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아름다운 당신을
몇 번이고 사경을 헤맸지만, 그때마다 매들린은 삶으로 돌아왔다. 너의 차례가 아니라고, 지금 죽는 건 너여서는 안 된다고, 욕심껏 제 손목을 잡아 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에게 어째서냐고 물었다. 이제 그만 쉬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너를 사랑해. 너를 사랑해…]
* * *
매들린은 눈을 떴을 때 어쩐지 평온한 기분이었다. 죽음은 아니다. 하지만 죽었다. 모순이야? 하지만 이 세상의 많은 진실은 모순적이다. 힘없이 고개를 돌려 이안을 봤다. 그가 웃고 있었고 또 울고 있었다. ‘모순인가?’
그녀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이는요…?”
이안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얼굴이 창백해서 흉터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
“……!”
남자의 침묵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보다, 너무 추웠다.
‘왜 이렇게 추운 거지.’
온몸에 한기가 들었다. 매들린이 어금니를 부딪치며 몸을 떨자 이안이 그녀의 손목을 더 거세게 붙잡았다.
“괜찮소?”
“…어쩔 수 없죠.”
물론 거짓말이었다. 어쩔 수 없죠, 괜찮아요, 하나도 진심이 아니었다. 예상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몇 달간 행복했으니까.
저택에서 비명을 지를 때, 이안이 의사에게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아이는 괜찮아, 그녀부터.]
매들린의 눈가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던 남자가 당황한 듯 안절부절못했다.
“의사를,”
“괜찮아요.”
“그래, 매들린. 푹 쉬시오. 엄마가 건강해야 아들도 힘을 내지.”
“네?!”
비극적으로 눈물을 흘리던 매들린이 갑자기 크게 호통치듯 소리를 내자 이안의 몸이 굳었다. 그가 삐걱거리면서까지 당황하는 건 처음 보았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매들린 자신부터가 일단 황당하고 경악스러운 상태였다.
“일단, 일단 진정해….”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아이 이야기를 왜 안 하고 뜸을 들여요? 우리 아이 괜찮은 거예요?”
“제발 누워계시오. 제발, 부탁할게.”
이안이 쩔쩔매며 몇 번을 당부하고 나서야 매들린이 다시 정자세로 누웠다. 그녀가 천장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말해요.”
“아들이오. 살짝 고비가 있었지만 잘 태어났어. 평균 체중이고, 나처럼 검은 머리인 것 같군… 당신 한숨 자고 나면 같이 안아볼까.”
이안의 목소리가 퍽 다정해졌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대견한 존재를 대하듯 매들린에게 나긋나긋 말했다.
“처음에는 울지 않아서 많이 걱정했어.”
“…문제 있는 걸까요?”
“문제가 있으면 의사가 말을 해주지 않을까?”
늘 철두철미한 남자답지 않게 얼버무리는 대답이 왠지 불안했다. 하지만 매들린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상관없어요. 어떤 문제가 있든, 없든 난 그 아이를 사랑하니까.”
“…….”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서로 통성명까지 마쳤다고요.”
“하하.”
이틀간 한숨도 자지 못한 남자여서인지 웃음에는 기운이 없었다. 그러나 아내가 깨어난 것만큼은 기쁜지 얼굴에는 희열이 가득했다.
“일단 한숨 푹 자. 그러고 나서 우리 같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줍시다.”
* * *
“존이 좋을 것 같아요.”
“…좋아.”
정말 그 이름으로 괜찮겠어, 라든지. 진심이야? 같은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강보에 싸인 아기를 안고 울면서, 또 행복하게 웃으면서 빛나는 여자를 보고 어찌 그 마음을 의심할 수 있겠어.’
존은 그 화상을 입고 죽어간 남자의 이름이었다. 매들린의 친구였다던….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런 것은. 그보다는 작은 생명체와 눈을 마주치며 무한히 즐거워하는 여자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남자는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은 견디기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한참 아이를 어르고 달래던 매들린이 속삭였다.
“정말 당신을 닮았어요.”
“머리카락 색만 닮은 것 같은데.”
“글쎄요, 고집스러운 점이 꼭 아빠를 닮았는걸요.”
“나는 침을 질질 흘리거나 철딱서니 없이 어머니를 고생시킨 기억이 없는걸.”
말은 그렇게 비뚜름하게 하면서도, 이안은 두 사람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당신도 이리 와요.”
“글쎄. 둘이서 완벽해 보이는데. 난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군.”
남자가 새삼 멋쩍게 굴자 매들린이 작게 코웃음 쳤다.
“같이 안아보자면서요, 이리 오래도요.”
결국, 어색하게 의자에 앉아 아이를 안아든 이안은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인상을 찌푸렸다. 약한 몸으로 사경을 헤맨 매들린이 옆에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한 자신이 우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렇게 기쁜데 눈물이 나는 것 역시, 도통 말이 안 됐다.
