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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8화. 친구(2) (114/121)

외전 8화. 친구(2)

-- 이틀 뒤.

“노팅엄 백작 각하 감사합니다.”

이안이 눈을 굴렸다. 이 동네에서 또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저리 정중하게 호칭까지 붙이는 꼬마가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그냥… 아니다. 그냥, 노팅엄 씨라고 부르세요.”

“네.”

그래도 처음처럼 겁을 집어먹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보다는 잔뜩 신이 나있는 것으로 보아 꽤 즐거운 한때를 보낸 모양이었다. 

“안전이 제일 중요한 건 알지요?”

“넵.”

“존은 잘 듣지 못해요. 그런 만큼 주변의 친구들이 존중해줘야 할 부분이 있단 겁니다.” 

로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죠, 미스터 노팅엄. 제 동생도 많이 아파요. 그래도 다 같이 잘 놀거든요.”

이안은 그 모습이 제법 기특한지, 남자아이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어깨가 더 으쓱해진 로저가 존에게 손짓했다. 같이 나가 놀자는 어린아이다운 모습이었다. 존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아이가 이안과 매들린을 올려다보며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어른들 감독 없이 나가도 되냐는 질문이었다. 

‘집 앞에서 놀고, 누누이 말했듯이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따라가면 안 된다.’

‘네.’

존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로저를 따라갔다. 시야에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매들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괜찮아요?”

“걱정할 건 없어 보이는군.”

흠. 벌써 저 꼬마의 뒷조사라도 마친 건지, 느긋한 표정의 남자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그보다, 우리는 밀린 근황을 따라잡을 필요가 있겠어.”

남자가 매들린의 금발에 입술을 묻고 웃었다. 

“고작 며칠 집을 비웠다고 밀린 근황이 쌓였을 리가요.”

“흐음, 그런 것치고는 너무도 즐겁고 재밌었다며.”

“아직까지 그 이야기예요? 장난처럼 던진 말 한마디에 여태 꽁하게 구는 것이 참으로 어른스러운 행동이에요.”

“그러니까 풀어줘요.”

허리를 감싸오는 널찍한 손 위에 제 손바닥을 올려놓고, 매들린이 콧노래를 불렀다. 

* * *

로저를 따라 나가는 존은 무척 두근거렸으나 그런 마음을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보호자 없이는 바깥출입을 해본 전적이 없다는 게 얼마나 웃겨 보일지 아는 탓이었다. 제 나이 또래 애들은 산과 들을 뛰어놀고 위험한 놀이도 거리낌 없이 하곤 했다. 크게 다쳐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야 어른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교육관에 찬성하지 않더라도, 존은 또래와 단둘이 떨어져 있는 상황 자체가 낯설었기 때문에 충분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걸어 나갔을까, 익숙해 보이기만 하던 동네 풍경이 낯설게만 보였다. 그림 같은 목조주택들 사이로 들어가자 뒤편에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다른 아이들 일곱 명 정도가 이미 까불며 놀고 있었다. 

“……!!”

잔뜩 긴장해서 몸이 굳어버린 존을 보고 로저가 괜찮다는 듯 허리를 두드려줬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었다. 

“야! 담장 너머 집에 사는 애 데리고 왔어!”

“오!”

서서 배트를 휘두르던 남자아이 셋, 풀밭에 앉아있던 여자아이 둘이 둘에게로 다가왔다. 

“그 녀석이야? 그 귀머거리?”

“야. 샌디, 너 말조심해라. 네가 뭘 말하는지 저 녀석은 다 꿰뚫어 보는 재주가 있다고.”

“헐….”

앞니 하나가 없는 남자애가 그 소리를 듣고는 쩝쩝 소리와 함께 입을 다물었다. 나머지 애들이 연신 존의 눈치를 보더니, 개중 한 명이 로저에게 작게 속삭였다.

“야, 근데 우리 형이 그러는데, 쟤 아빠가 흡혈귀라던데? 그 예쁜 집에서 살면서, 부인 피를 빨아먹고 산다고 그러던데.”

그 말을 들은 로저가 잽싸게 존의 눈치를 봤지만, 존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새였다. 그저 쭈뼛거리며 눈치를 볼 따름이었다. 

“얌마. 그건 네 형이 뻥친 거야. 노팅엄 경은 내가 직접 뵙고 인사도 했는데 아주 멋진 신사였다고.” 

로저는 나름 또래 무리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대장 같은 격인 모양이었다. 녀석의 웅변에 아이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소년들이 옹기종기 존과 로저 주위로 모여들었다. 존이 전구가 켜진 것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더니, 목에 건 수첩과 연필을 꺼냈다. 나름 생각해서 챙겨온 준비물이 빛을 발할 때였다. 

{ 안녕, 내 이름은 존이야. }

“오오. 엄청 빨리 써.”

애들이 각자 연필을 돌려가며 제 이름을 적었다. 마지막으로 여자 아이 두 명이 이름을 적었다. 키가 크고 마른 아이의 이름은 로라였고, 작은 아이는 키키였다. 

“키키는 내 동생이야. 천식이 심해서 같이 놀고 있어. 발작이 일어나면 내가 돌봐줘야 하거든.”

