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사랑에 빠질 때 >
1화
1장 프롤로그
황실 제5기사단의 본관 정문 계단 앞에는 부단장을 중심으로 기사들이 시립해 있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기사단을 떠나는 기사단장을 배웅하기 위함이었다.
부단장 칼리프는 손목에 찬 시계를 힐긋 쳐다보았다. 슬슬 떠나기로 예정된 시간이었다.
이윽고 굳게 닫힌 정문이 열렸다. 기사들은 일제히 계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으나 중앙 계단을 내려오는 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거구의 중년 남성 등에는 가려질 정도로 작은 체구의 여인이 달라붙어 있었다.
“할아버지, 정말 가?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어?”
검은 머리는 겨우 단발 길이로 짧았다.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동그란 얼굴과 물기 어린 큼직한 두 눈은 누가 보아도 순해 보였다. 올해로 갓 스무 살인 아나샤 라이나였다.
“아샤…, 자꾸 애처럼 굴지 말려무나. 네가 이렇게 울고불고하며 붙잡아도 이미 정해진 일이야. 어쩔 수 없단다.”
“그치만……! 안 울게 생겼냐고.”
“기사가 그렇게 우는 거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중년 남자가 버럭 고함치자 아나샤는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훔쳤다. 큽 하고 내려오던 콧물을 도로 집어넣고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단호히 말했다.
“할아버지가 아니면 난 싫단 말이야.”
“누가 오든 단장은 단장이야. 무를 수 없는 황실의 명이란 말이다. 네가 이 기사단의 일원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단다.”
“그치만!”
“그치만은 무슨 그치만이야! 나도 좀 쉬자, 이것아!!”
계단을 내려와서도 두 사람의 실랑이는 계속되었다. 가려는 자와 붙잡는 자의 상황을 아래에 집합해 있던 기사들은 그저 질린다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또 시작이네요.”
“마지막 날은 좀 얌전할 거라 여겼는데…….”
기사들 중 엘빈은 짧은 감상을 던졌고, 크리스는 두통에 시달리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경례를 올리려던 부단장 칼리프는 굳은 지 오래였다. 그를 의식한 기사들은 웃음을 참느라 살을 꼬집거나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부렸다.
“할아버지 가지 마! 은퇴 그거 좀 미루면 되지!”
“그래도 아샤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지. 단장님께서 정말 친손녀처럼 아껴줬으니…….”
훤칠한 키의 기사들 중에서도 눈에 띌 만큼 산만 한 덩치를 가진 마브릭이 아련한 눈을 하며 말했다. 그것도 잠시였지만.
“할아버지 가면 난 누구랑 노냐고. 단장실 소파에 누워서 노는 것도 이제 못 하잖아!”
“…그래. 아껴도 너무 아껴줬지. 그러니까 저렇게 버릇이 없지.”
기사 크리스가 담담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14년을 이 기사단에서 자라온 아나샤였다. 그 시간 동안 단장직을 맡고 있던 아버트 벨더스는 누구보다 아나샤를 오냐오냐 대했던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그 장본인은 오늘로 은퇴하게 되었다. 말괄량이를 이 기사단에 남겨둔 채.
뒤늦게 굳은 얼굴을 푼 칼리프가 단장 아버트에게 다가갔다.
“모든 짐은 다 실어두었습니다. 바로 오르시면 됩니다.”
“그래. 아샤 녀석 좀 잘 붙잡아 주게나.”
“할아버지!”
아나샤가 외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간의 노고에 기사단을 대표해 감사 인사 드립니다. 모두 아버트 단장님께 경례!”
기사들의 거수경례를 받으며 아버트는 마차에 오르기 위해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기사들의 손에 붙잡힌 아나샤를 내려다보았다.
“적적하면 영지로 언제든 놀러오렴. 기다리고 있으마. 물론 이번에 오는 단장이 그만큼 긴 휴가를 내줄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하 하고 짓궂은 웃음을 터뜨린 아버트가 마차에 올랐다. 투명한 마차 창문 너머로 수염을 쓸면서 앉아있는 그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만 갔다.
“안 돼애애애!!”
마차 뒤꽁무니를 보며 아나샤는 절규했다. 마차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 * *
“그 뒤로 통 기운이 없네, 아샤.”
마브릭이 걱정스러운 눈치로 먼발치 나무 위에 앉아있는 아나샤를 바라보았다. 땅 위에 서있는 모습을 보기 힘들 만큼 원래도 잘 안 내려오는 아나샤라지만 최근에는 항상 혼자 저러고 앉아 멍 때리기 일쑤였다.
“그럴 만도 하지. 단장님 가시고 부단장한테 불려가서 몇 시간 동안 설교를 들었으니……. 그보다 난 새 단장님이 온 후가 더 걱정인데.”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는 듯 크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나샤의 성장 과정을 봐온 사람으로서 아나샤가 얼마나 예법에 무지한지 잘 알고 있었다. 예법은커녕 일반적인 상식과 약간 어긋난 면도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억지로라도 예법을 배우게 하는 거였는데.’
물론 이제 와 후회를 해봤자 늦었다는 것을 크리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브릭을 대신해 나무 밑으로 다가가 아나샤에게 말을 걸었다.
“아샤, 다음 주에 새 단장님이 온다는 소식 들었지?”
“…새? 삼촌들은 몰라도 나는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고!”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
크리스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양 미간을 주물렀다.
“…너 말이야. 네가 지금 얼마나 위태로운 상탠지 알아?”
“내가 왜?”
