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4화. 우연의 일치(2) (120/121)

외전 14화. 우연의 일치(2)

“하느님 맙소사. 당신 누굽니까?”

서둘러 현관 쪽으로 향하자,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매들린 노팅엄 백작부인. 굽이치는 금발 머리를 묶어 올린 채 드레스에 얇은 코트를 걸친 모습. 그녀 역시 케이의 존재를 예상하지 못한 듯 무척 당황한 눈치였다. 

“케이. 진정해. 내 친구야.”

“…당신, 정말 너무하는군.”

그런데 대관절 애인은 라이오넬과 매들린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한숨을 푹푹 쉬며 ‘너는 세상 최악의 인간쓰레기다’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냐. 네가 뭘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일단 아니라고. 저분은 임자도 있는 분이야.”

‘게다가 그 임자라는 사람은 무지막지하고 못되어 먹은 마왕이란 말이다.’

“……?”

매들린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아예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른 일로 몹시 신경이 곤두서있는데 두 남자의 사소한 신경전 같은 게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래도 일단 손님이니까, 그녀는 정신없이 모자를 벗고 머리를 정돈한 뒤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매들린 노팅엄이에요. 라이오넬의 친구신가 봐요.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들렀…”

“아. 노팅엄 백작부인이십니까?”

백작부인이라는 낯간지러운 호칭에 민망한 듯 미간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오며 재차 눈인사했다. 

“매들린,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웬일로?”

“라이오넬, 지금 급한 부탁이 있어.”

“…….”

매들린은 사소한 부탁으로 호들갑을 떨 사람은 아니었다.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났다는 걸 직감한 라이오넬이 눈빛으로 케이를 내보냈다. 남자가 완전히 현관 밖을 나간 것을 확인한 뒤에야 매들린이 말했다.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말이다. 

“존이 사라졌어.”

* * *

“일단 내일 양키스 스타디움에 사람을 풀어놓고 찾아보자고.”

“당연히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그때까지 애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어떡해?”

이안은 또 이안 나름대로 이리저리 찾아보는 중인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성난 이안 노팅엄을 상대하는 건 그로선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안 그래도 자기 아내에게만 사람 같이 구는 작자였다.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매들린, 존 혼자만이 아니라며. 그리고 존은 똑똑한 아이란 걸 알잖아.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라이오넬의 목소리도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다. 젠장. 그는 마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면서 속으로 욕을 주워섬겼다. 그 착하고 순한 아이가, 어째서 그런 무분별한 짓을? 

정말이지 존 애거시 노팅엄은 착한 아이였다. 사랑스러운 아이였고, 천사 같은 아이였다. 매들린이 그녀의 2세의 이름을 작고한 형의 것을 따 짓겠다고 했을 때 즐겁지만은 않았었다. 그야 감개무량하긴 했다. 형님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잊힌 존재로 사라지진 않을 것 같아서 기뻤다. 하지만 동시에, 태어나지도 않은 녀석에게 빈정이 상했다고나 해야 할까. 

어차피 존 에머스트 2세는 죽었는걸, 하는 비관적인 생각뿐이 안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음울한 생각을 했던 것도 무색하게, 막상 아이가 태어나고 나니 이쁘고 사랑스러워서 흐뭇한 미소만 나왔다. 쑥쑥 자라는 것도 기특했고, 제법 어른스럽게 독서하는 것은 대단했다. 하여간, 혈육과는 데면데면한 라이오넬에게는 조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사라졌단다. 아마도 가출을 해서. 그것도 야구 같은 시답잖은 걸 보겠다는 이유 때문에 말이다.

“존이 그런 짓을 저지를 만큼 야구를 좋아했었나?”

“친구들이랑 자주 하나 봐.”

“…거 참, 서운하네. 내게 말했으면 전 시즌 티켓을 다 사다 줄 수 있는데.”

“사실 그래서 아이들이 널 찾아갔을 줄 알았어.”

“뭐?”

“너는 존이 원하는 건 뭐든지 사주잖아. 부탁도 다 들어주고. 그래서 무언가를 부탁한다면 너일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여기에도 안 왔다니 정말….”

매들린이 긴긴 한숨을 쉬면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눈물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아내려는 것처럼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그 로저라는 애가 뉴욕에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그래야 할 텐데.”

“…….”

훌쩍.

이런. 매들린이 울고 있었다. 처진 눈에, 또 숱 많은 속눈썹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한참을 훌쩍이던 그녀는 어느덧 흐느끼기 시작했다. 납치를 하고 죽이겠다고 해도 꿈쩍도 안 하는 강골이 저리 무너지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존, 널 사랑하지만, 진짜 혼나야겠다.’ 

