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처음부터 다시(4)
“이안! 이리 와봐요.”
모종삽을 들고 쭈그려 앉아 한참 무언가에 몰두하던 매들린이 들뜬 목소리로 이안을 불렀다. 남자는 정원 뒤편의 한적한 공간에 접이식 의자를 펼쳐놓고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러면서 틈틈이 매들린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
“정말, 좀 와보라니까요. 귀찮기는 하겠지만 놀라운 걸 볼 수 있는 기회라고요.”
“그 놀라운 일이라면 캘리포니아에 새로 발견된 광산보다 흥미로워할 거요.”
“죽은 줄 알았던 구근이 살아났어요!”
신문을 읽던 남자는 약간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런 퉁명스러운 행동과 달리 두 발끝은 이미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는 신문을 단숨에 접었다.
요즘 남자는 사는 게 재밌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예전에 잠시 꾸었던 행복한 꿈을 계속 이어 꾸는 기분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두려웠다. 예상하지 못한 행복들이 그를 질식시킬 수도 있었으니까.
꽃다발로 누군가를 숨 막히게 해 살해할 수 있을까? 그는 지금 그런 말도 안 되는 추리소설의 피해자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용의자이기도 했다. 제 손에 묻었던 여자의 뜨거운 피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리 와서 보라니까요.”
“보고 있잖소.”
“어때요.”
“…초록색이군.”
시원스럽게 자라난 푸른색 이파리였다.
“초록색이군? 그것밖에 할 말이 없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네요.”
“사실적시가 아닐까.”
“저는 어쩌자고 감성적인 소양 없는 당신과 결혼을 한 걸까요?”
“…오히려 서로를 보충해줄 수도 있겠지.”
남자의 답지 않은 자기변호에 의아함을 느낀 매들린이 고개를 돌려 위를 올려다봤다. 그가 태양을 등지고 있는 통에 자세한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무언가 우물쭈물하는 투였다.
사업을 할 때에는 무자비한 면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자신이 왜 그렇게 힘들어했는지 잘 모를 일이었다. 물론 본색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말이다.
“다시 피어난 저…것이 작년 봄의 것과 같다고 어떻게 확신하지?”
그러니까 저 은방울꽃 구근이 작년에 피었던 그 꽃과 같은 존재라는 걸 어떻게 아느냐는, 그런 맥아리라곤 영 없는 의문이었다.
남자가 대뜸 던진 질문에 매들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남자가 제 엄지손가락으로 메들린의 눈썹 사이를 꾹 눌렀다. 생각 없이 나온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왜요?”
“그저 헛소리였으니 깊게 생각할 필요 없소.”
남자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정원이 꽤 커졌군.”
그는 장미정원의 크기가 이렇게 불어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매들린은 기억을 찾지도 못한 주제에 벤 호머 노인과 다시 허물없이 친해져서는, 장미정원을 이제 은방울꽃 정원, 튤립 정원 등으로 확장하려는 야심을 공공연하게 표하고 있었다.
겨울을 이겨낸 식물들은 다시 움트고 자라났다. 그들에게 있어 삶과 죽음이란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제 아내를 보면 그런 생명의 놀라움을 비슷하게 느꼈다.
그 사달이 일어난 게 작년 가을이었다. 겨울이 지나 이제 봄이 왔다.
매들린의 뼈와 살이 그렇게 잘 다시 붙어, 이제는 테니스까지 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니 놀라울 지경이었다. 마치 저 위의 신이 굽어살핀 것 같다고 주치의가 혀를 내두르기까지 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봄을 두고, 저승에서 올라온 페르세포네를 재회한 데메테르가 기뻐하는 거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 옛사람들의 순수한 경이에 이제는 제법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려하지 못한 변수는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가령 기억이 햇수로 1년이 지난 후에도 돌아오지 않는다든지, 그리고 여자가 저를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제법 되었다.
물론 그 변수의 당사자는 겉보기에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기에 호수도 만들면 좀 무리하는 걸까요.”
“괜찮겠지.”
“그러면 큰 유리온실도 만들래요. 예전에 그 수정궁만 한 크기로.”
“좋소.”
“오. 그렇게 순순히? 그러면 저기에다가는 베르사유 궁전 앞뜰처럼 작물도 키우고, 사자와 호랑이도 들이죠?”
“그렇게 하시오.”
‘다 해줄 수 있으니까. 다 해주겠소.’
매들린이 어이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제가 무슨 말을 떠들건 간에 순순히 고개만 끄덕이는 남자를 보는 내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듣지도 않고 좋다고 말만 하면 다예요?”
“난 제안하는 입장이 아니오.”
“이혼은 제안했었잖아요?”
그 말을 들은 이안의 표정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언제 부드럽게 풀어졌냐는 듯이 차갑고 핏기없어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여전히 고려해볼 수 있을 거요.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선택할 수 있소.”
“흐음.”
