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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화. 처음부터 다시(1) (107/121)

외전 1화. 처음부터 다시(1)

-- ‘나는 누구고 이곳은 어디인가.’ 

언뜻 아이러니하고 본질적이며, 또한 지극히 철학적인 선언처럼 들리는 이 질문에는 문자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었다. 그러니까 매들린은 정말로, 자신이 누구인지, 그런 자신이 눈을 뜬 이곳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누워있는 제 시야에 들어오는 크림색 천장과 온몸을 내리 짓누르는 몸쓸 통증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가장 기분 나쁜 건 멍한 뇌리였다. 

예를 들어 지독하게 긴 꿈을 꿀 때처럼, 그 꿈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헤매는 때 같았다. 

‘역시 꿈인가.’

이게 정말 꿈이라면, 세상 지독하게 재미없고 얼빠진 꿈임이 분명했다. 데뷔탕트를 앞두고 지나치게 긴장했던 탓인지, 아니면 런던 타운하우스의 잠자리가 편하지 못했는지 매들린은 불투명한 막을 씌운 것처럼 흐린 시야를 돌려보며 생각했다. 진통제를 무지막지하게 맞기라도 한 듯이 몽롱한 감각도 그렇고, 수중에서 들리는 것 마냥 낮게 윙윙거리는 소리도 거슬렸다. 

“거기 누구 없어요?” 

- 부인께서 눈을 떴어요!

- 당장 백작 각하를 불러라!

‘…음? 부인이라고?’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간신히 떠올린 기억에 따르면, 매들린은 엊그제 분명 데뷔탕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녀의 후견인인 후작부인마저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고 평가할 만한, 그런 데뷔였다.

물론 후작부인은 칭찬만 하는 법은 없었다. 화장이 시류에 맞지 않게 촌스러웠다는 둥, 드레스 세 벌은 새로 사야한다는 둥 미운 소리 몇 개를 덧붙이는 건 용케 잊지 않았다. 뭐, 그렇다 해도 원체 깐깐하기 짝이 없는 친척이 그렇게 이야기해줬다는 건, 분명히 긍정적인 신호라 할 수 있었다. 

매사 주눅 든 매들린조차도 그 칭찬을 듣고 들떠서, 이제 번듯하고 멋진 신사를 만나 제대로된 결혼을 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물론 브론테 자매의 소설들에 나오는 것처럼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아무리 매들린이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골 귀족의 딸이라 하더라도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흘 만에 사랑에 빠져 동반 자살하는 이야기에 공감할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매들린 같은 시골 귀족 출신 아가씨들에게 사교계는 런던의 멋쟁이들에게처럼 마냥 놀고먹는 곳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영지 일부를 팔아 마련해놓은 타운하우스와 여벌의 드레스, 후작부인의 ‘서비스’까지 모든 게 투자였다. 게다가 수확 없이 세 시즌을 보내고 나면 꼼짝없이 노처녀 신세. 그러니 들뜨는 것과 별개로 어느 정도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세기가 바뀌면서 자유연애 바람이 불었지만, 그 바람은 매들린 로엔필드가 사는 한적한 교외의 영지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여전히 런던은 ‘그들의 세상’이었고, 매들린은 무남독녀의 부유하지 못한 귀족의 딸로서 결혼에 많은 것을 걸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설렘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불같은 격정적인 연애에 대한 갈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잔잔하고 따듯한 사랑에 대한 희망은 있었다. 

그러니까, 제인 오스틴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저를 이해해주고 대화가 통하는 친구 같은 사람과 알콩달콩 다디단 신혼을 보내다가 서로를 조금씩 닮은 아이를 낳고 행복하고 무탈한 인생을 보내길 원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아무튼 결론은 그래서 그런지 후작부인의 떨떠름한 칭찬에도 나는 듯이 기분이 좋았단 거다. 이제 최선을 다해 -어디 있는지 당최 모를- 자신의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 앞으로는 모든 파티와 차회와 무도회에 빠짐없이 참석하겠어. 사람들에게 늘 친절하고 상냥하게 굴고, 열심히 이야기를 들어줘야지. 그렇다고 지나치게 나서서는 안 돼.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말 많은 여자는 최악이니까. 그렇게 노력해서 최고의 신랑감을 찾아 결혼하겠어. 그리 결심하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렇게 새벽에 겨우 잠이 들었다 일어났는데, 런던 타운하우스가 아니라 웬 낯선 방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아버지?”

웅웅웅.

수조에 잠긴 것처럼 시야도 흐렸고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눈을 찌푸리며 뭐라도 보려고 노력했으나 헛수고였다.

“도릿? 도릿, 어딨어요?” 

“부인, 아직 모르핀의 약효가 남아있으니 진정하시지요.”

드디어 알아먹을 수 있는 말소리가 들렸다. 매들린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무척 염려스러운 표정의 신사가 있었다. 고수머리를 대충 뒤로 넘기고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전혀 모르는 남자였다. 

“누구세요?”

