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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화. 처음부터 다시(3) (109/121)

외전 3화. 처음부터 다시(3)

몇 주가 지나고 매들린은 이제 뛰는 건 못해도 천천히 걷거나 외출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런 그녀 옆을 언제나 백작이 지켰다. 치근덕거리거나 과잉보호하는 감은 전혀 없었고 그보다는 신중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도면을 살피는 건축가 같기도 하다가, 가끔은 사무적이라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런 남자의 주도면밀하면서도 거리를 두는 반응에, 갈수록 주눅이 들기도 하고, 서글퍼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서글픔은 사소한 일이었다. 그녀는 지난 10년 치의 세월을 따라잡아야 했고, 거기에는 엄청나게 큰 유럽의 전쟁과 아버지의 죽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백작부인이 되었다는 걸 가장 좋게 생각할 사람은 아버지인데, 몇 년 전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에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리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돌아가셨다니. 한꺼번에 소화해내기에는 너무나 큰 정보였다. 매들린은 한숨을 내쉬고 들이마셨다. 

“미안하오.”

그 말을 전달하는 남편의 얼굴이 더 말이 아니었다. 마치 제가 못 할 짓이라도 저질렀다는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르는 게 진심이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인데, 그가 이제 그녀의 유일한 남아있는 가족이었다. 먼 친척은 있었으나 그렇게 친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이들이었다. 

생각보다 덤덤히 침통한 소식을 받아들이는 아내의 모습에, 백작의 침통한 얼굴이 살짝 알 수 없어졌다. 그가 서둘러 고개를 돌려 발코니 너머 풍경을 바라봤다. 아름다운 장미정원 뒤로 끝없는 맑고 푸르른 영지가 펼쳐져 있었다. 

“장미정원이 정말 예쁘게 잘 가꿔졌네요.”

겉보기에는 무서운 남자인데, 정원을 잘 가꾼 걸 보면 생각보다 아기자기한 취향이 아닐까, 조금이라도 좋은 점을 생각해보려다가 찾은 요소였다. 정원을 언급하자마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당신이 손수 가꾼 거요.”

“제가요?”

응. 남자가 고개를 무의식적으로 끄덕이며 응하는 게 어쩐지 무척 살갑게 느껴졌다. 매들린은 잘 알지도 못하는 그가 제법 좋아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부부였으니까. 이혼이니 뭐니 말을 늘어놓았던 첫 만남이 무척 걸리기는 했으나, 당장은 남자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당신이 어찌나 열과 성을 다해 저걸 가꾸던지. 조금은….”

남자의 입꼬리가 처음으로 슬몃슬몃 위를 향해 올라갔다. 마치 무척 사적인 기억의 자취를 더듬는 것 같았다. 

“저 풀떼기들에 샘이 났을지도 모르지.”

남자는 그렇게 문장을 마치고 나서는, 공연히 멋쩍은 투로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그래도 수습이 안 됐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기까지 했다. 마치 실수했다는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에 무언가 안쓰러워져, 매들린은 그의 팔을 붙잡고 말았다. 

“아.”

“이런, 혹시 제가 아픈 곳을 붙든 건 아니죠?”

화상을 입은 것처럼 성급하게 손을 뗐지만, 올려다본 남자의 얼굴에 더욱 놀라서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단지. 무언가 무척 연약한 구석을 공격당한 것처럼 허를 찔린 무방비한 얼굴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남자의 얼굴 반을 덮은 흉터도, 냉담한 이목구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신은 제 남편이잖아요.”

남자는 잠시 그 상태로 아무 말도 없었다. 긴긴 한숨을 내뱉다가, 미간을 찌푸리고 영지의 지평선을 내다보았다. 그 일련의 행동에 가슴이 철렁였다. 

“이혼 이야기를 하셨죠? 역시 제가 무언가 잘못했던 게 분명해요. 그래서-.”

“당신은 잘못한 게 없소. 오히려 내 문제였지. 젠장. 말할 수밖에 없어.”

“무엇을-.”

“이혼 말이야. 그건 당신이 원한 거였소.”

그의 말에 철렁이던 심장이 이제는 몸 밖으로 튀어나와 발코니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당신이 오랫동안 요구했던 일인데, 공교롭게도 일이 이렇게 되어버릴 때까지 버텨서 미안해. 내가 진작 결심했더라면 애초에 다칠 일도 없었겠지.” 

끝까지 매들린을 바라보지 않은 채로 저 멀리 어딘가를 노려보던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감정적이기보다는 조금 낯선 광경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울 때면 얼굴을 찌푸리거나 볼이 새빨개지는 법인데, 평연한 얼굴로 죽죽 눈물만 흘리고 있는 남자를 보노라니 기분이 이상했다. 

