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검을 이쪽으로 차라. 허튼수작 부리면…….”
목에서 살짝 칼날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아나샤는 그 틈을 노려 힘껏 위로 뛰었다.
“순순히 양손을, 컥!!”
아나샤의 머리에 턱을 세차게 부딪친 남자가 뒤로 물러서며 단검을 떨어뜨렸다. 단검이 바닥에 닿기 전 아나샤는 발을 뻗어 발등으로 손잡이 부분을 차올렸다.
팽그르르, 허공에서 몇 바퀴 돈 단검은 정확히 그녀의 손에 착지했다. 아나샤는 몸을 뒤로 돌리며 남자의 턱 아래를 단검으로 그었다. 목을 부여잡은 채 비틀대던 남자는 얼마 안 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나샤가 별안간 홱 고개를 돌렸다.
“검을 버리다니 미쳤어요! 절 죽이고 그쪽한테 덤벼들면 어쩔 뻔했어요!”
성큼성큼 리히르트를 향해 다가간 아나샤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쏘아보았다. 묵묵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리히르트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까?”
“저야 보다시피 멀쩡하죠.”
“목에 피가 흐릅니다.”
그제야 아나샤는 제 목에 손을 가져갔다. 조금 피가 흘렀을 뿐이었지만 남자는 자신의 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정도는 뭐, 금방 나아요. 그보다 선배로서 충고하는데 절대 검을 버리는 짓은 하지 마요.”
“…그대는 기사입니까?”
“맞아요. 황실 제5기사단 소속이에요.”
직업 특성상 ‘나 첩자예요’ 하고 당당히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나샤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서 먼저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른한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아나샤는 이제야 든 안도감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옷에 묻은 검은 먼지를 털어내던 그녀는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입을 열었다.
“그쪽은 어디 소속이에요? 임무도 도와줬는데 그 정도는 알려줄 수 있잖아요.”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치사하게, 정말 안 알려줄 거예요?”
아나샤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바로 뒤에 와있는 남자의 몸에서 은은한 향이 맡아졌다. 피비린내와 섞이지 않은, 시원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의 향이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네?”
고개를 든 아나샤는 그게 무슨 뜻인지 물었으나 남자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냥 밝히고 싶지 않아 딴소리를 하는 것이라 여긴 그녀는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그것도 잠시 아나샤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짧지만 만나서 반가웠어요. 전 여기서 이만 빠질게요. 아래에 갇혀있는 사람들 잘 부탁해요.”
“오늘 있었던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비밀이죠?”
“…….”
“남의 임무를 떠벌리고 다닐 정도로 가볍진 않거든요. 이래 봬도 입 무거워요.”
맞잡은 손을 푼 아나샤는 “그럼.” 하고 짧은 인사를 남기고서 벽을 타 넘었다. 여인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리히르트는 뒤늦게 몸을 돌렸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그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바닥 위에서 작게 반짝거리는 그것은 다름 아닌 머리핀이었다. 여인이 감옥 문을 열 때 사용했던 것이었다.
리히르트는 몸을 숙여 머리핀을 주웠다. 곧 만날 테니 그때 전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동안 그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으나 그는 그 사실을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눈부신 샹들리에 빛이 쏟아져 내리는 화려한 공간이었다. 그 중앙에 두 사내가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한 명은 이 공간의 주인답게 화려한 금발을 가진 황태자 에르디온이었다. 그는 보고서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내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깔끔하게 전원 사망이라. 그대의 무공은 늘 상상을 초월하는군.”
“아닙니다.”
대답한 사내는 그보다 더욱 옅은 색의 백금발을 가진 사내였다. 웨일그레슬 공작이자, 불과 하루 전 인신매매 조직 하나를 조용히 괴멸시키고 온 리히르트였다.
“겸양 떨 것 없어. 자네 실력은 내가 가장 잘 아니까.”
약 7년 전, 북쪽 변방의 전투에 참가한 에르디온은 그가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보았었다.
거친 북방의 땅에서 수없이 많은 침탈을 막아온 자답게 그의 검법은 오로지 빠른 살생을 목표로 했었다. 피를 뒤집어쓰고 무자비하게 적들을 베어내던 모습은 멀끔한 이목구비도 잊게 만들 정도였다.
그의 성정이 냉혹하다고 얘기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지만, 에르디온은 그래서 그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묵묵히 자신이 맡은 바를 해내는 이 과묵한 성미가 말이다.
“수고 많았어, 웨일그레슬 공. 그대의 공을 치하하며 한 잔 따라주지.”
“감사합니다.”
리히르트는 그저 무심한 낯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작은 기쁨이나 자랑스러움 따위의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대는 내 계획에 꼭 필요한 사람이야. 정말 몇 안 되는 신뢰할 수 있는 이라는 소리이기도 해.”
에르디온은 시원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어느 귀족들은 이 한 잔을 받기 위해 온갖 아부를 떠는데 참으로 돌 같은 사내가 아닐 수 없었다.
무표정한 그를 대하기 어려워하는 자들이 대부분이고 심지어는 두려워한다지만 알고 보면 그만큼 대하기 쉬운 자도 없었다. 특히나 일적으로는.
