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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0화. 1939년의 봄(2) (116/121)

외전 10화. 1939년의 봄(2)

‘요즘 선생님들이 네 수업 태도에 대해 걱정하더구나.’

이안의 말에 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다운 자책감이 밀려들어 왔다가, 무서웠다가, 소년다운 반항심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누구를 닮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나름 무던한 아이는 금방 승복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안전하게 놀아라.’

‘…….’

엄한 꾸중을 예상했었는데 그보다는 그냥 가벼운 주의 정도였다. 이게 무슨 일일까 혼란스러운 것도 잠시, 뿌듯한 얼굴의 부모님이 보였다. 

매들린이 살짝 망설이는 얼굴로, 그러나 해야 할 건 결국에 해야 한다는 얼굴로 종이를 내밀었다. 

“너무 급작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래도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곰이 양팔을 펼치며 포효하는 인장 밑에 고풍스러운 글씨체로 ‘세인트 로렌스’라고 적혀 있었다. 

‘학교에요?’

‘그래.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하면 수업을 듣는 것도 괜찮을 거야.’

어…. 존이 할 말을 잃었다. 당장 가을학기에 입학할 수도 있다고, 염려스러우면 좀 더 미뤄도 된다는 부모님의 말이 이어졌다.

기뻤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기쁜 게 맞을 거다. 친구들을 사귀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건 늘 바라마지 않았던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이렇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니 어쩔 줄 모르겠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아직 나는 애송이인가 봐.’

로라가 적어준 말을 되뇌며 고개를 저었다. 왜인지 겁이 나고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사립학교에 가게 된다면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는 걸까? 간신히 사귄 친구들인데 이대로 헤어지기는 싫었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매들린이 고개를 숙여 존의 귓가에 키스했다. 

그리고는 손바닥 위에 웃는 사람 표시를 했다. 

“괜찮아. 천천히 생각해도 돼.”

* * *

- 오늘로써 게릭의 2,130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이 중단되게 되었네요. 안타깝습니다.

- 이번 시즌에 영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감이 있었죠. 컨디션 난조로 보입니다.

- 양키스 팬들은 과히 섭섭하겠군요. 아무튼, 오늘 타이거즈 대 양키스 전 양 팀 선발은….

5월이 6월이 되고 녹음이 우거졌다. 풀 내음도 짙어지고, 아이들은 나날이 키가 커갔다. 존은 제 목소리가 제법 낮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들을 수 없으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키는 착실하게 크는 게 분명했다. 

아버지를 닮았다면 분명히 키가 아주 클 거다. 이사벨 고모는 호언장담하곤 했다. 매들린은 벽 한쪽을 존의 키를 재는 데 할애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키, 갈수록 배트를 휘두르거나 날아오는 공을 잡는 실력도 능숙해졌다. 키키는 계속해서 수풀에 다리를 모으고 앉아 경기를 지켜보았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플래시 고든>이나 <슈퍼맨> 같은 만화 잡지를 돌아가며 읽기도 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존은 로저의 어깨너머로 만화를 보다가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

늘 로저와 함께 있던 키키가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 왜, 재미없어? }

“야! 내 만화책 귀퉁이에 낙서하지 마! 죽을래?”

샌디가 호통을 치자 로저가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 이따 지우개로 지울게.”

“아 정말, 너 임마. 이따 두고 봐.”

존이 냉큼 목에 건 수첩에 답을 끄적였다. 

{ 아니. 케이트가 안 와서. }

{ 몸이 안 좋아. 전식이 심해져서 집에서 시어야 해 }

‘전식? 천식 이야기하는 거겠지?’

아무튼 원체 병약한 아이였던지라 더 물을 건 없었다.

로저는 고개를 한번 까딱인 후 다시 만화책에 시선을 고정했고, 존은 집중하기 어려웠다. 말풍선 안의 활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 *

키키는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의 다음 날도 나오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로저도 자리에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존을 보다못해 로라가 목에 건 수첩을 잡아챘다. 펜까지 뺏은 그녀가 메시지를 휘갈겼다. 

{ 키키가 기분이 안 좋은가 봐. }

“…음?”

누군가가 슬프다, 라는 문장만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그의 표정을 본 로라가 성심껏 한마디 더 써줬다. 

{ 제일 좋아하는 타자가 은퇴했다잖아. }

대충 내용을 조합해보면, 아마 신문에서 읽었던 기사와 관련된 것임이 분명했다.

양키스 간판타자가 원인 모를 불치병으로 인해 은퇴했다는 기사였다. 그 선수가 키키가 제일 좋아하는 선수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일 때문이라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제게 소중한 사람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마음일지도 몰랐다. 가령, 존은 매들린이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면 굉장히 불안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세상의 모든 슬픔과 고난으로부터 지켜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그걸 원하게 된다. 

애착은 언제나 대가를 요구했고, 그래서 무서운 것이었다. 그건 어린 소년이 진지하게 사고하기에는 지나친 주제일 수도 있었으나, 누구나 살면서 언젠가는 배우게 되는 교훈인지도 모른다.

