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남자는 지하로 통하는 문을 발견한 상태였다. 바닥에 설치된 문을 연 그가 이윽고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내려가자 아나샤는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었다.
‘기다려 볼까…….’
여기까지 쫓아와서 그냥 돌아가기엔 아쉬웠다. 그리고 남자가 무사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 약간 흥미가 일었다. 보통 조를 짜서 움직이는 것에 반해 혼자 근거지에 쳐들어온 이유도 궁금하긴 했다.
‘독단 행동을 할 정도면 부단장쯤 되려나.’
다른 기사단에 부기사단장이 누가 있는지 떠올려 보는 동안 시간은 꽤 많이 지나있었다.
‘어, 올라온다.’
뒤늦게 지하에서부터 희미하게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아나샤는 모든 신경을 귀로 집중시켰다.
“생김새가 귀족처럼 보이던데 저렇게 놔둬도…….”
“우리 뒤를 봐주시는 분들이 누군지 잊었냐? 고작해야 기사 나부랭이겠지.”
“저놈을 어떻게 할지 정하는 건 나중 일이야. 다른 놈들은 더 없는지 살피는 게 우선이다.”
여섯 명의 사내들이 계단 위로 올라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검은 천으로 코와 입을 가린 상태였다.
그들은 잠시 서서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 어디 구역을 살필지 정하더니 두 명씩 나뉘어 집을 빠져나갔다. 아나샤는 그들이 완전히 밖으로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 * *
“…요. …봐…….”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리히르트는 움찔 곧은 눈썹을 찌푸렸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완전히 정신이 든 것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리히르트는 힘겹게 무거운 두 눈을 들어 올렸다. 눈앞이 잠시 어지러웠으나 곧 시야가 맑게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단발 길이의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어, 정신이 들어요?”
“…….”
다시 한번 또렷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리히르트는 눈앞의 여자를 응시했다.
동그랗게 떠진 눈과 작은 코와 입이 차례대로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기껏해야 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다.
“…이곳은.”
“보다시피 지하 감옥 안이에요.”
그는 눈앞에 위치한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옆을 돌아보았다. 녹이 슨 쇠창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 입고 있던 로브는 사라져 있었고, 두 손은 등 뒤로 묶여있었다. 거기다 지니고 있던 검마저 빼앗긴 상태였다. 낮게 한숨을 내쉰 그가 옆으로 눕혀진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풀어줄게요. 잠깐 가만히 있어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리히르트는 모든 행동을 멈췄다. 여자는 양손이 자유로운 모양인지 조그마한 손으로 빠르게 밧줄을 풀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뭘요.”
두 손이 자유로워지자 리히르트는 몸을 일으켜 앉아 뻐근한 손목을 풀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자를 응시했다.
한눈에 봐도 깡마른 몸은 왜소했다. 입고 있는 원피스는 까만 얼룩들이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누가 봐도 오랫동안 갇혀있던 것 같은 행색이었다.
그가 그녀를 납치된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여기는 동안, 아나샤는 그가 과연 기사가 맞는지, 자신이 봤던 그 검은 로브의 남자가 맞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남자의 얼굴은 고된 훈련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 보일 만큼 희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은은히 빛이 흐르는 듯한 연한 금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는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문이 들게 만들 정도였다.
“기사……? 인 거죠?”
“맞습니다.”
아나샤의 물음에 남자는 담백할 만큼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짓말 같지는 않아 보였다. 전투 중에도 로브를 푹 눌러쓰고 있었던 이유가 이 외모를 가리기 위함이라면 납득이 되는 것이다.
“근데 혼자 임무 수행하러 온 거예요?”
“네.”
이어진 물음에 리히르트는 잠시 뜸을 들이며 대답하고서는 완전히 여인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철창 밖을 내다보았다.
이 감옥을 벗어난다 해도 당장 문밖에 있을 적들을 상대해 낼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무기가 없는 상태로 다수를 상대하기에는 위험이 컸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기밀 임무였기에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임무를 내린 황태자 에르디온뿐이었다. 이런 지하에 갇혀있어선 외부의 도움을 바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납치된 사람들은 안쪽 감옥에 있어요.”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리히르트는 옆을 돌아보았다.
“한 스무 명 정도 갇혀있어요. 근데 수면향을 피운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다들 잠들어 있어요.”
그는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견딜 수 없는 졸음이 몰려옴과 동시에 약한 마비 증세가 나타났던 것을 떠올리면 단순한 수면향은 아닐 것이다. 오래 중독되어 있던 자들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다 같이 몰래 탈출하는 건 무리겠죠?”
“…당장은 불가능하겠지만 어떻게든 전부 구출해 낼 생각입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그럼 도와드릴게요. 그쪽 몸만 괜찮다면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그는 긴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문밖에 보초가 두 명 있어요. 나머지는 밖에 나가있고요.”
“…….”