“알아차리는 게 어렵지는 않았을 거야. 나는 영락없이 망가진 인간이오. 전쟁 때문만은 아니야. 번듯하게 회복하기는커녕 갈수록 당신을 힘들게 만들었지.”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술이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거야말로 섣부른 헛소리가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애당초 지금의 그녀가 무슨 권리로 그의 죄를 사한단 말인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해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당신은 계단 밑으로 추락했소.” 

그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남자의 두 눈동자에서 이채가 사라졌다. 한없는 어둠이 내려앉은 초록색 동공이 탁했다.

“설마….”

‘당신이 밀어뜨린 거야?’ 갑자기 오한이 온몸을 엄습했다. ‘지금껏 나는 나를 죽일 뻔한 살인 미수범과 줄곧 함께였던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껏 남자의 행동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을 기민하게 훑던 시선, 억눌린 듯한, 무언가 거리를 두는 시선 같은 것들.

“당신이…? 하지만-.”

“꼭 두 손에 피를 묻혀야만 범죄는 아니지.”

“…….”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가 얽혀있는 건 분명했다. 남자는 무언가 텅 빈, 공허한 눈빛으로 계속해서 소실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용서를 구하려 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늦은 일이오.”

“…참, 이상한 일이네요.”

매들린은 어느새 남자의 시선을 쫓아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지평선이었다. 그저, 서로의 눈을 마주치지 못해서 마지못해 택한 절충안이었다. 

“솔직히. 받아들이기 쉽지는 않아요.”

인정하기 싫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좀 괜찮은 결혼생활이었길 바랐는데요. 줄곧 당신이 망쳤다고는 하지만…. 이런 지경인지는 몰랐어요.”

“왜지? 나는 한눈에 봐도 그리 좋은 남편은 아닌 걸로 보이지 않소.”

농담을 의도한 건지는 몰라도, 남자는 낮게 웃었다. 자조의 웃음이었다. 

“왜요?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어요.”

“한 달 전 당신은 내 속내를 다 들여다봤소. 스스로의 결정에 신뢰를 가지시오.” 

“죄송하지만 전 한 달 전의 제가 아니에요. 그리고 지금 당신이 하는 말도 믿을 수 없고요.”

미묘하게 어긋나며 맞물리지 않는 대화였다. 

어느덧 둘이 바라보고 있는 정경으로 땅거미가 졌다. 불그죽죽해지는 하늘을 등지고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노팅엄 경.”

“…이안이라고 부르는 쪽이 편하겠군.”

그제서야 호칭의 문제를 지적받은 매들린의 볼이 노을만큼 발그랗게 익었다. 하지만 지금은 체면치레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잠깐만요!”

“…….”

“저, 그게… 아무리 그래도 저는 기억나는 게 없는데, 경께서, 아니, 당신은…”

“…….”

매들린이 계속해서 횡설수설하는 동안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 밑에 그늘이 지면서 선 굵은 얼굴에 잔뜩 음영이 졌다. 마치 어둠이 찾아오면 그 속에 섞여 사라질 유령 같았다. 얼결에 붙든 손이, 장갑 너머로도 차가웠다. 의수인 걸까 싶을 정도로 딱딱하기까지 했다. 

“당신은 나쁜 사람 같지 않아요.”

“후회하게 될 거야.”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지금의 전, 전 가진 게 없어요.”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남겨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10년 사이에 천지가 개벽하듯 세상이 바뀌고, 유일한 혈육은 죽었다. 

“당신이 가진 게 왜 없어. 서류로 요구하는 건 다 줄 테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요!”

스스로도 예상치 못하게 내지른 새된 비명에 둘 다 굳었다. 매들린은 눈물범벅이 된 채 두 손바닥으로 젖은 뺨을 훔쳤다. 

“외롭고 무서워요. 친구들도 가족도 없어요. 당신은, 내게 제대로 말도 해주지 않고 무조건 이혼하자고 하고….”

“미안, 매들린, 내가 잘못했어….”

남자가 정말 어울리지 않게 안절부절못하며 허리를 숙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아주 어색하게 주물렀다.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건 사실인 것 같았다. 살 부대끼는 데에 무척 낯설어하는 모습만 보면 말이다. 

그가 하려는 게 위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딴에는 나름 무언가 시도하는 거였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동작이 제법 사람이 하는 위로 같아졌을 때, 매들린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요?”

위험한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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