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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7화. 친구(1) (113/121)

외전 7화. 친구(1)

“으음.”

아침이 밝아왔다. 이안이 매들린의 부드러운 등에 제 얼굴을 묻었다. 날씬하고 유연하게 휜 척추뼈 마디를 코로 가볍게 비비고, 키스했다. 

“…더 자고 싶은데요.”

- 쪽.

“간지러워요.”

매들린이 잠투정을 하자 등 뒤에 닿은 입술이 씩 웃는 게 느껴졌다. 그녀로서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저 양반은 언제 지쳐 떨어지려나. 갈수록 건강해지는 것 같아 무서웠다. 세월을 거스른다고 해야 할지. 반면, 매들린의 체력은 나날이 쇠약해져 갔다.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아직 젊은데도,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 전과 같지 않았다. 숨이 가빴고, 무리하면 후유증이 길었다. 

‘좀 있으면 저이가 날 돌보는 꼴이 되겠어.’ 

이안의 돌봄을 받는 것. 별로 기대되는 일은 아니었다. 일단 어마어마하게 잔소리를 해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둘째 이야기는 순전히 충동적으로 꺼낸 소리였다. 또래를 만난 존이 너무도 신이 나 보여서, 그 기쁨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너무 슬퍼서 나온 소리였다. 또, 저를 껴안고 제법 귀여운 소리를 하는 남편이 기특했고 말이다. 

이안 노팅엄을 귀엽다고 하는 사람은 세상천지에 매들린뿐일 터였다. 처음에는 이안조차 매들린의 귀애함에 거부감을 다분히 표했다. 당연히 대놓고 남편에게 귀엽다고 말하면서 놀린 건 아니었다. 그저 흐뭇한 미소만 지어도 그쪽에서 별로 마뜩잖아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일까. 이안은 커다란 개처럼 서툴게 응석을 부리는 행동을 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하고 나서는 꼭 반응을 기다렸다. 마치 쓰다듬어달라는 듯이.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등에다가 얼굴을 묻는 행동처럼 말이다. 

“나 진지해요. 아침잠이 절실해요.”

“낮에 자도 되잖아.”

“마치 일곱 살 난 심술쟁이 소년처럼 말씀하시네요. 우리 존이 더 어른스럽겠어요.” 

“그래서 특별히 당신의 지도편달이 필요한 거야.”

윽. 볼 안의 여린 살을 깨물며 매들린이 고개를 돌렸다. 돌아본 곳에는 예상외로 진지한 얼굴을 한 채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게 제법 청년 같았다. 

‘시간이 거꾸로 가는 사람인가 봐.’

나이를 거꾸로 먹는 사람에 대한 재밌는 상상을 하며 매들린이 그의 미간을 검지로 쿡쿡 찔렀다. 

“왜? 나 안 찡그리고 있는데.”

“어째요. 이미 평소에 너무 찡그려버릇하셔서, 그랜드캐니언이 생겼어요. 아주, 되돌릴 수가 없어요.”

“…….”

금방 침울해지는 얼굴에 더 놀려줄 마음이 들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남자의 숱 많은 머리칼을 훑으며 타박을 늘어놓았다. 

“여기, 여기 새치가 났네. 새치가. 왜 이쪽에만 나요? 악당 같아요.”

“…….”

정말 이럴 거야? 남자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흐음. 나머지는 뭐, 잘생겨서 봐줄게요.”

“오. 그거참 감개무량하군요.”

예전의 그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처음 춤을 신청하면서 했던 말투 같기도 했다. 

그가 매들린 위로 제 몸을 겹치면서 속삭였다. 뜨거운 피부와 육중하게 박동하는 심장이 그녀를 진동시켰다. 

“내 편에서 변호를 하자면, 이건 다 당신 때문이오.”

“어째서요?”

“그야 이건 당신이 내 말을 듣지 않고, 불쌍한 조지까지 거스르면서 자발적으로 일을 벌인 탓에 생긴 미간 주름이지.” 

…그때의 일을! 매들린의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으나 남자가 더 빨랐다. 그가 연신 버드키스를 날리며 매들린의 퇴로를 차단했다.

“아, 정말 잠 좀 잡시다!”

“내 말 아직 안 끝났소. 그리고 이쪽에만 샌 머리칼은, 당신이 납치당했을 때 생긴 게 분명해.”

“참나. 그런 것치고는 최근에 생긴 거 아니에요? 인과관계가 불분명한데요.”

“충격과 고통이 누적되어서 뒤늦게 발현된 거라고 봐야겠지. 그대가 사경을 몇 번 더 헤매고 나면 나는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을 거요.”

“무섭네요….”

어쩐지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 * *

결국, 황금 같은 아침 시간을 남자와 소일하며 보냈다. 그렇게 옷을 제대로 차려입고 거실로 나오니, 눈부신 햇살이 온 집안을 다 밝히고 있었다. 

좀 민망한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다행히도 저택에서처럼 사용인들이 돌아다니는 형편은 아니었다. 훨씬 작은 공간이었고(그래도 좋은 곳이었지만), 집안을 관리하는 일손도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존은 거실 창문에 손을 대고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던 차, 이안이 슬쩍 매들린의 어깨를 짚고 기댔다. 