에르디온은 황금색 술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잠시 묵묵히 술을 들이켜던 그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제는 중앙 귀족들 중 부패하지 않은 가문을 찾아내는 게 더 힘들 정도야. 아마 나를 지지하는 세력들 안에도 있을 테지.”
지금도 수도 외곽 지역에선 버젓이 범죄가 일어나고 있었다. 수도 귀족들의 자본과 연줄이 닿아있는 매음굴을 중심으로 은밀히 노예와 마약 거래가 이어지고 있으니 범죄의 온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더 이상은 제국의 곯은 부분을 방치해 둘 수 없었다. 즉위 후 부패한 세력들을 가차 없이 엄단할 것이라는 결심은 변함이 없었다.
“인신매매단 하나가 소리 소문 없이 없어졌으니 관련된 귀족들은 몇 달간 잠잠하게 몸을 사리고 있겠지. 제 몸은 누구보다 잘 챙기는 이들이니 말이야.”
“…….”
“지금은 이 정도에서 끝난다지만, 또 한 번 이런 일이 벌어질 경우에는 처단하는 수밖에 없겠지.”
에르디온은 말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듯 강한 눈빛으로 눈앞에 있는 자를 응시했다.
“그러니 자네가 고생 좀 해줘야겠어. 제5기사단의 새 단장으로서 말이야.”
“맡겨주십시오.”
리히르트는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담담한 목소리에서 충심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단장직을 받아들인 것은 어디까지나 황실의 명령에 의해서였을 뿐,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물론 수도의 귀족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가 무력과 재력으로도 모자라 권력에까지 손을 뻗으려 한다고 여겼다. 사교계에서는 이미 웨일그레슬 공작의 중앙 진출에 대한 얘기로 떠들썩했다.
정작 당사자인 그는 침묵할 뿐이었지만 말이다. 세간은커녕 자신의 주위에도 무신경한 그였으니 그 사실을 알 리 만무한 것이다.
그저 그의 머릿속에는 기사단과 연관된 한 여인이 잠시 떠올랐다 사라질 뿐이었다.
* * *
리히르트 폰 웨일그레슬. 오늘 새로이 기사단 단장으로 부임한 사내의 이름이었다.
수도와는 연이 없는 먼 북방 영지의 주인답게 들리는 소문은 매우 적었다. 물론 그 소문조차 북쪽의 넓은 영토를 다스린다는 것, 수없이 많은 이민족의 침탈을 막고 국경선을 지켜내어 젊은 나이에 쌓아온 무공이 대단하다는 등의 소문이었다.
크리스는 그렇게 대단하고 잘난 귀족일수록 사적인 흠이 크다고 믿었다. 이를테면 성격이라거나 성품, 성미 말이다.
그리고 기사단에 막 도착한 ‘리히르트 폰 웨일그레슬’의 실물을 마주한 순간 더 강하게 믿고 싶어졌다.
수도에 잘생겼다고 소문이 난 귀족 사내들을 단번에 깔아뭉개고도 남을 만큼의 미남자였다. 같은 남자가 봐도 잠시 넋을 잃고 보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태생부터가 다르다는 듯 머리색은 그 보기 힘든 고귀한 백금발이었다. 훤칠한 장신의 체격과는 달리 그의 이목구비는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하게 빚은 가면 같았다. 냉하고 무심한 표정은 거만하다기보다는 그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같은 인간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완벽한 피조물 앞에서 크리스는 잠시 경례 자세를 취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뒤늦게 예를 차려 환영의 말을 전하던 그는 문득 생각난 인물에 힐긋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보다 아샤 녀석이 안 보이는데……. 아냐, 안 온 게 다행일지도.’
옆에 있던 다른 기사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아나샤에게는 미안하지만 새 단장님을 인정할 수 없다며 난리 치던 게 불과 며칠 전이라 다들 조금은 불안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나샤는 취임식이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 * *
리히르트는 단장실에 도착해서야 겨우 혼자가 될 수 있었다. 수도에 입성하는 것조차 꽤 빠듯한 일정이었다. 거기다 기밀 임무까지 수행해야 했으니 쌓인 피로가 상당했다.
그는 황실의 인장이 새겨진 검을 책상 옆에 기대어 놓았다. 그리고 마호가니 책상 위에 한 손을 얹어두었다. 항상 앉으면 무언가를 해야 하는 강박에서 생긴 습관이었다.
당장 처리해야 될 일은 없는 것 같았다. 리히르트는 깊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취임식에는 그날 본 여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없었다. 하나같이 사내뿐이었으니 만약 있었다면 바로 알아봤을 터였다.
전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챙겨온 머리핀은 여전히 그의 품속에 있었다. 왠지 모를 허무감이 들었으나 그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주인을 찾지 못한 물건은 버리면 그만일 텐데 말이다.
“부단장 칼리프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온 목소리에 리히르트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곧바로 허가하자 문이 열리며 취임식에서 보았던 검은 머리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부기사단장 칼리프 뮌베르트입니다.”
정중하게 머리 숙여 인사한 칼리프는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들고 있던 가죽 서류철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서 이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