매들린이 고개를 숙였다. 밀짚모자로 인해 그림자가 눈가에 드리워졌다. 이안이 고개를 숙였다. 담배가 절실한데 정원 한가운데서 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암담한 심정을 쉬이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자존심보다는, 눈앞의 여자에게 부담을 지우기는 죽어도 싫었다.
그러나 동시에 못 할 것도 없었다. 지금 매들린은 마치 백지장과 같은 상태였으니까. 약간의 동정심과 부채의식만 얹어준다면 이대로 영영 그녀를 묶어둘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끔 당신은 날 내보내려고 안달인 것 같네요.”
매들린의 그 말은 정말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였다. 어이가 없어서 그냥 할 말조차 잃었다.
‘내가 당신을 여기 붙들어놓기 위해 저질렀던 모든 추태를 안다면 그런 소리는 못 해. 울고 빌고, 윽박지르고 참 추하게도 굴었었지.’
“당신을 내보내려고 안달이었다면, 정원을 허락하지 않았을 거요.”
무언가를 가꾼다는 건 그만큼 그것에 얽매이게 되는 일이었다.
“허락이라. 참…, 감사한 일이네요.”
이런 냉소적인 말투를 보면, 눈앞의 여자는 역시 매들린이 맞았다. 그러나 살짝 비꼬는 어투와는 달리 진심으로 마음이 상한 눈치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코리를 좀 산책시켜야겠어요.”
“어디까지 갈 건가?”
“저기, 마을 앞 실개천까지? 일단은 녀석이 힘닿는 데까지 가볼 생각인데요.”
“혼자서는 위험하지 않나.”
“결혼 전에는, 그러니까 제가 눈을 뜨기 전에는 산이며 들이며 마구 뛰어다니고 그랬는데요, 뭘. 여기 마을은 사람들도 친절한 것 같고 괜찮지 않을까요.”
아버지가 멀리 여행을 가고 없을 때는 몇 시간이고 산책을 했었다. 나름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라는 잔소리 때문에 자중했었지만 말이다.
“친절하다라.”
이안은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약간 재밌어하는 느낌이었다.
“같이 가요.”
“농담이 과하군.”
“…….”
그녀 딴에는 농담이 전혀 아니었는데, 이안의 표정은 냉랭해지다 못해 아예 사라졌다. 아까 전까지의 초조함이나 실망스러움이 아닌, 중립적인 무표정으로 후퇴했다고 해야 할까. 매들린은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그때, 언제 나타난 건지 코리가 매들린의 발치에 나타났다. 뜨끈하고 작은, 털 달린 생명체가 닿아오는 느낌에 기분이 좀 나아진 매들린이 이안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멀리 갈 생각 없으니까 저 앞까지만이라도 같이 가요.”
그녀가 코리와 남자를 데리고 향한 곳은 엉뚱하게도 예배당이 있는 언덕이었다. 매들린은 몸을 떨었다. 서늘하다면 서늘하다고 할 수 있는 날씨였다.
남자는 걷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오히려 매들린보다 훨씬 걸음이 빨랐다. 그저 부자연스럽고 다소 성급하다는 느낌이 들 뿐이었다.
그렇게 예배당 앞에 도착한 매들린은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회반죽 칠을 대충 한 벽, 무언가가 걸렸다가 떨어진 흔적. 오랫동안 방치된 곳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깨끗했다. 영화관의 좌석들처럼 나란히 늘어선 의자.
‘나는 이곳을 알아.’
그리고 일련의 이미지가, 그녀의 머릿속을 폭발시킬 듯 잠식하기 시작했다.
비명과 통증, 자신을 노려보던 박제된 짐승들의 머리가 떠올랐다. 남자가 제게 꽂은 칼날과 자신이 되돌려줬던 이야기들까지.
[네가 죽어도, 내가 죽어도. 이 빌어먹을 흉가가 무너져내려도. 너는 이곳을 못 벗어날 거야.]
“하.”
기억이 돌아오는 순간이 이토록 시시할 줄이야. 매들린은 급격한 실망감과 씁쓸함에 고개를 끄덕였고, 빈 의자에 앉아 고개를 젖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저를 향한 시선을 알 수 있었다.
두개골이 만 갈래로 쪼개지는 느낌에, 그녀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가 이번에도 푹 팬 그 사이를 투박한 손길로 눌러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뒤에 서서 매들린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의식을 잃어가는 그녀를 붙들던 그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매들린이 한참이 지나서야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허망한 표정의 이안이 서 있었다. 매들린은 뭐라도 말하려고 했으나, 목구멍에서는 바람 빠진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돌아갈까요?”
때로는 기억하지 않는 게, 더한 복수가 될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을 뻔히 알고서도, 이안은 매들린의 장단을 맞춰줬다. 그는 다소 성급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지팡이를 다시 짚었다.
그 절박함에 약간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매들린이 지팡이를 짚지 않은 이안의 팔 한쪽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역시 정원에 호수가 필요해요.”
‘그렇지 않나요?’
그렇게 떠들면서. 둘은 저택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