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5화. 울음의 이유
-- 어렸을 때, 그러니까 내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어렸을 때, 나는 엄마를 아주 아프게 했었다. 나를 낳다가 엄마는 죽을 뻔했고, 지금도 그것 때문에 겨울에는 많이 아파하신다. 엄마가 아플 때마다 나는 슬프다. 그냥 슬프다는 말밖에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때가 그렇다.
- 존 애거시 노팅엄의 일기장에서
이안은 그 이야기를 한 번도 입밖에 내비치지 않았다. 존을 낳다가 매들린이 사경을 헤맸다거나, 그녀가 쇠약해졌다는 말을 아들에게 언급한 적이 없단 이야기다. 하지만 존은 지나치게 눈치가 빨랐다. 그 이야기인즉슨, 이안과 매들린이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들의 입 모양을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추론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엄마를 아프게 했다는 생각만 하면, 온통 서러웠다.
누군가를 위해서 대가 없는 사랑과 보살핌을 베풀어주고 싶었다. 물론 존이 스스로 그렇게 유려하게 정식화한 건 아니지만, 본능적인 욕망이었다. 자신보다 작고 약한 것을 보살피고 아끼는 것 말이다. 길가에서 바들바들 떠는 코리를 안아 들고 보살폈을 때의 감정을.
비슷한 나이 또래 아이인 케이트를 강아지에 비유하는 건 온당치 않을지도 모르지만, 존은 그저 흐느끼며 자리를 떠나던 그 아이를 웃게 해 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도 있었다. 케이트가 그렇게 좋아하는 선수는 실제로 보면 어떨까. 많이 아프다고 하던데, 그러면 정말 말랐을까? 평소와 똑같을까?
* * *
“잘 자라.”
널찍한 손님방 침대에 두 소년을 밀어 넣은 뒤, 엔조는 착잡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내일 감사 행사인지 뭔지가 끝나고 나면 곧바로 너희 부모님께 연락드릴 거야. 나중에 네 녀석들이 집 앞마당에 거꾸로 매달려 볼기짝을 얻어맞든지 말든지 내 책임은 절대 아니란 거다. 이해했지?”
“넵!”
지나치게 해맑은 로저의 말에 어이가 또 없어진 엔조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는 그대로 불을 끄고 방문을 닫았다. 남자가 나가자마자 로저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와, 진짜. 멋지다. 집이 엄-청 넓어!”
그리고 다 번쩍번쩍해! 로저는 아주 신이 났다. 존의 손바닥을 잡고 아무 말이나 막 써재꼈다.
둘은 한참 그렇게 손짓·발짓으로, 또 손바닥에 알파벳을 그려가면서 수다를 떨었다.
{ 나 학교 갈 것 같아. }
“…….”
그 순간 조용한 대화가 멈췄다. 진정한 침묵이 두 소년 사이에 자리 잡았다.
{ 진짜? 여기 학교야? }
{ 아니. 아마 기숙학교일 것 같아. }
{ 거기는 밥맛 범생이들 다니는 데 같은데. }
“…….”
{ 농담이야. 재밌을 거야. }
{ 고마워. }
행복한 봄을 만들어줘서 고마워.
* * *
엔조는 아이들에게 표 두 장을 선심을 쓴다는 듯 던져줬다.
“각자 표는 줬으니까 사인은 알아서 받아와라.”
“와.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아주 작은 소리로 고맙다고 말하는 존을 보며, 엔조의 마음에 낯선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물론, 아이는 들리지 않을 뿐이지 성대는 멀쩡하단 걸 안다. 하지만 목소리를 처음 듣고 나니 괜히 감상적으로 되는 것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괜한 감정에 몰입할 필요는 없었다. 차는 스타디움 앞 주차장에 멈춰 섰고, 아이들은 차례로 좌석에서 내렸다.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자, 저리로 가자.”