어떻게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냐고 물으려 했으나 리히르트는 이어지는 여인의 말에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나머지 놈들이 오기 전에 밖에 나가서 지원 요청을 하는 거예요. 그 뒤에 나머지 잔당을 쓸어버리고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 전부 구해내는 거죠.”
까만 눈동자가 작은 자신감과 정의감을 띤 채 반짝거렸다. 리히르트는 그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말을 곱씹던 그가 이윽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준비됐죠?”
자리에서 일어난 아나샤는 감옥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머리에 꽂고 있던 머리핀을 손에 쥐고서 장식이 달리지 않은 끝부분을 열쇠 구멍에 끼워 넣었다.
몇 번을 돌려댔을까, 철컥하고 구멍 안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아나샤는 보란 듯이 활짝 감옥 문을 열어젖히고서 밖으로 걸어 나왔다.
“문밖에서 수면향을 피우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코랑 입은 가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나샤는 제 옆으로 다가온 사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는 입고 있는 튜닉의 아랫자락을 길게 찢어내었다.
아나샤도 따라서 원피스 자락을 쥐었지만 생각보다 찢는 것은 쉽지 않았다. 끙끙대며 애꿎은 원피스만 쥐어짜 낼 때였다.
“위험하니 안에서 기다리십시오.”
“혼자 싸울 수 있어요? 검도 없잖아요.”
“괜찮습니다.”
표정 변화 없는 담담한 얼굴로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음, 알겠어요. 그럼 피해있을게요.”
무기도 없으니 나서는 것보다는 물러서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나샤가 뒤로 물러서자 리히르트는 걸음을 옮겨 철문으로 다가갔다.
잠시 문밖의 기척을 살피던 그는 문고리를 쥐었다. 최대한 소리 없이 열 생각이었으나 철문의 이음새에서 끼익대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그녀의 말대로 문밖에는 두 명의 보초가 서있었다. 가장 가까이에 서있던 적 하나가 검을 뽑아 들려고 하자 리히르트는 곧바로 적의 팔을 붙잡아 반대로 꺾었다.
그리고 적의 허리께에 걸려있던 검을 뽑아 들어 적의 복부에 찔러 넣었다. 배를 관통한 검을 뽑아 든 그는 곧바로 달려드는 적까지 단숨에 베어내었다.
그가 붉은 피가 묻은 검을 허공에 한번 털어낼 때였다. 철문이 열리며 그 사이로 작은 머리가 내밀어졌다.
“다 해치웠어요?”
그 물음에 그는 대답 대신에 쓰러져 있는 시신 두 구에 눈길을 주었다. 아나샤는 오, 하고 의미 없는 소리를 내고서 코를 킁킁거렸다.
“여기는 향을 피우지 않았네요. 놈들이 돌아오기 전에 얼른 나가요.”
아나샤의 재촉에 리히르트는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하고 위로 올라갔다.
“잠깐만요.”
문을 열고 막 바깥으로 빠져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아나샤가 그를 붙잡았다. 동시에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오자 리히르트는 검 손잡이를 고쳐 쥐며 아나샤에게 눈짓했다.
“뒤로 물러나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깥에선 여러 명의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가장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선 남자는 서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검을 빼 들었다. 이어서 다섯 명의 사내들이 각자 무기를 꺼내 들고 리히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모두 그에게 달려들어 홀로 남게 된 아나샤는 자연스레 동떨어진 채 그들의 전투를 구경하게 되었다.
숫자로 보면 불리한 상황이겠지만, 실제로 불리한 쪽은 반대였다. 순식간에 세 명을 해치운 리히르트는 도망치려는 두 명의 등을 차례대로 베어내었다.
그 살벌한 위력에 남은 두 명은 서로 눈치를 보며 양공을 시도했다. 한 명은 리히르트의 정면으로 달려들고, 다른 한 명은 그 반대 방향에서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큭……!”
그러나 정면에서 달려들던 남자가 쉽사리 베이면서 남은 한 명은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재빠르게 목표물을 바꿨다. 백금발의 사내가 아닌 그 옆에 떨어져 서있는 작은 여자에게로 달려든 것이다.
“움직이지 마!”
아나샤는 자신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채는 손길에 미처 반항할 새도 없이 끌려가야만 했다. 동시에 목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고통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피로 흥건한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백금발의 사내는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나샤는 눈동자를 굴려 아래를 바라보았다. 짧은 길이의 칼이 제 목을 겨누고 있었다.
“당장 그 검 버려! 이 여자가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살다 보니 붙잡히는 일도 다 있네.’ 고작 며칠 쉬었다고 그새 몸이 둔해진 걸까.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누군가에게 붙잡혀 있다는 사실에 아나샤는 큰 충격을 받았다. 홀로 비틀대며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툭, 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아나샤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백금발의 사내는 스스로 검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였다. 본인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도 이름 모를 저를 살리겠다고 그 야비한 말에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