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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6화. 이후 노팅엄 가족(2) (112/121)

외전 6화. 이후 노팅엄 가족(2)

“오. 그러면 입 모양을 읽는 거야? 정말 멋지네! 스파이 영화 같다”

‘대관절 ‘스파이’가 뭐지.’ 짐작할 수 없는 말에 존은 눈을 떼굴떼굴 굴렸다. ‘저런 식으로 너무 빠르게 말하면 알아듣기 어렵다고.’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존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걸 알고 나서도 로저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우리 아버지도 거의 귀가 안 들리셔. 전쟁 때 포병이셨걸랑. 대포 소리 때문에 엄청 크게 말해야 뭐라도 들리신대.”

‘포뵤?’ 이건 또 뭐람. 하지만 전쟁은 알았다. 특히 그 ‘전쟁’이라 함은 아버지의 전쟁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그 전쟁에서 아버지는 많이 아팠다. 

‘흐음.’ 눈앞의 존이라는 애송이가 떨떠름해 하는 걸 보니 너무 빠르게 중얼거렸나 싶었다. ‘거참.’ 초대받은 손님 주제에 너무 들떠버린 게 무안하고 미안했다. 되는대로 노트와 연필을 받아서 글을 썼다. 

{ 미안. 나 글시도 잘 못스거든! }

‘글시…. 철자 다 틀렸어….’

하지만 그래도 나름 배려하는 또래 친구의 모습이었다. 존은 그 행동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 괜찮아 네 글씨는 이상하지 않아. }

* * *

응접실 안에는 말없이 연필이 종이 표면을 긁는 소리만 났다. 가끔가다 다음 장을 넘기는 소리도 났다. 무슨 할 말이 저리 많은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열렬하게 필담을 나누는 소년들을 보는 매들린의 기분도 즐거워졌다. 

“괜찮으려나요?” 

뒤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의 가정교사가 매들린을 향해 물었다. 

그 단순한 질문 너머에는 꽤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 어느 집안의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와 존을 같이 어울리게 놔둬도 괜찮은가?

- 이것을 이안이 알면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 로저의 옷을 보니 다소 남루해 보인다, 그리 지체가 높은 집안 출신은 아닌 것 같다 

몇 년 전 전설적인 조종사 린드버그의 아들이 유괴되어 살해된 채로 발견된 사건이 있었다. 아주 끔찍하고 무서운 일로, 그 사건을 접한 이안은 더더욱 방어적이게 된 모양이었다. 

‘물론 그이를 탓할 수는 없어.’

흉흉한 세상이었고, 그 흉흉한 세상에 몇 번 휘말린 전적이 있는 매들린으로서는 그의 트라우마를 더 긁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존이 너무 즐거워 보여서 차마 방해할 수 없었다. 

“쿠키를 좀 더 내와야겠어요.”

매들린이 윙크를 하며 윈저 부인을 안심시켰다.

* * *

출장에서 돌아온 이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매들린을 껴안고 키스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몇 안 되는 사용인과 가정교사를 기겁하게 한 행동이었다. 

‘점잖은 귀족 출신 부부라더니…. 엄마야….’

하지만 이미 다들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나이 때문인지, 이안의 미간에는 인상 주름이 잡혀있었다. 완숙해진 아름다움이라고 해야 할까, 더 멋있어졌다고 생각하지만, 매들린은 입 밖으로 내뱉을 생각은 없었다. 

안부 인사를 마친 후에 이안은 여상히 물었다. 마치 하루 만에 만난 사람처럼 말이다. 

“오늘은 어땠소?”

“간만의 휴식이라 너무- 즐거웠어요.”

그 말을 하며 웃는 아내를 보는 이안의 입술이 비스름하게 기울어졌다. 아랫입술을 살포시 씹는 것이, 어째 좀 불퉁한 그 모습이었다. 결국, 참았던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흐흐”

“웃지 마시오. 내가 없어서 너무 즐겁고, 신이 났다면서.”

살짝 퉁명스러운 듯 낮은 목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히는 것조차 좋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그런 기분 좋은 감각 때문일지도 몰랐다. 매들린이 순간 충동적인 제안을 건넨 것은 말이다. 

“이안,”

“으흠.”

나 아직 화났다는, 그런 무력한(?) 항의의 표시였다. 매들린이 눈을 사근사근 접으며 속삭였다. 

“둘째는 어때요?”

“…….”

그때를 기점으로 이안의 표정이 돌변했다. 노련한 우두머리 늑대 같은 인상이 다시 두드러지며, 냉정한 얼굴이 되었다. 뱉어놓고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다. 

“그 표정은 뭐죠? 좀 서운해지려고 하네요.”

눈썹을 기울이며 나름, 긴장을 풀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남자는 시선을 매들린에게 고정한 채, 요지부동이었다. 미약하게 남자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품에서 벗어나려고 해봐도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말 왜요? 존도 동생이 생기면 좋을 것 같고, 나도 이제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요.”

“당신은 그때 내가 무엇을 봤는지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것 같군.”

이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매들린을 내려다보았다. 죽을 뻔했던 기억은 나지도 않는지 잘도 둘째 이야기를 하다니. 이럴 때마다 화를 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차라리 웃어넘겨야 할지 가늠조차 가질 않았다. 

“…사경을 헤맨 건 나지 당신이 아니-.”

“차라리 그랬으면 편했을 거요.”

남자가 한쪽 팔에서 힘을 빼며 중얼거렸다. 중절모를 벗어 걸어놓고 넥타이를 거칠게 끌렀다. 그는 한숨을 내쉬지도,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감정을 절제하는 지금이 예민했던 십 년 전보다 무게감 있고 강렬했다. 

