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사랑에 빠질 때-2화 (2/87)

2화

“…너 뭐 하냐?”

“청소.”

“그러니까 거기는 왜……?”

크리스는 어이없는 눈으로 단장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정확히는 천장 한가운데에 네모나게 뚫린 구멍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아나샤를.

천장 위를 누가 다닌다고 그렇게 정성 들여 청소하는지 모르겠다. 아 한 명 있었지.

“삼촌이 말했잖아. 대귀족은 더러운 걸 질색한다고. 그러니까 언제든 나타나도 먼지 하나 안 묻게 여길 청소하려고. 그럼 먼지 묻을 일도 없잖아?”

“그냥 그때마다 씻거나 옷을 털면 되잖아?”

“에이, 어떻게 매번 그래?”

구멍 사이로 얼굴을 내민 아나샤가 진심으로 번거롭다는 듯 손사래까지 쳤다. 다시 쏙 구멍 안으로 들어가더니 얼마 안 가 구멍 사이로 까맣게 때가 탄 수건들이 하나둘 떨어져 내렸다.

크리스는 자신의 발밑에 던져진 까만 수건을 보고 질겁했다. 짓뭉갠 찌그러진 거미가 달라붙어 있었다.

“어우. 거길 다 닦으려면 수건 천 장, 아니 만 장은 있어도 부족할걸?”

“괜찮아! 내가 다니는 길만 닦을 거니까!”

“…뭐? 길? 길도 있어……?”

새롭게 안 사실에 크리스는 아, 하고 입을 벌렸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부디 새 단장님이 그녀의 정성을 알아주기를, 하고 속으로 빌 뿐이었다.

2장 새로 오신 단장님

대낮부터 시장은 활기로 가득 차있었다.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과 부산스레 움직이는 사람들, 조금은 정신없지만 생동감 넘치는 이 풍경을 아나샤는 좋아했다.

아나샤는 수도 외곽에 있는 시장에 나와있었다. 임무가 없으니 한가했다. 물론 그것도 이번 주까지겠지만.

나흘 뒤면 새 단장님이 기사단에 오는 날이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귀족이란 틀 안에 갇혀 융통성이 없고, 오로지 규칙만을 따르는 까다로운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귀족 중의 대귀족은 어떠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쩌면 할아버지보다 더 괴팍한 성미에, 부단장보다 잔소리가 많고 깐깐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청소도 했으니까.’

시장에서 산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며 아나샤는 흥얼거렸다. 매일 입고 있는 검은 복장이 아닌 무릎까지 오는 흰 원피스 차림의 그녀는 누가 보아도 수도 외곽에서 흔히 보이는 평민 소녀 같았다.

잡화점에 새로 들어온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하던 그녀는 알록달록한 장신구들이 나열된 가판대 앞에서 멈춰 섰다. 맑은 푸른 빛깔의 구슬이 달린 머리 장신구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거 얼마예요?”

“어디 보자. 원래는 15실루나는 받아야 하는데 아가씨한테는 10실루나에 팔게.”

상인의 말에 아나샤는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동전들을 세어보았다. 총 일곱 닢이었다.

“3실루나만 외상 안 되겠죠?”

“당연히 안 되지. 아가씨가 누군 줄 알고.”

“저 아나샤라고 해요.”

“이름을 물어본 게 아니고, 처음 본 아가씨를 어떻게 믿냐 이 말이지.”

“이렇게 알게 되는 거죠, 뭐. 새로 오셨죠? 원래는 이 자리에서 신발 팔았었는데 바뀌었네요.”

“일주일 전에 수도로 올라왔어. 젊은 아가씨가 이 바닥은 훤히 꿰고 있구먼.”

“그렇죠?”

어깨를 으쓱 들었다 내린 아나샤가 밝은 얼굴로 입을 조잘거렸다.

“새로 오신 아저씨를 위해 몇 가지 알려드리자면요. 저기 시장 위쪽에 장신구 파는 곳이 두 곳이고, 아래쪽에는 오래된 곳이 한 곳 있어요. 아래쪽이 가격이 제일 저렴해서 제 또래들은 대부분 아래쪽으로 가요.”

“그래……?”

“근데 그 세 곳 다 오래된 곳들이라 그런지 장신구들이 다 비슷하거든요. 아저씨 거는 색상도 다채롭고 모양도 하나같이 다 독특한 것 같아요. 수도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장신구들이에요.”

“암, 내가 영지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직접 수집한 건데 다른 데서는 쉽게 볼 수 없지!”

그렇게 외친 상인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어려있었다.

“다른 곳에서 다 하나하나 수집한 거라고요?”

“속고만 살았나. 지명도 다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아나샤가 정말 기억하느냐고 호기심을 드러내면서 대화는 자연스레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었다.

이 팔찌는 어디서 구했고, 이 머리핀은 어디서 구했으며, 가장 힘들게 구한 것은 무엇인지 등 한참 동안 신나게 떠들어 대던 상인은 뒤늦게 낮은 헛기침을 터뜨렸다.

“들은 정보가 있으니 아가씨한테는 특별히 7실루나에 팔게.”

“정말요?”

“대신 친구들한테 여기 좀 많이 알려줘.”

“당연하죠! 엄청 좋은 장신구 가게가 생겼다고 여기저기 소문낼게요.”

아나샤는 주머니에서 냉큼 동전 일곱 닢을 꺼내 그의 손에 얹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얻은 구슬 머리핀을 조심스레 오른쪽 귓등 위에 꽂았다. 거울을 한번 확인한 아나샤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엄청 예뻐요. 많이 파세요!”