“부인,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은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저, 제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부인은-.”

무언가 말을 더 하려던 신사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가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사흘간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헉.”

머리가 팽팽 돌고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 묘한 꿈의 의미는 무엇일까? 

“앤 매리, 일단 백작 각하를 빨리 불러요.”

남자가 옆에 선 여자를 향해 말했다. 말을 돌리려는 건지, 그는 앉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매들린은 그에게 몇 마디 말이라도 붙이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으나,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몽롱했던 의식이 점차 명료해지면서, 온몸의 통증이 점점 격해졌다. 

“아파…”

“죄송합니다. 부인. 이이상 모르핀을 투여할 순 없어서…. 잠시만 기다리시면 부군을 뵐 수 있을 겁니다.”

“부군이요?”

“…….”

남자의 표정이 대놓고 착잡해졌다. 무언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더니, 완전히 자리를 떴다. 

“백작 각하는 어디 계신가?”

백작인지 뭔지 하는 사람을 부르면서 말이다. 매들린은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공작-지금 영국에 몇 안 되지만 여전히 존재하긴 한다-이니 백작이니 후작이니 하는 사람들을 모르고 지낸 건 아닌데,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친분이지 매들린이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는 종종 지체 높거나 유명한 사람들을 저택 안으로 불러들여 호사스럽게 대접하는 걸 즐기곤 했다. 물론 그렇게 즐기고 나면 며칠은 식사가 궁색해졌다. 

다행히도 매들린이 머리를 굴릴 새도 없이 누군가가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여전히 시력이 온전하게 회복되지 않은 매들린이 보기에는 그저 거무스름한 탄 자국 같은 검은 인영이었다. 

문가에 비뚜름하게 서서 저를 지켜보는 것만은 확실한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좌중의 공기가 빠르게 경색되는 건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모르핀이라고 했던 약의 후유증과, 낯선 상황에 얼떨떨한 것과 별개로 매들린은 분위기를 읽는 데에는 밝은 편이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뻣뻣하게 굳어있는 게 느껴졌다. 

‘이 사람이 백작인가 봐.’

그렇게 얼빠진 채, 미간을 찌푸리고 그림자를 노려봤다. 그림자도 그녀를 노려봤다. 

“백작 각하, 부인께서 일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몇 시간은 더 안정을 취해야 할 것으로 보입-.”

“비키시오.”

음. 정말 낮은 목소리네. 매들린은 그렇게 제3자라도 되는 양 무연한 감상을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그 그림자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면서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남자가 점점 다가오면서, 그의 모습도 분명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한쪽 발이, 그러니까, 무언가 이상했다. 전체적으로 키도 크고 어깨도 넓은데, 좌우 균형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문제는 아니었다. 얼굴이, 얼굴의 반이 흉터로 가득했다. 그것도 화상흉터로!

“으윽….”

낯선 타인의 외모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내는 건 정말 숙녀로서 하면 안 되는 무례한 짓거리라는 걸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웅얼거림을 내뱉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체면치레할 정신머리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방이 밝고 사람들이 많아서 다행이지, 남자와 단둘이 있었다면 무조건적으로 악몽이라 생각하고 비명을 질러버렸을 것이다. 

“…….”

매들린의 미약한 거부반응을 눈치챈 듯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더는 무서워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표정이 더 냉담해지고, 비웃음 같은 게 멀쩡한 쪽 입가에 걸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원래 이렇게 무례한 사람은 아닌데. 하지만 전 그쪽을 알지도 못하고, 이곳이 어딘지 그 누구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단 말이에요. 제가 어떻게 반응하길 기대하신 건지….’

궁색한 변명은 당연히 나오지도 않았다. 남자가 그런 매들린 앞에 서서 말했다.

“당신이 원한 이혼, 해주리다.”

“…네?”

“걱정 마시오. 위자료와 재산은 모자람 없이 나누겠소. 당신이 여생을 ‘자유’롭게 살 정도는 될 거요.”

“…무슨….”

“그러니, 지금은 어쩔 수 없더라도 먼 훗날에는….”

전혀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던 남자가 그녀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상처 입지 않은 한쪽 얼굴을 보니 누군가가 생각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쪽만 보면 무척 수려하지 싶은 얼굴. 아니, 그보다 갑자기 이혼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나를 너무 미워하지 않길 바라오.”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연설을 마친 정치인처럼 그렇게 유려하게 말하던 남자가 숨을 멈췄다. 그것과 함께 모든 생명이 빠져나간 것처럼 파리하고 창백한 얼굴로 매들린을 한 번 더 바라봤다.

‘겁먹은 것 같네.’

물론 겁먹어야 할 건 당연히 매들린이었다. 처음 보는 백작이라는 남정네가 갑자기 이혼이라느니 미워하지 말라느니 하는데 무섭고도 남아야 했다. 

“저기요.”

“…붙일 조건이 더 있다면, 나중에-.”

“조건이 아니라, 질문을 하고 싶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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