“팔 치워요, 무거워요.”

“이상하군. 침실에서 그런 소리는 없었는데.”

“오. 하나님 맙소사.”

남자의 거동만 아니었다면 아프지 않게 찰싹 때렸을지도 모른다. 듣는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낯부끄러운 말을 대낮에 아무렇지 않게 하는 남자가 너무 짓궂었다. 

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어린 존은 눈을 깜빡이며 더 가까이 창문으로 다가갔다. 장밋빛 뺨이 아예 유리창에 딱 붙을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본 매들린의 마음이 철렁했다. 

“친구를 기다리나 봐요.”

“…그 도둑고양이 친구 말이군.”

담장을 몰래 넘어온 게 잘한 일은 아니지만, 이안은 벌써 약간(?)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침입자라면 넌덜머리가 나는 지경이라고 했다. 제이크의 일 때문이란 걸 대충은 눈치챘지만, 더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신사답게 사과도 하고, 가정교육을 잘 받은 것 같더라고요.”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때였다. 존이 뒤를 돌아봤다. 

“잘 주무셨어요.”

어눌하게 들릴 수도 있으나, 혹독한 훈련을 통해 다져진 발성이었다. 아들의 아침 인사에 이안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안이 매들린으로부터 손을 떼고 벽을 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쉬는 날이지?”

매일 가정교사‘들’로부터 다양한 교육을 받는 아이였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도 책을 읽는 녀석이 안쓰러워 일부러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같이 근처의 숲을 산책하거나, 상점가를 돌아다니거나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함께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한지도 모른다. 

존이 고개를 당차게 끄덕이더니, 둘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수화로 말했다. 

‘오늘 밖에 나가도 돼요?’

‘그 친구랑?’

매들린이 야구 모자를 쓰는 시늉을 하자 존의 귀가 새빨개졌다. 

끄덕이는 고갯짓에 예상했다는 듯 매들린이 환하게 웃었다. 그런 그녀를 보는 이안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매들린은 아이를, 이안은 매들린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광경이었다. 

그때였다. 쨍하니 들려오는 벨 소리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 * *

“안녕하세요, 부인.”

꾸벅. 어제의 그 소년은 이번엔 야구 배트와 글러브까지 가지고 왔다. 키는 존보다 훌쩍하니 컸지만,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아이는, 햇살에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눈빛과 입매가 꼭 사고뭉치로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 나이 또래에 어울리는 장난기였다. 

“…그리고 노팅엄 경….”

그러나 지금 아이에게서는 그런 장난기란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 하며 내리깐 눈 하며,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안의 모습에 주눅이 든 건지, 아니면 동네에서 무슨 소문이 도는 건지는 몰라도 그 때문에 무서워하는 건지.

“이름이 로저라고 했던가요.”

“네.”

아이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때, 매들린은 이안이 잠시 웃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제법 따뜻하게 말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웃으려고 노력한 것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나름, 긴장한 아이를 안심하게 하려는 그런 제스처일지도 몰랐다. 

“와서 앉아요.”

매들린이 방긋 웃어 보였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밝게 웃는 이는 바로 존이었다. 매들린을 닮아 순한 눈망울이 잔뜩 휘어져서는 기분 좋게 배시시 미소짓는 것이었다. 

* * *

두 소년이 마당에서 캐치볼을 하는 것을 거실 창문 너머로 지켜보며 차를 마시는 낮은, 꽤 즐거웠다. 

“…….”

“어때요. 잘 놀죠?”

우려했던 것보단 건전하지 않나요? 매들린의 장난스러운 말에 이안이 픽,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매들린, 무언가 오해를 하는 것 같소. 난 존이 행복하길 바랄 뿐인데 이런 식은 좀 서운한데.”

“아, 당신의 진실한 마음을 의심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좀, 긴장을 내려놓을 때도 되었다는 거죠.” 

“내가 지켜야 할 게 당신뿐이었던 시절도 굉장히 버거웠는데.” 

“거기에 한 사람이 더 추가되니 이제 더 힘들다는 거예요? 참, 당신답지 않은 투정이네요.”

흐흐 매들린이 샐쭉하니 곁눈질하며 밉지 않게 웃었다. 

“물론, 당신은 혼자서 잘도 그 말도 안 되는 고비들을 이겨냈지. 솔직히 말해, 그래서 더 분한 것도 있소.” 

“존도 그럴 힘이 있어요.”

“그건 알지. 당신이 낳았잖아.”

“저 아이의 안에 있는 생명력, 활기. 당신 안에서 내가 매번 보는 것들인데요?”

습관처럼 그 말에 반박하려 입을 연 이안이 말을 멈췄다. 창문 너머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햇살을 받으며 기분 좋게 미소짓고 있는 제 얼굴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캐치볼을 하던 아이들은 이제 손짓과 발짓으로 무언가 장황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당신을 현명하다고 했던 건 당연히 진심이었소. 저 아이 역시 내가 지켜줘야만 할 존재는 아니겠지.” 

남자가 한 손으로 매들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집에서는 장갑을 잘 끼지 않아, 화상 흉터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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