정말이지 운이 좋았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은 그녀의 빠른 걸음걸이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나샤는 남은 사과를 베어 먹으며 다른 가게를 구경하다가 한산한 골목 어귀로 들어섰다.

좁은 골목 안을 걷던 그녀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벽에 다가갔다. 그리고 두 손으로 벽의 튀어나온 부분을 붙잡았다. 사뿐히 높은 벽 위로 올라선 것은 순식간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아나샤는 길게 이어지는 벽 위의 길을 따라 걸어갔다. 어릴 때부터 다니던 길이라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였다.

아슬아슬하게 지붕들을 건너다니며 꽤 높은 곳까지 다다른 그녀는 펄럭이는 치맛자락을 누르며 지붕 위에 주저앉았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탁 트인 마을 풍경이 좋았다. 흰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느긋하게 기지개를 켤 때였다.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녀가 지붕 너머를 내다보자 좁은 골목길 안을 걷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검은 로브를 머리끝까지 눌러쓰고 있었는데 체격으로 보아 남자 같았다.

지붕 위에서 납작 몸을 숙인 아나샤가 슬쩍 고개만 내밀어 그를 관찰할 때였다. 로브 사이로 드러난 검 손잡이가 스치듯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수상쩍은데?’

그녀의 감은 제법 좋은 편이었다.

아나샤는 잠시 남자를 뒤쫓을까 고민했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척을 숨긴 채 조심스레 천장 위에서 남자를 쫓기 시작했다.

남자는 구불 진 골목 안을 계속해서 걸어 들어갔다. 아는 길은 아닌지 막힌 골목으로 들어섰다가 다시 돌아 나가기도 했다.

‘접선 장소라도 찾는 건가?’

이곳은 민가였다. 사람 눈에 띄지도 않고, 비밀리에 무언가를 꾸미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다.

역시나 남자는 골목 모퉁이를 돌아 햇빛이 들지 않는 으슥한 길로 들어섰다. 아나샤는 조금 거리를 둔 채 골목 안을 응시했다. 다른 인기척들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골목에 서있는 자들은 총 세 명으로 전부 남자였다. 그리고 저마다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이윽고 검은 로브를 쓴 남자가 그들 앞으로 다가가자 아나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봐. 어디로 가려는 거지?”

험상궂은 목소리가 골목 안을 울리며 가장 앞에 서있던 거구의 사내가 그를 막아섰다. 은밀한 접선의 현장을 볼 거라 여겼던 아나샤로서는 전혀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이 자식 뭔가 수상쩍은데.”

남자가 로브를 억지로 벗기려는 듯 머리 쪽으로 손을 가져간 순간이었다. 뽑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예리한 검날이 정확히 거구의 사내 목 앞에서 멈췄다.

“인신매매단의 근거지가 이곳인가.”

낮지만 또렷한 저음의 목소리가 아나샤의 귀로 흘러들어 왔다.

그 말에 뒤에 서있던 갈색 머리 남자와 검은 머리 남자가 조용히 검을 빼 들었다. 그들이 동시에 달려드는 순간, 로브를 쓴 남자가 재빠르게 눈앞에 있는 자의 목을 베어내고서 다른 이의 검을 받아쳐 냈다.

챙, 하는 날카로운 울림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목을 향해 날아든 다른 검을 피해 몸을 숙였다. 눌러쓴 로브로 인해 시야가 방해될 법도 할 텐데 남자는 망설임 없이 달려나갔다.

미처 방어할 틈을 갖추지 못한 갈색 머리 남자가 틈을 보인 순간이었다. 자세를 낮추며 함께 아래로 늘어뜨렸던 검이 위로 방향을 바꾸었다.

순식간에 긴 검은 가슴부터 어깨까지 단숨에 베고 지나갔다. 치명상은 피한 것 같았으나 고통이 심한지 갈색 머리 남자는 비틀거리다 벽에 부딪쳤다.

로브를 쓴 남자가 다시 검을 휘두르려던 순간이었다. 그의 뒤에서 다른 사내가 달려들었다. 높이 쳐들어진 검은 팔을 통째로 베어낼 것처럼 무서운 기세로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그러나 베어낸 것은 펄럭이는 로브의 끝자락이었다.

동시에 로브를 쓴 남자가 검을 움직였다. 잘린 천 자락이 땅바닥 위에 떨어지기도 전, 서슬 퍼런 검이 날카로운 궤도를 그리며 빠르게 적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아나샤는 입을 벌렸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깔끔히 머리만 베어낸 실력에 소름이 쫙 돋을 정도였다. 단번에 머리를 벨 정도의 괴력을 갖춘 실력자는 기사단 안에서도 흔치 않은 편이었다.

머리를 잃은 몸이 무너지듯 쓰러지자 그제야 로브를 쓴 남자는 검을 늘어뜨렸다.

두 명이나 죽어버리자 갈색 머리 사내는 승산이 없다고 여겼는지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런 사내를 향해 로브를 쓴 남자는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은 정확히 사내의 목 중앙을 겨누었다.

“납치한 자들은 어디에 있지?”

“…저, 저기에.”

사내가 떨리는 손을 들어 어느 평범해 보이는 낡은 건물을 가리켰다. 로브를 쓴 남자는 그대로 그를 지나치더니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켜보던 아나샤도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남자를 뒤쫓았다. 아나샤가 지붕과 지붕 사이를 건너는 동안 남자는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지붕 위에 소리 없이 착지한 그녀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다행히 오른쪽 끝에 있는 썩은 나무판자를 밀어내자 쉽게 집 천장으로 숨어들 수 있었다.

어두운 천장 위에서 아나샤는 작은 구멍을 통해 남자를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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