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오로지 당신과 함께 살기 위해서
“조니!”
불러도 못 듣는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오롯이 자신을 위해서다. 라이오넬은 쓰게 웃으며 남자아이에게로 다가갔다. 바람의 방향이 달라진 걸 느꼈는지, 마당에서 풀을 뜯으며 놀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칼에 붉은 장밋빛 뺨,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
거짓말처럼 매들린과 이안을 반반씩 닮은 아이였다. 매들린의 순진해 보이는 미소와 이안의 예리한 눈을 가진 아이. 미국에서 손꼽히는 가문의 후계자이면서 동시에 한없이 밝기만 한 어린아이였다.
‘삼촌.’
빠른 손짓으로 말하는 걸 알아들은 라이오넬이 크게 입모양과 수화로 말했다.
‘부모님은 안에 계시지?’
‘네!’
강아지처럼 빨빨거리며 제 바짓가랑이를 잡는 소년의 모습에 남자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안 그래도 아이에게 줄 부활절 선물을 잔뜩 준비했는데 좋아할 반응이 선연했다.
함께 현관문 안으로 들어가자 매들린이 탁자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는 게 보였다.
우아하게 묶어올린 머리, 이지적이고 섬세한 이목구비. 창에서 비스듬하게 들어오는 햇살을 받는 모습이 마치 옛 대가들의 그림 같았다. 참, 이상한 여자였다. 갈수록 지성으로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게 말이다.
그녀가 서류를 조심스럽게 다른 곳으로 둔 다음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리고 수화로 말했다.
‘배고프지?’
존이 눈을 깜빡였다.
‘네. 이제 손님도 왔으니 쿠키 먹어도 되는 거예요?’
갑자기 매들린의 표정이 살짝 엄격해졌다. 그 모습을 본 어린 조니가 풀이 죽자 라이오넬이 몰래 속삭이며 말했다.
“그냥 줘. 애기 슬퍼하잖아.”
“속지 마. 존은 이미 두 시간 전에 토피넛 쿠키를 해치웠다고.”
‘많이 안 먹었잖아요.’
말없이도 소란스러웠다.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역설적으로 복닥거리는 기운으로 가득한 방은 활기가 넘쳤다.
“너무 자주 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쿠키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세 사람의 대화에 찬물을 끼얹은 건 이안이었다. 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라이오넬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물론 그의 명령을 남자가 들을 리 없었다.
“저 백작 각하, 난 일하러 왔어. 재단 이사잖아.”
“…….”
됐다는 듯이 손을 한번 내저은 뒤, 이안은 매들린 옆자리에 앉았다. 여기서 감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속으로 혀를 찬 라이오넬이 응수했다.
“아들 좀 봐줘. 나랑 노팅엄 여사님은 ‘일’ 해야 하거든.”
재단 일이라면 또 상을 선정하는 시간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정말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었지만, 매들린이 가장 신중히 처리하는 일이 바로 이 시상식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이안이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쿠키 욕심으로 눈이 땡그란 아들에게 말했다.
‘아빠랑 놀까?’
눈을 살짝 굴리면서 실망하는 아들의 모습에 이안은 새삼스레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하지만 존은 과하게 착했고, 놀아드린다는, 지극히 효자의 마음가짐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과 아들이 방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보며 라이오넬이 혀를 끌끌 찼다.
“누가 애인 거야. 걱정된다. 정말.”
“왜. 나처럼 사기당할까 봐?”
“흥. 본론으로 들어가기나 하자고.”
서류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사진과 종이 더미를 꺼낸 라이오넬이 설명을 시작했다. 심사위원단이 고른 후보군이었다.
“어차피 내게는 결정권이 없잖아.”
“그래도. 미리 알아는 두셔야지.”
흑백 사진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매들린은 이내 말수를 잃었다.
“…….”
“기분 좋은 광경들은 아니지. 알아.”
사진 속에 담긴 세계의 모습은 비참하고 또 혼란스러웠다. 그것들을 말없이 바라보는 눈빛이 고단했다.
그러다 매들린은 한 사진을 보고 얼어붙고 말았다.
“…제이크.”
스페인에서 일어난 전쟁에 참전한 국제여단 소속 병사를 담은 사진이었다. 총에 맞아 쓰러지는 병사의 모습을 본 매들린이 소스라치게 놀라자, 걱정스러워진 라이오넬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 보기 힘든 장면이긴 해. 그만하자-.”
“…아니야. 봐야 해.”
나는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어. 매들린은 조심스럽게 사진을 내려놓았다. 피투성이 제이크는, 결국 타지에서 숨을 거뒀다. 적어도 그는 자신이 믿는 바를 끝까지 따라간 셈이었다.
그가 밤을 새워가며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매들린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지 오래였으나 그녀는 남자의 그 불타오르는 눈빛을 기억했다. 역사는 탐욕스러운 검은 밤이었고 사람들은 별처럼 제 몸을 불태우며 그 한없는 어둠을 밝혔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아침이 찾아왔다.
* * *
세 가족이 영화관을 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존이 어리기도 하거니와, 세 사람의 취향에 맞는 영화를 찾기도 어려웠고, 이안이 영화나 연속극에 무관심한 탓이었다. 게다가 전생에서 이안이 쇼크로 쓰러진 걸 본 매들린은 영화관에 가는 것 자체가 어쩐지 꺼림칙했다.
‘꼭 보고 싶어요. 제발요. 잔디도 깎고 코리도 산책시킬게요.’