그러니까 어디에 있니. 빨리 알려다오. 

“매들린, 나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게.”

“고마워. 정말-.”

“더 고마워하고 자시고 할 거 없어. 내가 걔 대부잖아.”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 * *

{ 키키, 너도 배트 휘둘러볼래? }

같이 하자. 재밌을 거야. 네 오빠랑 나만 하니까 별로다.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건, 어린 마음에도 질색이었다. 하지만 그저 조용히 앉아 경기를 바라보기만 하는 케이트가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그렇게 주제넘은 제안을 한 걸지도 모른다. 

그 제안을 읽은 케이트는 얼마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존을 바라볼 뿐이었다.

{ 존은 참 착해. }

케이트는 그렇게 수수께끼 같은 한 문장을 적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존은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소녀의 어깨를 바라봤다. 

* * *

이러니저러니 해도 애들 밥을 굶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엔조의 차는 음식점으로 향했다. 식당 구석에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던져줬다. 알아서 골라 먹으라고. 종업원은 아버지와 아들들 간의 단란한 한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럴 때면 제 외양이 험상궂진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저는 미트파이요.”

로저는 금세 메뉴를 골랐고, 존은 그것보다 잠시 더 주저하더니 자기가 먹고 싶은 걸 손가락으로 짚어서 보여줬다. 

“그래. 내가 주문하마.” 

종업원을 불러 메뉴를 주문하고 콜라 두 잔과 커피 한잔을 추가했다. 팁을 얹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착잡하네.’

알리지 말라고 애원하는 아이들을 놔두고 몰래 고자질을 할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한편으로, 은밀한 기대감이 없지는 않았다. 너무 은밀한 나머지, 엔조 자신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기대감이었다. 

어찌 됐건 매들린을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몇 년 전, 자선행사에서 본 그때와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머리를 잘랐을까, 예전처럼 묶고 다닐까. 그런 자잘한 사실들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물론 그래서 실제로 만난다 한들 할 이야기는 없겠지만 말이다. 

이미 너무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 만나서 할 이야기가 무어 있겠나? 나름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 거주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거친 일이었다. 언론의 자유니, 세계 자유 무역이니 하는 거창하고 고귀해 보이는 주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매들린은 언제나 그 잘나신 귀족 남편과 함께일 거다. 그 생각 때문인지 식당의 블랙커피 때문인지 혀끝이 굉장히 썼다.

“뉴욕은 처음이니?”

로저에게 묻자, 아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존은 어렸을 때 한 번 왔는데 기억이 안 난다고 했어요.”

“그래.”

‘그리고 그때 내가 매들린을 마지막으로 한번 눈에 담았지.’ 말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는 존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아는 것처럼 자신을 차분히 응시하는 수줍은 소년을 말이다. 

일견 유약해 보이면서도, 강인한 구석이 있는 이목구비였다. 

엔조가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명함 뒷면에 무언가를 끄적이려 했다. 

- 입에 잘 맞니?

- 다른 거 시켜줄까?

- 어머니는 건강하시고?

이런 질문들을 적을까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엔조 라오네는 글을 쓸 줄 몰랐으니까. 

대충 영어를 읽을 수는 있어도(초대장이라거나, 스포츠 경기 기사 같은 건 읽을 수 있었다), 서명과 서툰 메모를 남길 수는 있어도, 비웃음 사지 않을 만큼 정돈된 맞춤법을 갖춘 문장은 구사할 수는 없었다. 그것에 대해서 유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아이비리그에 갈 것도 아닌데 먹물들마냥 글쓰기를 현란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막상 이런 상황에 부닥치니, 주저하게 되었다. 고작 저 자그마한 아이한테 평가당하는 게 두려워서 천하의 도살자가 주저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엔조는 잔잔하게 웃으며 로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난 잠시 담배 좀 피우고 오마.”

“다른 어른들은 여기서 피우는데요?”

“응. 근데 너희들은 아직 어리잖아. 바로 앞에서 피워대면 좀 그렇지. 조금만 기다려주렴.” 

로저의 어깨를 툭툭 치고, 일어나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뉴욕은 여전히 부산스러웠고, 예기치 않은 우연은 그의 심장을 갉아 먹고 있었다. 

‘나는 매들린 로엔필드를 사랑한 적 없어.’ 

그는 몇 번째 하는지 모르는 그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공중전화 부스로 향했다. 수화기를 들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티켓을 사주자. 아이들이 원하는 걸 보게 해주자. 그러고 나서 이야기하면 될 일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