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처음부터 다시(2)
‘나름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데 질문해도 될까요? 라니….’
그 말이 무언가 장난식으로 들렸는지, 남자의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 되지 않는 선에서 질문해 보시오.”
“누구세요?”
남자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마치 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처럼,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창백하고 무감한 얼굴에서 묘한 긴장감이 떠올랐다. 남자가 천천히 비척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제 와 보니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고수머리의 신사가 안절부절못하며 백작이라는 사람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무슨?”
남자가 떠듬떠듬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이러니까 마치 제가 기억이라도 잃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세상에 그런 일은 소설에서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남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펴봤다. 창의 배치하며, 가구며, 이제 와 눈에 들어오는 거지만 낯설었다. 왼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더 가관이었다. 한쪽 팔뚝이 시퍼런 멍으로 가득했다.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요, 올해가 1916년 맞지요?”
“…….”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매들린을 살벌할 지경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모르는 누군가가 보면 죽이고 싶은 상대방을 보는 것처럼.
매들린은 이제 정말 무서웠다. 아무도 그녀가 원하는 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꿈이고, 당연히 당신은 사교계에 막 데뷔한 촉망받는 숙녀다. 이 악몽에서 깨어나고 나면 런던의 타운하우스일 거고. 당신은 고단하지만 즐거운 일정을 소화하게 될 것이다. 라는 답을 말이다.
“1927년이요.”
“거짓말.”
그 말을 들은 남자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미안하지만, 거짓말 아니오.”
“…거울, 거울 좀 줘요.”
예의고 뭐고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장장 10년에 걸친 시간이 없어졌다. 완전히 사라졌다. 누군가가 일부러 공들여 깨끗이 도려낸 것처럼 말이다. 메이드가 건네준 손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본 매들린의 숨이 잠시 멎었다. 심장이 위장 밑바닥으로 꺼지는 기분이었다.
거울에 비친 건 자신이 맞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윤기가 없어진 머릿결, 앙상한 얼굴, 유령에 쫓기는 것처럼 눈가에 드리워진 그늘. 물론 여전히 젊고, 못생겼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그녀가 알고 있던 제 모습은 아니었다.
그런 비소 같은 침묵을 깬 건 의사였다.
“저, 백작 각하. 부인께서 의식을 차린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지.”
그래. 일시적인 현상이야. 남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백작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형형한 눈으로 절망하는 매들린을 노려볼 따름이었다. 그 앞에서 괜히 죄인이 된 것처럼 눈을 내리깔고 있어야만 했다.
* * *
이게 신의 장난이라면, 그 신이란 양반은 아주 못되어 먹은 존재임이 분명했다. 10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악몽으로 치부할 순 없었다. 고수머리 의사 양반이 예고했던 대로 약효가 가시면서 온 마디와 관절이 각기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아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두 군데 부러져서 나오는 아픔은 아니었다.
의사 왈, 그나마 머리는 다치지 않았는데, 의식상실의 쇼크로 인해 기억을 일시적으로 잃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렇게 한 이틀을 패닉하며 아파했을까, 점점 주어진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쪽으로 판단이 기울었다. 그리고, 이게 꿈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난 기억을 잃은 게 분명해.’
시력도 차츰 돌아오고, 자주 출입하는 사용인들의 얼굴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다들 무척 조심스럽게 매들린을 대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매들린은 죽을 위기에서 살아났다고 했다.
“물론 부인께서 다시 일어나실 거라는 믿음은 있었죠. 백작 각하께서-.”
“저, 아직도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서요.”
한참을 말을 늘어놓던 메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타인을 실망시키는 게 기분 좋을 리는 없었다. 하루빨리 기억을 되찾아야만 이 곤란함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러 사람들이 그녀를 방문했다. 의사, 간호사, 다른 의사, 또 다른 의사 -왜 이렇게 의사들을 많이 부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 사용인, 여자 사용인, 그리고 백작.
이름도 모르는 백작은 그녀를 하루에 한 번씩 보러 왔다. 매들린은 그가 올 때마다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해보았는데, 한 사흘째가 되자 그것도 진이 빠졌다. 한참 동안 제게 시선이 얽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데, 괜히 미안하고 마음이 안 좋았던 것이다.
“아, 못 참겠다.”
그래서 중얼거리고 말았다. 자는 척하다가 별안간 번뜩 두 눈을 치켜뜬 매들린을 보고 남자가 살짝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러나 크게 놀라지는 않는 모습에 무언가 비범하다 싶었다.