코리는 얼마 전 키우기 시작한 강아지였다. 얼어 죽어가고 있는 강아지를, 같이 길을 가던 존과 매들린이 데려와 얼떨결에 가족 구성원에 추가되었다. 이름을 코리라고 붙인 거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 코리를 봤을 때 이안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러다가 세상천지 도로변에 있는 강아지들 다 데려오겠다며 존 모르게 매들린에게 잔소리했다. 지금은 코리가 가장 사랑하는 게 이안이었지만.
아무튼 새로 개봉한 ‘오즈의 마법사’를 보고 싶다며 답지 않게 우는소리를 하는 아들만 아니었다면 절대 영화관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매들린도, 이안도 말이다.
그래도 세 사람은 영화관을 찾았다.
눈이 초롱초롱해져서는 이리저리 둘러보는 아들이 사랑스러웠다. 이안으로서는 정말 감회가 새로웠다. 매들린을 고생하게 했을 때는 그렇게 원망스러웠는데, 지금은 이렇게 가족으로 이어져 있다는 게 좋았다. 그저, ‘좋았다’라는 허무한 감상으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 가족을, 매들린과 함께 이룰 수 있어서… 역시 좋았다.
영화관에서 표를 보여주려는 매들린에게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왜요?”
“한 타임. 다.”
아주 많은 정보가 생략된 문장이었지만 알아듣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매들린이 힉, 숨을 멈추며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영화관을 통째로…”
“빌렸소. 어차피 이 시간대에는 운영 안 하던 걸 억지로 했어. 아냐. 우는 아이 티켓 강제로 뺏은 거 아니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오.”
“…참….”
“…?”
제 엄마랑 똑같은 얼굴로 궁금해하는 존을 보며 이안이 쉿,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오즈의 마법사. 잿빛 세상이 일순 수만 가지 아름다운 무지개색으로 번쩍이는 장면에, 매들린은 숨을 멈췄다. 흑백 영화만 봤던지라 낯설고 황홀하기까지 한 경험이었다.
관객석에는 오로지 이안과, 존, 그리고 자신뿐인데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존은 그걸 보고 꺄르르 웃었다. 화면 밑에 크게 적힌 자막의 반은 못 알아보고 넘어가겠지만 그저 주인공들의 모험만 봐도 신나는 투였다.
노래의 선율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가운데, 매들린은 이안을 바라봤다. 영화보다는 그 영화를 보는 두 사람을 보는 게 더 좋았다. 둘 다 하염없이 진지한 모습으로 은막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다가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마치 처음부터 매들린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단 걸 아는 눈치였다.
그가 웃었다.
“난 언제나 영화보다는 삶이 더 좋아.”
“그래요?”
“그래. 언제나. 비루하고 고된 일도 많지만, 영화에는 당신이 없잖아.”
“…….”
매들린이 활짝 웃었다.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내 계략이 성공했군. 고백은 암살이 아니라던데, 거의 비슷하긴 하지 않나.”
* * *
얼마 후 큰 전쟁이 일어났다. 유럽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화마에 빠뜨릴 전쟁이었다. 매들린은 앞으로 목숨을 잃을 젊은이들과 그들의 가족이. 또 희생당할 어린아이들과 약자들이 걱정되어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녀는 이안을 걱정했다. 지금 곱게 감긴 남자의 눈꺼풀 너머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다. 그는 여전히 전쟁의 꿈을 꿀까?
“…….”
침대에 누워 자는 줄 알았던 이안이 눈을 떴다.
“무슨 생각해, 당신.”
“궁금해서요.”
“…….”
“악몽, 요즘도 꿔요?”
전생에서, 제 손을 붙잡고 죽은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울던 남자가 떠올랐다. 그때 뿌리치지 못해서 이렇게 긴긴 길을 왔구나 싶었다. 그러나 그 역시 즐거운 여행이었다.
“…난.”
남자가 한숨처럼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난 당신 꿈을 꿔.”
이안은 다시 눈을 감았다. 매들린이 작게 웃으면서 잘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잘 때도, 눈을 뜰 때도. 당신의 꿈을 꿔. 나는 당신의 꿈속에서 살아. 그래서 이제 삶을 알았지. 숨 쉬는 법과 심장을 움직이게 하는 법을 배웠지. 오로지 당신과 함께 살기 위해서.’
그가 말하지 못한 말들은 부유하다가 잔잔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깨달음은 영영 잊을 수 없다.
그날 밤 이안은 꿈을 꿨다.
남자의 꿈속, 밤하늘은 컴컴하지 않았다. 찬란한 은하수가 검은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그러나 별들은 남자의 시선을 잡지 못했다. 그는 달이 좋았다.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햇빛을 받을 뿐이라지만, 세상 그 어떤 피조물보다 우아한 밤의 여왕을 사랑했다.
달은 그 마음을 아는 듯 이안에게 아낌없이 빛과 그림자를 내려주었다. 사랑과 슬픔, 행복까지 전부 알려주었다.
보답받는 마음이 좋아서, 그는 꿈속에서 조금 울었는지도 모른다.
* * *
--그러니 죽음이 결코 지배하지 못하리라.
벌거벗은 죽은 사람은
바람과 서쪽 달에 사는 사람과 하나 되리라.
뼈가 깨끗이 뜯기고 깨끗한 뼈마저 사라지면,
팔꿈치와 발에 별들이 붙으리라.
그리고 미칠지라도 모두 온전해질 것이며,
바다에 가라앉더라도 다시 솟구치리라.
또 연인을 잃어도 사랑은 잃지 않으리라.
그러니 죽음이 결코 지배하지 못하리라.
딜런 토마스, <그러나 결코 죽음이 지배하지 못하리라> 中
- <구원 방정식> 본편 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