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화. 사라진 아이들(2)
경제 관념을 가르친다며 아버지가 시키는 허드렛일을 종일 한 대가로 모은 얼마간의 용돈은, 뉴욕행 티켓 두 장을 사느라 많이 써버리고 말았다. 두 소년은 사람들로 가득한 좌석에 몸을 기대고 밀려오는 상념에 몸을 맡겼다.
그럴싸해 보였던 계획은 막상 실행에 옮기니 엉성한 데다가 허점투성이였다.
다음날 양키스 스타디움에 도착해서 야구공에 루 게릭의 사인을 받는다는 것 자체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그동안 어디서 눈을 붙인단 말인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경기장에는 어떻게 들어간단 말인가?
첫 번째 고민에 대한 답은 단순했다. 잠이야 몸으로 때우면 된다. 어린이 두 명이 교대로 잠시나마 눈 붙일 만한 곳은 어디든 있을 터였다. 뉴욕은 넓은 곳이었고, 어디에라도 숨어있을 굴 같은 건 있을 테니까.
두 번째 고민은, 존이 단숨에 해결해줬다.
{ 내가 아는 분이 도와주실 거야. }
역시 집안이 어마어마하게 잘 산다더니만, 티켓을 구할 방도가 있는 모양이었다. 존의 결연한 표정으로 보건대 거짓말을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 부모님께 고자질할 수도 있는 거잖아. }
{ 그럴 분 아냐. }
존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 그분은 내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주셔. 원하는 선물은 무엇이든지 사다 주셔서, 애 버릇 나빠진다고 아버지한테 혼나기도 했어. 그래도 뭐든지 사주셔. 이번에도 그렇게 해주실 거야. }
{ 산타 같은 분이야? 진짜 멋지네. }
{ 비슷해. }
생각만 해도 자랑스러운지, 존이 아이답게 씩 웃었다. 마치 으스대는 모습이 그제야 소년다운 모습이었다.
* * *
뉴욕으로 향하는 내내 부부는 말이 없었다. 뉴욕은 매들린이 그 ‘사건’ 이후로 거의 찾지 않은 도시였다. 밤길을 걸을 때마다 어쩐지 무섭고 힘든 기억이 났다. 도저히 그곳에서 살 수 없었다.
운전사를 앞에 두고 둘은 차 뒷좌석의 양 끝에 반대로 기대어 앉았다. 매들린이 먼저 그 긴긴 침묵을 깼다.
“다 내 잘못이에요.”
“…아니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그때 당신의 말이 맞았는지도 몰라요. 어쩌면, 모르는 아이와 놀게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몰라요. 그리고 학교니 뭐니 하는 걸로 부담을 줘서도 안 됐구요.”
“당신치고는 참 이상한 사고방식이군. 도저히 공감이 안 돼.”
이안이 냉랭하게 뇌까렸다. 어둠에 잠긴 그의 옆얼굴 그림자에는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매들린, 나는 단 1초도 당신을 탓한 적 없소. 일단, 친구가 부추겼다고 해서 따라 나갔다면 그건 전적으로 존의 책임이요, 존의 잘못이야. 친구 때문에 그랬다는 건 절대로 핑계가 될 수 없어. 그리고, 학교 때문에 애가 부담을 받았다느니 그런 생각은 왜 하는 거요?”
기관총처럼 다다다 말이 나왔다. 이안은 솟구치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나름 논리정연하게 제 생각을 풀어놓았다. 그는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자마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매들린의 동공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이 보여서.
“누가 잘못했는지,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 매들린….”
“맞아요. 아는데,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요.”
그 아이가 어떻게 되어버리는 생각을 하면, 참을 수가 없어요.
“친구랑 같이 있잖아. 비록 어른은 아니지만, 사리 분별할 정도는 되는 나이요. 우리가 생각하는 나쁜 일은 없을 거야. 적어도 어디로 갔는지는 알잖아?”
괜히 달래듯 부드럽게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가 가증스럽긴 했지만, 진심이었다. 매들린의 행방을 모르거나, 그녀가 위험에 빠졌을 때는 폭주하듯 주위를 괴롭혔던 남자는, 이제 매들린이 그런 고통을 겪자 다소 차분해졌다. 저라도 무게의 중심을 잡아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그 친구를 못 믿는 건 아니에요. 그냥, 좀… 왜 말을 안 했을까, 이해할 수 없어서.”
“그런 거라면 나 때문이겠지. 매들린, 솔직히 말해 내가 그리 자상한 아버지는 아니었잖아?”
“…모두가 이상적인 존재가 될 순 없어요.”
“그래도. 내가 출장을 가고 없었더라면, 아이는 당신에게 말했을지도 모르오. 괜히 내 눈치를 본 탓인지도 모른단 말이오.”
“그거야말로 넘겨짚기네요.”
“그러게나 말이오. 우리 둘 다 넘겨짚기에는 일가견이 있나 보군. 그러니, 누구의 잘못인지 지금은 따지지 맙시다. 중요한 건 존을 찾는 거니까.”