엔조가 아이들을 인솔하려는 그때였다. 존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야, 왜?”
그렇게 말하는 로저도, 그들의 어깨를 붙잡은 엔조도 표정이 굳고야 말았다. 저편에 매들린과 이안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존의 몸이 덜덜 떨렸다. 아버지를 한 번도 쉽게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지금 그는 너무나도 무서웠다.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죄책감보다 그런 공포가 앞섰다. 로저도 뻣뻣하게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아 공포심을 느끼는 게 비단 존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안은 지금 숫제 야차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멀끔하게 정돈된 외양과 대조되는 분노가 느껴졌다. 눈에서 창백한 불꽃이 튀었다. 꼿꼿하게 서서는 세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허. 젠장, 망했군.”
엔조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이안은 성큼성큼 걸어왔다. 존은 그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나 조금 천천히 걷던 아버지가 이렇게 빨랐다니. 그러나 거기에 감탄할 새도 없이, 아버지는 주먹을 휘둘렀고, 엔조는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안 돼요!”
로저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막아보려 애썼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행히도 이안은 한 대 얻어맞은 엔조를 더 때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안, 한 번만 더 휘둘러봐요. 가만 안 둘 거니까.”
매들린이었다. 잠을 설쳤는지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단호한 표정으로 이안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안, 그만.”
“개자식, 내 아들을 납치해?”
“그만하라구요.”
“매들린, 난 저 자식이 언제나 싫었소. 세상의 쓰레기 같은 존재지. 저놈이 왜 당신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할까. 죽여버려야겠어.”
“…글쎄. 정확히 말하면, 나는 이 세상의 청소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데. 당신네들이 남겨놓은 쓰레기를 먹고 사는 까마귀 같은 존재라고.”
엔조는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입술이 터졌는지 입가가 피범벅이었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이 충격에 휩싸였다.
“괜찮아. 아저씨 이빨 안 다쳤어. 멀쩡해.”
엔조가 고개를 까딱이며 이안을 도발했다.
“나를 유괴범이라고 단정 짓는 게 참으로 불쾌하구만. 이봐. 그게 사실이 아니면 어떻게 뒷감당을 하려고 그래?”
“네놈이 유괴범이 아니었다면, 적어도 어젯밤에는 알렸어야지.”
“죄송하지만 댁네 전화번호도 모르는 데다가, 내가 전화를 걸어봤자 그쪽에서 받았을 수나 있겠어? 지금 여기 계시는데.”
엔조는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데자뷔 같은 게 일어나서, 매들린은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 그래, 좋아. 네놈을 경찰에 넘길 거야. 이번에는 혐의를 피해가는지 보자. 탈세로라도 잡아넣을 거다.”
“후버 국장도, 시장님도 나를 못 잡는데 네가 무슨 수로?”
“둘 다 싸우지 좀 말아봐요!”
큰 소리를 내고서야 남자들이 대거리를 멈췄다. 매들린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존에게 수화로 말했다.
‘몸은 괜찮니?’
‘네. 죄송해요, 엄마. 저분은 잘못이 없어요. 다 저희 때문이에요.’
“…….”
매들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아들에게 화가 났지만, 안도감이 더 컸다.
‘말을 해줬으면, 얼마든지 같이 볼 수 있었을 거야.’
‘죄송해요.’
존이 훌쩍이기 시작했다. 왜소한 어깨가 위로 들리더니, 다시 내려앉았다. 서럽게 엉엉 우는 새된 목소리에 좌중이 침묵했다.
“…다 저 때문이에요, 노팅엄 경, 노팅엄 부인. 케이트를 위한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병을 이겨내고 행복하게 살자구요.”
로저 역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우리의 영웅을 직접 보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
“하지만 이런 식으로 걱정 끼쳐드려서는 안 됐어요.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꺼이꺼이 울기 시작하는 아이 둘을 바라보는 세 어른들의 시선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매들린이 그제야 엔조를 돌아보며 말했다.
