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3화. 우연의 일치(1)
공주와 왕자가 서로를 향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반지를 나누어 끼고 키스한다. 막이 내리고, 극장은 암전된다. 그리고 객석에 홀로 앉은 남자는 담배를 꺼내 피우며 욕을 지껄인다.
엔조 라오네는 이따금 그런 꿈을 꾸었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좋아. 그래, 좋다고. 다들 행복하게 잘 살라고 해.’
‘빨간 모자’ 이야기에 나오는 늑대나, ‘미녀와 야수’ 속 놈팡이 한량은 동화 속 여자 주인공들과는 격이 맞지 않는 잡놈들이란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미녀와 야수’의 야수는 저주를 받았다 해도 결국 귀족이다. 혈관에 천것들과 다른 고결한 피가 흐르는 덕분에 결말에서 여자와 이어지는 거지.
엔조는 자신의 세계관이 철저한 열등감과 피해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쓰레기로 이루어진 성 같은 거였다. 하지만 그런 폐기물로 된 보호막이라도 두르지 않으면 자신을 지킬 수 없었다.
매들린 로엔필드와 절절한 사랑을 나누었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는 여자를 순순히 놔준 편이었고, 그녀에게 구차하게 매달리거나 발치에 입 맞추지도 않았으니까. 그녀는 보란 듯이 그 젠체하는 억만장자 귀족 나부랭이와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까지 이루었다.
절절한 사랑은 없었다. 그는 승산 없는 병든 경주마에 판돈을 올리지 않는 주의였다. 도박장을 얼마간 관리하면서, 그는 하염없이 텅 빈 동공으로 손에 쥔 카드만 바라보고 있는 도박꾼들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느꼈다. 가장 괴로운 고문이 희망 고문이라고, 손에 쥘 듯 아른거리면서 결코 가질 수 없는 것들이 가장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법이었으니까.
눈앞에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한 쌍의 눈동자를 보노라니 그런 장면이 연상되었다. 가질 수 있었던 것, 하지만 가지지 못했던 것. 어차피 가지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서, 결국 가지지 않기로 한 것.
어떻게 정의하건 간에 지금 그 패는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었다. 순전히 우연의 일치였다.
* * *
부하직원이 몰아주는 차 뒷좌석에 앉아 담뱃재를 털어내다가, 차창 밖으로 불량배들이 대거리를 하는 꼴이 보였다. 익숙한 뉴욕의 뒤 풍경이라 일축하며 마저 담뱃재를 털어내던 차, 사실 저 대거리란 게 끼리끼리가 아니라, 저희보다 작달막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꼬락서니라는 걸 눈치채고 말았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가운데, 엔조는 ‘알 바 아니다’라며 제 갈 길을 가는 뉴욕 시민들의 매정함에도 혀를 내둘렀다. 기사를 시켜 클랙슨을 누르고, 뒷좌석에서 내렸다.
“거기, 형씨들? 공공장소에서 보기 좋지 않게 뭣들 하는 거야.”
입술에 태우지 않은 연초를 문 채, 엔조가 불량배들에게 대놓고 시비를 걸어왔다.
“시발, 저 새끼는 뭐야?”
사냥 모자를 쓴 남자가 욕설을 지껄이며 그를 노려보더니 몇 초 뒤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도살자다!”
“미친! 도대체 뭐야!”
도살자라는 험악한 별명을 아이들 앞에서 지껄이는 놈들에게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 한편으로, 조금 우쭐했다.
“오. 내가 아직 유명세가 있었나? 이 잘생긴 얼굴이 유명해지지 않기란 어렵겠지만 말이야.”
나름 느물느물한 농담을 던지며 엔조가 낄낄거렸다. 하지만 그런 농담을 던질수록 좌중은 사색이 되어갔다.
부둣가에서의 한바탕 대소동 이후로는 직접적으로 ‘불법’에 관여한 적은 없었는데. 그런데 소문이란 원래 그런 법이었다. 사람의 입을 옮겨 다니면서 더 극적으로 변하는 게 가십이었다.