“안녕.”

창백한 얼굴의 키키를 보노라니 어쩐지 친근감도 들고, 긴장도 풀리는 것 같았다. 한참 떠들썩하니 소개를 마친 아이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놀기 시작했다. 

“야구, 어떻게 하는지 직접 보여줄게.”

* * *

“이안,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게 있어요.”

자리에 앉아 서류에 조심스럽게 서명을 하던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음.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이야기는 아닐 것 같군.”

“그래도 지금 시간 있을 때 서로 말하는 게 낫죠.”

“그래요. 말합시다.”

매들린이 그의 앞에 의자를 당겨와 앉았다. 

“존 말이에요.”

“음.”

“역시 그 아이의 조사를 한 거죠?”

“뭐. 다들 이 마을 사람들이더군. 어차피 먼 데서 노는 것도 아니고, 어른으로서 딱 거기까지 확인해본 거요.”

남자를 치밀하다고 해야 할지, 폐쇄적이고 강박적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겪은 몇 번의 곤경이 남자에게 작은 트라우마를 남긴 게 아닐까 싶어, 그녀는 추궁할 수 없었다. 

“나무라는 건 아닌데, 아이가 학교를 간다면 더 안전하게 또래와 놀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사립학교에 막대한 돈을 기부하면야 입학은 수월할 거요. 존이 잘 적응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좋은 인연을 만날 수도 있는 일이고. 하지만 학교에 가는 일은 고작 동네 친구 한둘 사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하오. 그저 온정에 기대어 중요한 결정을 할 수는 없소.”

남자의 말투는 단호한듯하면서도 종내에는 조심스러웠다. 행여 매들린에게 제 의견을 관철하는 꼴이 될까 저어하는 것이었다. 

“굳이 사립학교일 필요는 없어요. 존이 선택하게 내버려 두자고요.”

“당신의 마음은 알지만, 그 녀석은 어린아이요. 어린아이를 위해서 어른이 내려줘야 하는 결정도 있소.”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그 ‘결정’은 결국 현상 유지잖아요. 가정교사를 부르고, 여기서 대학교 입시를 준비하게 하고. 그게 좋은 결정인지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매들린이 본격적으로 반박 의견을 내자 이안의 침착하고 사려가 깊던 표정도 눈에 띄게 굳어졌다. 아무리 언성을 높이고 서로 말싸움을 해도 이런 불편한 상황에 처하는 것 자체가 남자에게는 제법 부담인 모양이었다. 

눈빛에서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아’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당신은 학교를 모르잖소.”

“……”

“내가 일전에 말했듯이, 청소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짓궂은 존재요. 몇십 년 전이야 아이들이 다쳐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그때에는 많은 것이 거칠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아이가 조금이라도 다치는 걸 지켜볼 용기가 없소.”

“다치고 다시 일어서는 게 바로 성장의 정의예요. 이안, 당신은 내 의견을 왜곡하고 있어요. 나 역시 존이 힘들다고 하면, 싫다고 하면, 밀어붙일 생각은 없으니까요. 게다가 당신이 말했듯이 제대로 된 ‘학교를 다닌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게 중요하단 걸 더 잘 알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저택 안에서 바깥일에 대해 공상하며, 피아노를 치거나 자수를 놓으며 소일하던 시기를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그때도 소중한 시간이었다느니, 그래도 아버지는 날 잘 키워줬다느니 소리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이 늘 있었지만 말이다.

이안이 얼굴을 찌푸렸다. 다시 그 미간 사이의 주름이 움푹 패였다. 살이 내려 가파르고 단단한 턱에 긴장감이 서렸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미안.”

남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철저한 낭패였다. 매들린의 평온한 표정이 그에게는 더 무서웠다. 예전에는 격론을 벌이면 슬퍼하거나 괴로워했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아무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빌어보고 싶게 만든단 말이다. 

“잘못했소.”

“사실인데요, 뭘.”

“…음.”

이안은 이제 미약한 두통이라도 느끼는 건지 작게 끙하는 소리를 내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당신이 이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완전히 바보가 된 기분이야. 아니, 바보가 맞는 건지도. 이안의 주먹을 쥔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아이 놀이가 끝나고 돌아오면, 의사를 물어보도록 하지.”

일종의 백기였다. 매들린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너무 유해진 거 아닌가요?”

“음? 불만이라면, 계속 강경하게 나갈까.”

“아니에요. 그저, 당신이 나의 완벽하고 논리적인 의견에 깨끗하게 승복하게 되어 감개무량할 뿐이죠.”

“어휘가 아주 휘황찬란해지셨군.”

매들린의 장난기 어린 말투에 이안의 굳어있던 표정도 사르르 풀렸다. 그가 팔을 벌렸다. 

“여기 앉아봐요.”

무릎 위를 의미하는 그 제스처에 매들린이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글쎄요. 당신의 연약한 무릎을 생각해서 사양할게요.”

“그러지 말고.”

제법 절절한 눈빛이었다. 그 또한 매들린의 용서를 얻기 위한 남자의 계략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하랴. 매들린은 그의 이런 전술에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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