“당신이 없는 순간은 단 1분 1초도 견디기 싫소. 아. 이건 낭만적인 고백 같은 게 아니오.”

“…마음 상하게 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고요….”

“우리 셋이 잘할 수 있으니까.”

남자가 식탁에 기대섰다. 어쩐지 몸의 피로가 쌓인 기색이었다. 그가 식탁 위에 놓인 컵으로 목을 축였다. 

“우리 아들은 자고 있겠군.”

“오늘 좀 피곤할 거예요. 신나는 하루였을 테니까요.”

신나는 하루? 뭐,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안뿐만 아니라 매들린도 장기출장을 다니는 편이었다. 그러니 어머니와 함께 있는 순간도 꽤 즐거운 일일 터였다. 게다가 존은 엄마를 무척 따르는 아이였다. 그건 효심이라기보다는, 매들린을 편안해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녀는 사람을 쉽사리 놀라게 하거나 보채는 성격이 아니었고, 유순한 존은 그런 그녀의 차분함을 좋아했으니까. 

이안은 그럴 때마다 매들린에게 자신의 순위를 따져 묻고 싶은 충동이 불쑥 튀어나오곤 했으나 어차피 그건 유치한 물음이었다. 

‘…당연히 내가 1순위다.’

이안은 그렇게 그 유치한 물음 이상으로 유치한 답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신나는 하루라. 둘이서 재밌게 놀았단 건 사실이었군.”

이안이 피로 가득한 눈두덩이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누르며 웃었다. 저를 닮아 숱 많은 검은 머리를 한 아이가 매들린과 놀며 즐거워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기분 좋은 이미지였다. 

“네. 존에게 새 친구가 생겼거든요?”

“…음?”

이안이 약간의 의문을 띤 눈초리로 매들린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녀는 무언가 숨기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 * *

“담장을 넘어 왔다라. 남의 사유지를 그렇게 함부로 침입하는 녀석을 믿긴 어렵군.”

“아니, 이안. 사유지 침입이라뇨. 어린아이잖아요. 듣자 하니 야구 놀이를 하다가 공이 담장을 넘었다고 하는데 거짓말 같진 않았어요.” 

“흠. 야구?”

야구. 미국인들이 한다는 운동인 것 같았다. 이안은 집단으로 하는 스포츠를 아주 옛날부터 싫어했다. 혼자서 할 수 있거나, 상대방과 홀로 경쟁할 수 있는 쪽이 좋았다. 집단이 같이 움직이는 건 필요할 땐 해도, 스포츠에서까지 발맞추는 건 조금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미국인들이 하는 ‘미식’축구와 야구는 정말 이상했다…. 전자는 관람하기에는 너무 격렬했고, 후자는 관람하기에 다소 지루한 느낌이었다. 물론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담장을 더 높이거나 다른 조처를 해야겠소. 녀석이 그거 하나는 알려줘서 고맙군.”

“아들이 친구가 생겨서 기쁘다는데 감상이 그것뿐이면 좀 그렇지 않나요?”

매들린은 딱히 화난 기색은 아니었으나, 살짝 얼빠진 기색이 역력했다. 

“일단 녀석의 신원을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되오.”

“…….”

“지나친 걱정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소. 몇 년 전 흉흉한 사건도 있었고 말이야.”

“…….”

“매들린, 화난 건 아니지?”

말없이 시선을 돌린 매들린을 바라보던 이안이 문뜩 굵은 눈썹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렇게 먼저 말 붙이는 재주는 최근에 생겼다. 무언가 의견의 불일치가 생기거나 서로가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을 때마다, 이안은 먼저 화해의 손길을 건네거나 적어도 감정적으로 굴지 않으려고 노력할 줄 알았다. 

이안 노팅엄과 부부생활을 오래 하니, 온갖 변화는 다 구경할 수 있었다. 특히 완고한 성채로만 보였던 이안이 예전처럼 부드럽게, 때로는 귀염성있게 구는 게 자극적이었다. 

“화났다기보다는, 미안해서 그러죠. 당신의 걱정을 이해하니까요.”

“그래. 당신은 날 이해해야 해.”

“로저의 신원만 확실하면 존이랑 놀게 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

이안이 약간 망설이는 모습에서, 매들린은 그의 모순을 발견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었다. 남자는 19세기에 귀족으로 태어난 이였다. 낯선 타인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열린 마음을 가지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매들린도 완전히 개방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안에게는 묘한 보수성이 있었고, 그건 두 사람 다 인지하고 있는 바였다.

“이안, 존에게도 또래 친구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매들린, 나를 속물이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소.”

“상관없어요. 우리 둘 다 그런 면이 있는걸요.”

그리고 매들린은 이안의 그런 면까지 사랑했다. 

“…내가 우려하는 건, 아이들의 순진함이요. 어린아이들은 어른들과 달리 허례허식이 없소. 미덕이지. 하지만 그런 만큼 때로는 거침없이 잔인하게 굴기도 하는 법이요.”

“알아요. 아이들이 존을 놀리거나 잔인하게 굴기도 하겠죠. 그래도 우리가 존을 그런 상처로부터 영영 지켜줄 수는 없어요. 그게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매들린이 이안의 어깨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러자 이안은 고개를 숙여 그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당신은 현명해.”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손등에 입을 맞추던 그가 눈을 치켜떴고, 눈동자에는 묘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런 당신이 내 아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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