부둣가의 합동 구출 작전은 어느덧, 엔조 라오네가 기관단총을 든 아일랜드 갱을 1대 다로 제압했다더라, 라는 황당무계한 무용담으로 변질한 지 오래였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갈수록 정도가 심해졌다.
그런 왜곡이 마냥 싫기만 하다면, 그건 또 아닌 것이…. 상대가 저리 먼저 겁을 집어먹고 내빼주니 편한 측면도 있었다.
“젠장! 잘못 걸렸다.”
“죄송합니다.”
시발이니 개발이니 지껄이며 꽁무니를 빼는 멍청한 뒷모습에 실소가 나왔다.
“하하. 와, 나 서부의 보안관 같네.”
그때가 되도록 눈을 질끈 감고 바들바들 떠는 소년을 보노라니, 귀여워서 장난을 걸고 싶어졌다. 그런데…, 아이의 얼굴 생김새가, 어딘지 무척 익숙했다.
깨달음은 금방 찾아왔다.
아, 자신의 사랑이 상대의 아들을 알아볼 정도로 깊은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기념행사에 참석한 매들린과 존을 멀리서 본 적이 있던 것뿐이었다. 그때 재빨리 뒷문으로 빠져나왔기에 망정이지, 서로 불편해질 뻔했던 기억이 있다.
‘많이 컸네.’
그리고 역시 매들린을 닮았다. 이안을 닮은 데라고는 머리카락 색과 눈 색깔뿐이었다. 엔조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는 자연스럽게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 * *
“오, 정말 최고다. 아저씨. 이 차는 독일 차 아니에요?”
“응. 엄청 좋지?”
멋진 뉴욕 어른을 만났다며 신나서 종알종알 떠드는 로저와 달리 존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차의 뒷좌석에 조르르 앉은 세 사람은 뉴욕을 천천히 구경하고 있었다.
“얘들아, 배고프지? 스테이크 먹을래?”
“저는 좋아요. 그런데….”
로저가 잠시 주저하더니, 존의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냈다. 또 그걸 본 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무슨…?’
아이들의 행동을 엔조가 의문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자니, 로저가 양해를 구했다.
“존이 잘 못 듣거든요. 그래도 입술 모양도 읽고, 글씨도 빠르게 잘 써요. 아마 우리 학교로 오면 1등 할 거예요.”
정확한 내용은 몰라도 로저가 제 칭찬 같을 걸 하는 모양을 본 존의 볼이 발갛게 익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네. 내가 존 엄마의 친구였는데…. 그분도 참 명석하셨거든.”
“……!”
존이 급하게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냈다.
{ 저희 부모님께 이야기하지 않으실 거죠? }
“허. 너희들 가출한 거니?”
“그건 아니고, 아, 뭐… 비슷한 거긴 한데, 내일 경기만 보고 돌아갈 거라서요.”
“그렇담 점심 먹기 전에 호텔에 가서 전보라도 부쳐야 하지 않을까? 많이 걱정들 하실 텐데.”
“안 돼요. 제발요. 정말 안 돼요.”
빠직, ‘아니 이 녀석들이? 듣자 하니까, 정말?’ 엔조는 자랑스러운 이탈리아인의 아들로서, 악행은 용납해도 불효는 용납하지 못하는, 이상한 효자(?)였다. 게다가 그렇게 가출한 애들을 주워서 태웠으니, 어느 누가 자신을 유괴범이라고 욕해도 변명하기 어려워질 터였다. 머리가 아팠다.
“안 돼. 얘들아. 어른으로서 한마디 충고하자면, 부모님 심장에 대못 박는 짓은 하는 게 아니란다.”
“안 돼요, 아저씨. 제 말 한 번만 들어주세요. 동생이 아파요.”
“…….”
로저라는 아이가 한참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동안 존은 차분히 창밖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저런 차분함과 무던함 또한 매들린을 닮았다.