* * *

“요즘 존이 좀 말수가 없네요.”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지 않소? 원래 또래가 더 좋아질 나이지.”

남자가 매들린의 몸을 돌려 눕혔다. 그리고는 성한 팔로 허리를 단단하게 얽더니 꼭 끌어안았다. 단단한 가슴팍과 매들린의 유연한 몸이 맞부딪쳤다. 

“숨 막혀요.”

“당신이야말로 내게 너무 무심한 건 아니고?”

“여기 이사 와서도 계속 출장이나 다니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네요.”

“마음 같아서는 증권가를 여기다 옮겨놓고 싶지만, 그랬다가 이 조용한 동네에 온갖 악덕이 판치게 될 것 같아서.”

“그건 안 될 일이죠. 월가 양복쟁이들이 동네를 들쑤시고 다니면 안 되죠.” 

흥. 이안이 밉지 않다는 듯이 매들린을 곁눈질했다. 

“그런데 당신도 바쁘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재단 일이 어찌 그리 많아.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하는 건지. 에머스트 놈, 역시 무능한 게 맞는 것 같소.”

이안은 틈만 나면 라이오넬을 비난했다. 대놓고 면전에서 욕하지는 않았지만, 뺀질거리는 게 마음에 안 든다나 뭐라나. 그런 것치고 막상 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라이오넬이 이안의 경쟁자 망에서 제외된 이후에는 그냥 이런 식의 핀잔뿐이었다. 

“그런 말 말아요. 다들 열심히라구요.”

“내 앞에서 그 녀석을 변호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그건 그렇고, 이번 여름에는 다 같이 프랑스로 가는 게 어떤가.”

칸느도 좋고, 니스도 좋겠지. 남자가 무언가 꿈꾸듯 매들린의 이마를 손끝으로 간지럽혔다. 

“좋죠.”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같이 시간을 좀 보냈으면 좋겠군.”

그때까지는 장기 출장도 없을 거야. 약속할게. 다소 결연한 말투에 웃음이 나왔다. 

잠시간 시간을 보내고 내려온 1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초여름의 햇살은 이제 제법 강렬해져 얇은 커튼을 쳐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거실에서 소일을 하고 있을 아들이 보이지 않았다. 괜스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존이 아직 안 일어났나 보네.”

아이답지 않게 일찍 일어나는 아이였다. 사실 손이 잘 가는 편이 아니라서 더욱 마음이 쓰였다. 그 나이 또래는 원래 좀, 장난도 치고 짓궂어도 어쩔 수 없는 건데.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매들린도 어렸을 때 그리 장난꾸러기는 아니었다. 산이며 들이며 혼자 뛰어다니기는 했지만, 내성적인 성정인지라 주변 어른들에게는 ‘착하고 내성적이다’라는 이야기를 주로 들어왔다. 

“아직 안 일어난 건가?”

넥타이를 매지 않고, 셔츠에 면바지만 걸쳐 입은 이안은 무척 나른해 보였다. 마치 주말의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는 것처럼 말이다. 평소의 각이 잡힌 모습 대신에 느긋해 보였다. 숱 많은 굵은 눈썹이 살짝 내려가고 입가에는 기분이 좋은 미소가 걸려있는 게 간밤이 좋았던 티를 내는 것 같아서 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존은 아직 안 일어났나 보군.”

이안이 휘적휘적 한쪽 발을 끌면서 주방으로 향했다. 

“뭘 좀 짚고 다니죠? 위험하게.”

“계단에 난간도 있고, 내 집인데 무얼.” 

남자는 매들린의 걱정을 여상히 넘기며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다소 거대한 주방 장치들이었는데, 언제 작동 방법을 배워둔 건지 한번 보고도 곧잘 했다. 

“아침 준비를 같이 합시다.”

사용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다 휴가를 갔다. 이안은 냉장고를 열어서 음식 재료를 꺼냈다. 

“내가 하는 게…?” 

“음? 거창한 걸 하려는 건 아닌데…. 일단 존을 깨워주시오.”

흐트러진 앞머리 하며, 팔뚝까지 걷어붙인 셔츠하며, 완전히 편안해진 모습이 나쁘진 않았다. 

아무튼 이안의 말대로 계단을 다시 올라가며, 존을 어떻게 깨워줄까 생각했다. 열 살 이후로는 늦잠 자는 법이 없어진 아이라, 깨우는 것까지 기대가 되었다. 아이의 방문 앞에 서서 살살 노크했다. 듣지는 못해도 습관이 배어있어서 그랬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

문을 완전히 열자 침대 위로 볼록하게 올라온 이불 더미가 보였다. 

‘아직 꿈나라인가 보네.’

흐뭇하고 귀여운 생각이 들어 다가가 이불에 손을 올리는 순간, 무언가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따뜻한 몸이 아닌, 지나치게 푹신푹신하고 부피감이 없는 촉감. 화들짝 놀라서, 이불을 거두자 그 가짜 부피감의 정체가 나타났다. 

거실 소파에 놓인 베개들이었다.

“……!”

존이 온데간데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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