 걷기로 했다.

넓은 복도에는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노을빛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복도의 풍경은 고즈넉했다. 오랜만에 찾은 여유였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감흥조차 안겨주지 않았다.

그는 공적인 일 외에 다른 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어린 나이부터 철저히 가주로서 교육을 받고 또 그렇게 자라왔다. 사소한 것에 정신적인 소모를 할 여유도 없을뿐더러, 이제는 이것이 너무도 당연해 어떤 것에도 깊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매사에 무관심하다는 것이 옳으리라. 가주나 단장으로서는 완벽한 인물일지는 몰라도 그의 최대의 흠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최근 들어 한 가지 관심이 가는 일이 생겼다. 어떻게 하면 그날 자신을 도와준 여인을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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