남자는 이제 제법 차분하게 타인의 감정을 달랠 줄도 알았다. 그의 말을 들은 매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눈 좀 붙일게요.”
“여기 기대요.”
이안이 무심하게 한쪽 어깨를 내주었다. 매들린은 흔들리는 고개를 그의 어깻죽지에 자연스럽게 기대고, 잠시나마 쪽잠을 청했다.
* * *
뉴욕은 사람이 정말 많다고 익히 들어왔는데, 막상 도착하고 나서 보니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다양한 피부색과 생김새를 한 사람들이 와글거리며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로저의 팔뚝을 힘주어 붙잡는데, 붙잡은 팔도 달달 떨리고 있었다.
“여기로 가면 되는 거 맞겠지?”
로저는 존이 기억을 더듬어 적어낸 ‘산타’의 주소를 미심쩍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답을 구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확신을 얻고 싶은 것뿐이었다. 막상 그 사람을 만나서 뭐라고 간청을 해야 좋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존이 저리 확신을 가지고 말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역 앞에서 륙색을 고쳐매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사는 마을도 그렇게 시골 동네는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뉴욕에 오니 시골쥐가 된 기분이었다. 사람들의 구둣발에 치이기 전에 플랫폼을 내려와 조금 한산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떠듬떠듬 도시에 있는 표지판을 읽는 것도 잠시, 역 앞에서 머뭇거리던 두 사람을 향해 심상찮은 그림자들이 도사리기 시작했다.
“……!”
이상한 낌새를 먼저 알아차린 건 존이었다. 그가 로저의 소매를 질질 잡아당겼다.
“음?”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퍽 불량해 보이는 남자 세 명이 서 있었다. 존과 로저보다는 키가 훌쩍 컸으나, 성인은 아닌, 청소년 무리였다.
‘아버지가 경고했던 대로야.’
세상에는 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선인들도 많지만, 악인들도 만만찮게 많으며, 악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범인의 작은 악의만으로도 위험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게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어린아이에게 들려주기에는 퍽 음울하고 사나운 구석이 있는 말이었지만, 그런 말을 하는 이안의 눈에 서린 걱정을 보면, 겁을 준다고 욕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범상한 악인.’ 단숨에 불량배 무리의 껄렁껄렁한 행태를 파악한 존은 뒷짐을 지었다.
“애새끼들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우유 심부름하러 역사까지 다 나왔나?”
존은 그들이 대관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읽을 수 없었다. 아마 불량한 얼굴들에 걸맞은 불량한 비속어 때문이리라. 로저가 뚱한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는 존을 막아섰다.
“곧 부모님이 오실 거야. 괜한 시비 걸지 마.”
“어쭈. 차림새를 보아하니 아주 부잣집 도련님들인데 둘이서 다닌다니 참 이상해서 말이야.”
“하. 뭐가 이상한데? 시비 걸지 말랬지.”
그 말에 감정이 상한 듯, 뒤에 선 덩치 큰 불량배가 침을 뱉으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쥐방울만 한 게 어디서 말대꾸야? 가진 거 다 내놔?”
“……!”
‘가진 거 다 내놔라’라는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제법 한산한 시간대인 데다가, 그 누구도 둘이 처한 곤경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주머니 뒤져서 1센트 나올 때마다 푸른 멍을 내주마.”
“…….”
윽. 로저는 겁쟁이가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불리한 싸움이란 건 분명했다. 게다가 존까지 휘말려서 얻어맞게 하기 싫었다. 자기 혼자라면 끝까지 성을 내며 물어뜯을 자신은 있었지만 말이다. 씩씩거리며 주머니에 있는 돈을 내놓으려는 순간, 존이 로저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다른 한 손으로 돈을 갈취하려는 우두머리 격 남자의 손을 내리쳤다.
“뭐야, 이 새끼가!”
한 번에 내리치려는 듯 크게 휘두르는 팔이었다. 존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맞아도, 자기가 맞는 편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초가 흘러도 아프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왜 안 때린담.’
태평한 생각을 하면서도 몸은 달달 떨리고 있다. 그런 존을 일깨운 건 어깨에 전해지는 낯설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얘야. 괜찮니?”
존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 자리에는 스리피스 슈트를 멋들어지게 맞춰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굵은 눈썹에 숱 많은 머리란 건, 아버지와 비슷했으나 풍기는 인상 자체가 한눈에 봐도 달랐다. 무언가 부드러운 눈매에 장난기가 다분히 어린 미소였다.
“아이들만 다니기에는 위험한 곳이야.”
남자의 말에 로저가 뭐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존은 빼꼼 고개를 내밀어 아까의 놈들이 어디 갔는지 확인했다.
“그 녀석들은 뒤꽁무니를 내빼더군.”
찡긋. 윙크를 하는 게 무언가 수상한 느낌이 들어 존의 눈이 더 동그래졌다.
‘누구세요….’
“친구는 내가 아는 사람을 정말 많이 닮았어.”
남자는 존이 정색을 하건 말건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허리를 낮춰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존과 로저에게 각각 건넸다. 마치 회사 1등 영업사원같이 능숙하고 유들유들한 태도였다.
“엔조 라오네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