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화. 1939년의 봄(1)
땅. 배트가 공을 맞히고, 공이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궤적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물론 존은 땅, 하는 타격 소리는 듣지 못한다. 그러나 애초에 크게 신경이 쓰이는 일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거나 허공을 가르는 공의 궤적은 산만하지 않고 아름다웠으며, 그에 맞추어 선수들이 일사불란하게 베이스를 도는 것도 재밌는 광경이었다. 누군가가 분필로 서툴게 그려놓은 경기장 무늬는 거의 다 지워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키키와 존은 풀밭에 앉아 아이들이 야구를 하며 노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키키는 로저처럼 연갈색 머리였으나, 제 오빠와 달리 혈색 없이 창백했다. 식은땀을 이따금 흘리는 모습으로 보아 그리 건강한 것 같지는 않았다.
{ 괜찮아? }
노트에 적힌 질문을 보던 키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답을 아래에 적었다.
{ 오히려 바깥에 나가서 노는 게 천식에 좋대. 집에는 먼지가 많아서. }
asthma. 천식이라는 병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있다. 목이 아픈가보다, 그리 생각했다. 다른 여자아이인 로라는 3루에 서서 수비를 보고 있었다.
{ 너도 놀고 싶지 않아? }
키키가 고개를 기울여 존이 쓴 글귀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녀가 밑에 다시 덧붙였다.
{ 응. 난 야구를 아주 좋아하거든. 그래서 로저 오빠가 날 데려오는 거야. }
그렇구나. 사실, 존은 로저가 알려준 게 아니었더라면 야구가 뭔지 개념적으로만 알고 있었을 거다. 테니스나 골프는 할 줄 알았지만, 여러 명이서 하는 운동은 해본 적이 없으니까.
게다가 부모님은 둘 다 영국에서 왔다고 했다. 그러니 더더욱 야구니 미식축구니 하는 건 모를 수밖에.
로라가 배트를 맞고 날아가는 공을 잽싸게 잡고서는 1루에 선 샌디에게 던졌다.
{ 로라랑 샌디는 처음 만나고선 엄청 싸웠어. 지금은 화해한 것 같아. }
키키가 개미만 한 글씨로 적은 문장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필담을 나누던 차, 샌디가 공을 놓쳤다. 주자가 1루에 들어서는 데 성공하자 로라가 어깨를 으쓱하는 것도 보였다. 성난 몸짓과 입 모양으로 보아 딱히 좋은 소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경기는 해가 지기 전에 금방 끝났다. 원래 진짜 야구는 더 오래 한다고 했지만, 다들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이었다.
로저는 별말 없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존을 내려다봤다. 둘이서 재밌게 잘 놀았냐는 무언의 물음에 존은 잔잔하게 미소만 지었다.
굳이 말로 하기보다는…. 노트에다 인사말을 적고 종이를 주욱 찢어서 로저의 손바닥 안으로 밀어 넣었다.
{ 재밌었어. 고마워. 다음에 또 같이 놀자. }
* * *
존은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돌아왔다. 로저가 제 여동생과 함께 아이를 집 앞까지 데려다줬다.
“고마워. 주스나 에이드라도 마시고 갈래?”
“죄송합니다. 부인. 어머니가 걱정하실 것 같아서요.”
로저는 매들린을 보면 공연히 얼굴을 붉혔다.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부드러운 표정까지, 우아한 구석이 있는 성인 여성을 가까이서 대하는 것이 영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말 천사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앞으로도 존이랑 재밌게 놀면 좋겠구나.”
“그럼요. 재밌었어요.”
로저 옆의 여동생이 배시시 웃으며 하는 말에, 매들린의 마음이 벅차올랐다. 아이고, 어디서 이런 귀여운 녀석들이 나타났을까. 갸륵하고 기특한 마음이 되었다. 뭐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하지만 아이들을 돌려보내야 할 때였다.
“잘 돌아가렴.”
“네. 부인.”
두 사람은 꾸벅 인사를 마치고 사라졌다. 매들린은 그들이 뒤를 돌아보건 말건 손을 흔드는 존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 * *
자기 전,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해줬다. 꿈결에서 오는 것처럼 말이다.
‘즐거운 하루였어.’
‘가끔은 이런 하루가 영원히 계속되지 않을 것 같아서 무서워.’ 문득 든 생각에 아연했다. 왜 그럴까? 존은 어두운 천장을 응시했다. 무서워할 건 하나도 없는데도 이런 생각이 든다니 이상했다.
악몽을 꿔서 밤에 소변 실수를 하거나, 엉엉 운다거나 하는 일은 이제 더 없었지만 자기 직전에 감정이 일렁이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마치 거대한 검은 파도가 해변에 부딪혀 잔 포말을 이루는 것처럼….
눈을 감으면 아이들의 그림자가 보였다. 공이 날아가는 움직임과 힘차게 뛰어가는 로저의 뒷모습, 그리고 키키의 미소가 자꾸만 생각났다.
매일매일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왔던 소년은, 새로운 변화 앞에서 자신이 두려운 건지, 아니면 기쁜 건지 알 수 없었다.
* * *
“베이브 루스야말로 최고의 타자지!”
“헹. 이미 은퇴한 베이브 루스 이야기는 왜 하냐?”
“기대하라고. 양키스 제국의 지배는 계속될 테니까!”