“봐봐, 지금도 반말이잖아. 이제까지 단장님이 그냥 놔둬서 그렇지 기사단은 원래 위계질서 체제라고. 다른 기사단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무례를 너는 일상적으로 범하고 있다는 말이야.”
“그래서 지금 나보고 예법이라도 구사하란 말이야?”
아나샤는 콧방귀를 뀌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삼촌인 그가 이런 말을 하니 조금 웃긴 탓이다.
“이런 옷에 예법 같은 게 어울릴 리 없잖아. 그런 건 제복 입은 삼촌이나 열심히 하셔.”
“너 설마 아직도 제복 안 줬다고…….”
“전혀요. 나도 멋지고 깔끔한 제복 입고 싶다는 건 아니고. 정말 부럽지만 아니지.”
역시 마음에 쌓아두고 있던 모양이었다. 어릴 때부터 자기도 제복이 입고 싶다고 얘기하던 것을 크리스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어엿한 황실 제5기사단 소속인 아나샤에게 아직까지도 제복이 없는 이유라면 있었다.
“네가 새 단장님의 심기를 거스를까 미리 말해두는 거야. 너 계속 여기서 일하고 싶잖아? 새 단장님께 무례한 행동을 보였다간 그대로 댕강이라고.”
목을 긋는 시늉을 한 크리스가 여전히 정색한 얼굴로 외쳤다.
“해고라고. 어?! 알아듣겠어!”
“애한테 왜 겁을 주고 그래?”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브릭이 끼어들며 말했다.
“마브릭… 네가 계속 그렇게 받아주니까 심각성을 모르는 거잖아.”
“아샤도 이제 성인인데 어련히 잘하겠지.”
“맞아. 마브릭 삼촌 최고!”
“쟤가 어련히도 잘하겠다!”
크리스는 퍽퍽 하고 제 가슴을 세게 두드렸다.
“잘 들어. 새로 오시는 기사단장님은 우리와 같지 않아. 몇백 년간 북부 영지를 다스리고 지켜온 유서 깊은 가문의 귀족이라고. 뭔 말인지 알아? 귀족 중의 대귀족이라고.”
“귀족 중의 대귀족……?”
아나샤는 눈을 찡그렸다.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트 단장님이나 부단장도 귀족이지만 그 두 사람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끄덕끄덕,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치곤 반 정도 이해한 얼굴이었다. 크리스는 한숨을 내쉬다 말고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분이 우리 기사단에 단장으로 오는데 네가 아무 말이나 찍찍 하고 그래봐. 특히나 너는 일단 일반적이지가 않잖아.”
“지금 말 다 했어?”
“그래. 매일 온몸에 먼지와 검댕을 묻히고 다니잖아. 금방이라도 들쥐나 떠돌이 개가 친구 하자고 해도 될 만큼 지저분한 모습이지.”
“그치만 내 일이 이건데…….”
“알아. 네가 매일 힘들게 천장 위를 기어 다닌다는 거. 근데 우리는 이해해 줄 수 있다 해도 새로 오시는 단장님은 아니란 거지.”
“……?”
“그런 분들은 더러운 걸 질색하시거든.”
긴장한 듯 작게 숨을 들이켠 아나샤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나뭇가지에 두 다리를 단단히 고정한 채 반 바퀴 뱅그르르 돈 그녀는 흡사 나무에 거꾸로 걸린 시체 같은 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인마. 너 내 얘기 제대로 들었냐?”
크리스는 눈을 부라리면서 머리 바로 위에 있는 아나샤를 보았다.
“몇 년간 옆에 붙어있던 자기 수족도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가볍게 갈아치워 버리는 게 귀족인데 하물며 대귀족은 어떻겠냐? 새 단장님한테 밉보이는 순간 네가 잘릴 수도 있단 말이야.”
“그런…….”
“치사해도 이게 단장의 권한이고 권력이란 거다. 이제 좀 네 상황의 심각성이 느껴지냐?”
“그럴 리가……. 그래, 지금부터 청소를 해야겠다!”
시무룩해진 것도 잠시 아나샤가 다시 재빠르게 나뭇가지 위로 올라갔다. 그러곤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 맞은편에 있는 기사단 본관 건물 3층 창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아나샤를 눈으로 좇던 크리스와 마브릭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내가 쫓아가 볼게.”
크리스는 바쁘게 발을 움직였다. 그도 이십 년간 기사단에 몸담고 있는 기사라지만 민첩함으로는 아나샤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기사단의 전속 첩자이니 말이다.
일반 기사들과는 달리 침투, 은신, 첩보 등의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는 자가 바로 첩자였다. 크리스의 생각에도 아나샤만큼 이 직업에 어울리는 사람도 없었다.
체구가 작고 왜소해서 웬만한 남자 첩자들보다 몸놀림이 날렵하고 조용했다. 다람쥐처럼 나무나 천장 위를 날아다니는 그녀를 볼 때마다 참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기사단 내에서 이런 임무를 맡을 사람으로서 유일하기도 하고 첩자로서의 자질도 뛰어났다. 단순히 오랫동안 봐온 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말 그녀는 기사단에서 필요한 존재였다. 그렇지 않다면 누구보다 아나샤가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을 원했을 크리스였다.
그렇기에 이번 일이 심히 걱정되는 것이었다.
다행히 크리스는 아나샤를 빨리 찾을 수 있었다. 물론 기사단 건물의 반을 뒤지느라 한 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이 정도도 빠른 편이었다. 그녀가 작정하고 숨으면 한 달이 걸려도 못 찾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