흠흠. 매들린이 목청을 가다듬고 가지고 있는 용기란 용기는 다 끌어다 모아 실토했다.
“며칠이 지났는데 기억나는 게 없어요. 그러니 뭐라도 좀 알려주셔야겠어요.”
“…언제나 물어볼 기회는 있었소. 당신이 자고 있어서, 나는….”
무척 낮은데도 어쩐지 버석이는 건조한 목소리에 마음이 더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이건 남자의 잘못만도 아니었다.
“이름을 알려주세요. 당신이 제 남편이지요?”
가까이서 올려다본 남자의 얼굴은 첫인상만큼 흉측하지는 않았다. 일단 매일 저를 찾아와 차도를 살피고 얇은 크리스탈로 된 조각상인 것처럼 소중하게 대한다는 것, 그리고 사용인들이 하는 대화를 귀동냥한 걸로 보아 그는 무척이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무슨 불운하고 슬픈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그래도 그녀가 선택해서 결혼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무슨 미덕이나 상호 간의 애정이 있지 않았을 리 없었다(감히 ‘사랑’이라는 말을 꺼내기에는 아직 주눅 든 상태였다).
“…아직까지는… 아니, 맞소. 우리는 결혼한 사이요.”
남자의 목소리가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내 이름은 이안 노팅엄-.”
“정말요?”
아, 기시감의 정체를 해결한 매들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숙녀답지 않은 상스러운 욕이 나올 지경으로 아팠지만, 그보다 반가움이 더 컸다.
“제가 당신과 결혼을 했다고요?”
남자의 안 그래도 혈색 없는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런던 사교계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지만, 이름만큼은 족히 들어왔거든요.”
끝내줄 정도로 미남자라느니, 집안이 무척 부유하다느니 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그런 남자가 지금은 이렇게 자신의 남편이 되어있다니…. 게다가 흉악한 일까지 당해서는. 1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 의문만 가득해졌다.
* * *
세바스천은 두 사람의 대화를 불안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화려한 식탁에는 단 두 사람뿐이었다. 검은 드레스를 상복처럼 걸쳐 입은 마리아나 노팅엄 선대 백작부인과 죽었다 일어난 뱀파이어처럼 보이는 남자가 늦은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왜 주저하는지 모르겠구나.”
선대 백작부인은 슬픔으로 지쳐있었다. 남편과 두 자식을 잃고, 남은 유일한 자식마저 어둠의 구렁텅이로 가는 걸 보는 건 죽음보다 힘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방관했다. 이안의 결혼생활이 파국으로 굴러떨어져 가고, 며느리가 괴로워하는 걸 보면서도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주저하는 게 아닙니다. 시간이 필요한 거예요.”
‘그 사람은 기억을 잃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아니야. 너는…. 설마, 이안. 내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다오.”
“…….”
“이건 기회가 아니야. 네가 그 애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내가 할 수밖에 없어.”
답지 않게 노기등등한 어머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남자는 약간의 억눌린 미소를 지었다.
“사실을 말하지 않는 건 거짓말과는 다르지요.”
“실망스럽구나. 타인의 아픔은 기회 같은 게 아니다.”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모든 게 정리되면 올바른 일을, 할 거니까요.”
그래야 인간이니까. 물론 이안 노팅엄은 그 사실이 이제 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인간이었나?’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아주 멀게, 혹은 가까이 느껴지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는 분명히. 무수히 명멸하는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에서 예술이니 정치니 하릴없이 떠들고, 여자들과 춤을 추다가 유한계급의 인생을 누리는 게 인간다운 삶이라면 말이다.
전쟁 때 포탄 충격에 빠져 저처럼 영영 헤어나오지 못한 일병이 있었다. 그는 몸을 덜덜 떨면서 한마디 말밖에 하지 못했다.
[블루벨, 블루벨, 블루벨.]
며칠 뒤 죽은 그의 어머니에게 보낼 편지를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의 집안은 대대로 저택의 농원을 관리해왔다고 했다. 누구나 인간 이하로 추락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 두 손에 꼭 쥐고 놓지 않는 건, 언제나 그때를 추억하는 무언가다. 그런 무언가가 제게는 사람의 형태였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 이건 기회 같은 게 아니다. 유예된 사형선고에 가까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