남자애들끼리 말다툼을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로저가 둘을 툭툭 쳤다.
“야, 이런 시시한 걸로 왜 싸우고 그래. 빨리 시작하기나 하자.”
“로저. 그런데 쟤는 며칠째 저기 앉아있기만 하는 거야?”
록웰이 가리킨 곳에는 존과 키키가 있었다. 둘은 무언가 정답게 필담을 나누고 있었다.
“계집애도 아니고, 몸은 멀쩡하다며.”
“말 다 했냐?”
로라가 볼멘소리를 하건 말건 킥킥거리는 록웰을 바라보는 로저의 표정이 복잡했다.
“야구도 모르는데 뭐. 하고 싶으면 이야기하겠지.”
“야. 됐다. 됐고, 빨리 불러. 같이 놀자구!”
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저를 향해 걸어오는 아이를 보며 아이들이 침묵했다.
로저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존에게 손짓, 발짓으로 뜻을 표했다.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시늉을 하며 크게 크게 입을 벌렸다.
“너도 할래?”
“……”
존의 눈이 잠깐 흐려졌다. 무언가 고민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엄마를 닮아 울망울망한 눈이 반짝였다.
“…응.”
고개를 끄덕이는 존을 두고 로저는 저도 모르게 안도한 미소를 지었다.
* * *
“삼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심판을 향해 고개를 저어보지만 번복되는 일은 없었다. 소년들의 시합은 나름 엄정한 규칙이 있었다.
“너무 존이 작은 거 아냐?”
“로저, 네가 데려온 녀석이라고 너무 감싸지는 마.”
상대 팀 선수들이 마구 야유를 시작했다.
결국 존은 시무룩하게 어깨를 축 내리며 타자들이 있는 간이 대기석으로 돌아갔다.
“잘했어. 폼이 좋아. 그보다 넌 투수를 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겠다.”
시무룩한 존과 달리 신나서 한참 떠들던 로저는 자신이 너무 많이 떠들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안해졌다.
“잘했다고.”
로저의 격려 덕분이었는지 다음 공격 회차에는 안타를 칠 수 있었다. 벅찬 마음으로 1루로 뛰어가는데, 기쁜 마음이 너무 커서였을까, 그만 발을 헛디뎌 자빠지고 말았다. 다급한 마음에 다시 일어서서 무릎을 털었는데, 이미 아웃이 되었다고 했다.
“넌 처음 하는 애 봐주지도 않고, 치사하다.”
로저가 3루수인 로라를 향해 뭐라고 핀잔을 하건 말건 로라는 꿋꿋했다.
“미안. 난 원래 봐주면서 하는 법을 몰라.”
기쁜 마음은 눈 녹듯 사라지고, 부끄러운 마음만 가득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상관없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다음 타자가 홈런을 쳤기 때문이었다.
* * *
{ 너도 경기를 하고 싶지 않아? }
다섯 번째로 만나서 놀았을 때였던가, 같이 풀밭에 앉아 노닥거리던 중에 키키에게 던진 물음이었다. 질문을 읽은 아이가 수줍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응. 그런데 나는 너무 숨이 차서 못 뛰어. }
{ 그래? }
{ 하지만 보는 건 좋아하지. 우리 가족은 뉴욕 양키스 팬이거든. }
뉴욕 양키스니, 보스턴 레드삭스니, 요 며칠 집으로 배달오는 신문의 스포츠 코너를 더 유심히 살피기는 했다. 그래서 대충 이름은 외워두고 있는 형편이었다. 아이들과 직접적으로 말을 섞는 일은 없어도,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니 말이다.
{ 어떤 선수가 제일 좋아? }
그 질문에 키키의 수줍은 미소가 해바라기처럼 활짝 피었다.
{ 루 게릭. 우리 팀의 4번이야. }
* * *
{ 노팅엄 군. 집중해요. }
역사 선생님이 적은 경고문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가정교사들은 요새 존의 수업 태도가 불량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원체 성실하고 차분한 아이라 문제행동은 없었으나 이따금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조는 경우가 있었다.
아무래도 아이의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게 아닌가, 선생님들은 한목소리로 모아 이야기했다. 물론, 그렇게 문제가 될 일은 아닐 수도 있었다. 그 나이 또래 애들은 원래 말썽꾸러기인 법이고, 존처럼 차분한 경우가 더 드물었다.
하교한 아이들과 모여 야구를 하며 놀다가 저녁을 먹으러 헤어지는 일과는 꾸준하게 이어졌다. 물론 야구만 하는 건 아니었다. 가끔은 카우보이 놀이를 하겠다고 자기들끼리 막대기를 들고 싸움을 하는 때도 있었다.
각자 돈을 조금씩 가지고 와서 사탕을 사 먹자고 제안하는 때도 있었고 말이다. 그 말을 들으면 존은 저렇게 불량해도 되나, 벌 받는 거 아닌가 싶어 바들바들 떨었다.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별일도 아닐 텐데 말이다.
결국에는 매들린에게 이실직고해서 용돈을 좀 받아낸 것은, 결국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였을지도 모른다.
{ 너희 엄마는 참 좋은 분 같다. }
같이 팝시클을 먹으며 로저가 남긴 메모였다. 그 삐뚤삐뚤한 글씨체 너머로도 부러움이 보이는 것 같았다. 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
1939년의 봄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