“엔조, 이 아이들을 데리고 있어 줘서 고마워요.”
“…….”
예상치 못한 감사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안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허망한 표정이었다.
“앞으로는 확실하게 가르칠 예정이에요. 낯선 사람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 말이에요.”
“…그래. 그러는 게 좋겠어요. 매들린. 세상에는 나 같은 나쁜 인간이 넘쳐나니까. 그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법은 배워둬야겠죠.”
“…….”
“그러면, 보호자에게 아동을 인계했으니, 나는 이만 가도 되려나요? 백작 각하께서 나를 당장 경찰에 넘기려면야 지금뿐인데.”
“무슨 소리예요, 같이 들어가야죠.”
“……?”
“표 샀잖아요, 일단 행사는 같이 보고, 뒤에 일은 뒤에 생각하자는 거예요.”
“매들린.”
이안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으나 그녀는 단호했다.
“엔조는 아이들을 유괴한 게 아니에요. 보아하니, 이 녀석들이 먼저 졸라댄 모양이네요.”
매들린은 아직도 덜덜 떠는 아이들의 등을 어루만져줬다.
“일단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같이 볼까?”
무척 지치고 피곤한 미소였으나, 그녀는 로저가 쥔 공을 같이 꼭 그러쥐었다.
“케이트를 위해서 우리가 대신 보고 기억해야 하잖아.”
* * *
7만 명의 관중들이 운집한 양키 스타디움은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했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벌써 눈물바다였다.
매들린은 아직도 분노에 휩싸여있는 이안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녀는 남자의 귓전에 작게 속삭였다.
“아이들은 아이들이에요.”
“알아. 하지만 너무도 화가 나는군.”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고 가족에게 상처 줘서는 안 돼. 아버지로서 그걸 가르치는 데 실패했단 생각이 드는군.”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어요.”
이안은 매들린을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힘들고 화가 났을 텐데도, 그녀는 존을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난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
저만치에서는 로저와 엔조가 뭐라 떠들고 있었다.
그때, 남자가 마이크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너무도 멀리서 보는 나머지, 형체를 분간할 수 없었다. 바닥 위에 올려놓은 트로피들, 푹 수그린 고개. 색색거리는 목소리. 그러나 인간으로서 지고한 긍지와 품위가 느껴졌다.
“팬 여러분, 지난 2주 동안 제게 찾아온 불행에 대해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럼에도 오늘 저는 제 자신이 지구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루 게릭이 말을 시작했다.
이안은 그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남자’가 마지막 인사를 하는 동안 매들린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엔조를 후려친 손은 하필이면 다친 손이었다. 아마 후유증이 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딱히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사소한 통증이나 분풀이보다는, 매들린이 더 중요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고작 하루 이틀 정신없어서 못 본 건데도, 일이 일단락되니 그녀를 사무치게 안고 싶었다.
마운드를 바라보는 존의 표정은 반짝였고, 그런 반짝이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내의 표정은 더더욱 밝았다. 이안은 자신의 행운이 무서웠다. 몇 번이고 잃을 뻔했어도, 결국은 영영 잃지 않았다는 것이, 그 운이 너무도 무서웠다.
“이런 시련을 겪게 됐을지라도, 전 이렇듯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누려왔다는 말씀을 전하며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연설이 끝나자 사람들은 기립박수를 던졌다. 이안도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단상을 휘청이며 떠나는 선수의 뒷모습을 보았다.
존에게 저 장면은 어떻게 기억될까? 불치병에 걸렸음에도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은 한 인간의 고결함으로 남을까? 아니면 어머니와 아버지를 거스르면서까지 원하는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친구와 우정을 다진 일탈의 추억으로?
이안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박동했다. 훌쩍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남몰래 조금 울었다. 그가 그 울음의 이유를 깨달은 건,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다.
그는 매들린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 <구원 방정식> 외전 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