뭐, 아무튼 상황은 대충 알겠다. 일단 가정폭력이라든지, 따돌림 같은 심각한 이유는 아니었다. 혹자 눈에는 속 터지는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서, 루 게릭의 사인이 필요하다는 거지?”
“네.”
큰 갈색 눈에 개구진 얼굴의 로저를 바라보며, 참 아이다운 발상이다 싶을 뿐이었다.
“그 사인은 내가 대신 받아서 보내줄 테니까, 부모님한테 연락하자. 학교도 가야지 않겠어?”
“…….”
“지금 정신없이 찾고 계실 텐데 너희들이 이러는 거 속상하시겠다.”
“…….”
로저의 두 눈이 설익은 실망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팔자에도 없는 부모 노릇을 하느라 조금 진이 빠질 것 같았다. 야구공에 ‘직접’ 사인을 받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제길, 자기도 어렸을 때 잭 뎀프시의 경기를 직접 보고 사인을 받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했으리라.
그때였다. 흰 손이 무언가를 건넸다.
{ 아저씨. 저는 정말 야구장에 가고 싶어요. }
“…….”
내려다보는 시선 끝에는 결연한 얼굴의 존이 있었다.
마치, 간호사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고 말하는 매들린의 얼굴과 비슷해서, 조금 속으로 질릴 지경이었다. 이래서야. 원.
혼을 낼 수도 없게 만든다고, 지독한 여자라고, 엔조는 아귀가 안 맞는 이상한 푸념을 속으로 집어삼켰다.
* * *
맨해튼 어퍼웨스트에 위치한 콘도미니엄의 최상층, 그 발코니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라이오넬은 콧노래를 불렀다. 정말이지, 매일 정시 출퇴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부자의 삶은 꿀맛이었다. 사람들이 분노하건 말건 간에 사실을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애인과 부어라 마셔라 할 수 있으니 부가 더더욱 좋았다. 물론, 그 애인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착각은 말아야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내일 뭐 할지 생각.”
아버지의 거대한 회사야 전문경영인들이 알아서 잘 요리하고 계시고, 재단 쪽은 매들린이 잘 관리하는 터였다. 나는 그냥 얼굴마담 같은 거지, 그리 생각하면 모든 게 나쁠 게 없었다.
힐끗 돌아본 애인의 얼굴이 무언가 미묘하게 어두워졌다. 침을 삼키는 듯 목울대가 오르내리락 하더니, 그가 라이오넬을 한 번 떠보듯이 질문했다.
“내일 뭐 할 생각인데?”
“뭐, 영화나 볼까 봐.”
“…….”
“왜?”
“…아니야.”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휘적휘적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라이오넬의 심사가 살짝 뒤틀렸다.
“아니, 뭐가 문제야?”
“…당신, 내 이름은 알지?”
갑자기 튀어나오는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말문이 막히는 것도 잠시, 불처럼 화가 났다.
“그야 알지. 내가 무슨, 쓰레기로 보이냐?”
“다행이네. 내일은 내 생일이거든. 같이 있은 지 햇수로 3년은 됐는데, 좀 섭섭하네.”
“…….”
젠장. 저런 이유라면 입이 열 개라도 라이오넬 쪽에서 할 말이 없었다.
“이봐, 케이, 사나이답게 굴자고. 생일 같은 거 챙겨주지 않아서 서로 멀어지는 사이 아니잖아?”
“…인간적으로 상대방에게 최소한의 관심을 쏟는 일을 ‘사나이답지 않다’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지.”
남자가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이번 한 번 가지고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건 알잖아. 내가 속 좁게 구는 거 아니란 것도.”
“…그래. 내가 잘못했어. 사람이 너무 바쁘고 경황이 없다 보면 놓칠 수 있는 거야.”
“일단 됐어. 나도 좀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해.”
“케이. 가지 마.”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눈을 굴리며 한숨을 쉬었다. 재빨리 자신의 짐을 챙기고 현관문을 열었다.
이대로 사라지면 또 한참은 못 만나겠군, 한숨을 쉬려던 찰나, 욕설이 들렸다.
“하느님 맙소사. 당신 누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