“가끔은, 너무 기쁠 때도 눈물이 나더라고요. 참, 모순적이죠?”
“…이상한 일이군.”
“조니가 아빠를 알아보나 봐요. 웃는데.”
“…웃는 게 아니라 우는 것 같은데.”
“아이도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는 걸까요.”
“졸리거나 배가 고픈 걸 수도 있겠어.”
* * *
어린 존 루이스 노팅엄은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활발하고, 잘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안은 절대 자기를 안 닮았다며, 다 엄마를 닮았다며 혀를 찼다. 그리고 그 말을 하면서 활짝 웃었다.
매들린은 몸이 많이 약해졌다. 계속 추워하는 통에 이안은 두 번째 이사를 고려하는 중이었다. 그밖에도 남자는 인생의 자잘한 것들을 계획이나 향로에 맞추어 수정하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둘째를 가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는 굳게 다짐했다. 매들린이 은연중에 그래도 형제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말을 꺼냈다가 이안의 싸늘한 눈빛을 받고 말았다.
“아니, 죽을 뻔한 건 나인데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당신이 정신을 잃은 그 몇 시간 동안 내가 어떤 지옥을 봤는지 알면 그런 소리 못할 거요.”
이안이 그 말을 하면서 피곤한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당신은 두 번이나 내게 그런 짓을 했어. 앞으로 또 그러지 마시오.”
“…제 의지로 벌인 일은 아니…. 아니, 미안해요. 앞으로 노력할게요.”
“노력한단 말보다는 확신을 줘.”
매들린이 살짝 고개를 기울여 아이를 달래듯 이안을 바라봤다. 물론 유모가 있었지만, 아이를 돌보느라 부쩍 그런 제스처가 늘어났다.
마음에 들지 않…기만 한 건 아니었다. 자신을 귀여워해 주는 것 같은 상냥한 반응이 싫지만은 않았다.
* * *
매들린은 아이를 조니라고 불렀고, 이안은 미들네임인 루이스라고 부르는 편이었다. 그보다는 그저 아가, 아이야, 할 때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아이를 바라보는 의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두 살배기 아기는 영문도 모르는 채로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막 걸음마를 떼고 난 뒤 어디든 가려는 아이였다. 까르르 잘 웃기도 했고, 나름대로 몸짓으로 자기주장도 곧잘 했다. 그러나 어쩐지 옹알이조차 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엄마 아빠가 불러도 반응이 없거나,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해야 방긋 웃을 뿐이었다.
“더 자세한 검사를 해봐야겠지만, 청각 기능이 손상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산도를 나오면서 산소가 모자랐는지, 그 과정에서 청각 기능이 손상된 것 같다는 게 의사의 이야기였다.
“발성 기관 쪽은 특별히 문제는 없습니다만, 역시 확인을 해봐야겠습니다. 일단…”
“지금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이안은 매들린이 사경을 헤맬 때처럼 이성을 잃은 모습은 아니었으나, 자못 절박함이 묻어나오는 태도였다.
“그건 검사를 더 해봐야…”
“그렇다면, 선생님, 가장 좋은 의사를 만나야겠습니다.”
의사로부터 한참 긴 목록을 받아들고 나서야 이안의 질문 공세는 멈추었다.
매들린은 내내 말이 없었다. 그녀의 침묵을 신경 쓰며, 아니, 두려워하며 이안은 아이를 안았다.
“존.”
매들린이 다른 방향을 쳐다보며 불렀으나, 아이는 반응이 없었다. 그보다는 저를 안는 품이 답답한지 이안을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일 뿐이었다.
“…미안해.”
갑자기 튀어나온 이안의 말에 매들린이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무슨 말이에요?”
“그저. 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먼저, 당신 때문이 전혀 아니고요. 굳이 따지자면 제 잘못이겠지만 그건 지금 생각할 게 아니에요.”
후우. 매들린이 눈을 감았다.
“우리는 할 수 있어요. 존이랑, 당신이랑 나랑 함께 행복하게 잘 살 거라고요.”
몇 초 동안 모든 걱정과 슬픔을 쏟고 난 매들린은 다시 씩씩한 모습이었다. 일견 개운해 보일 지경이었다. 이안은 그런 강인한 아내가 경이로운 한편으로 씁쓸했다.
“매들린, 이게 다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가 한 박자 숨을 고르고 존의 귀를 부드러운 손길로 덮었다.
“나 자신에게 병신이라느니, 쓰레기라느니 말했던 게, 후회스러워서야.”
그 말을 끝내고 나서야 그는 아이의 귀를 곱게 감싸던 손을 덜어냈다. 놀이를 하는 줄 아는지 아이가 방긋방긋 웃었다. 아들에게 웃어주며 이안이 쓸쓸하게 말했다.
“존은 완벽해.”
이안은 자신에게 향했던 칼날이 매들린과 제 아들에게 향하는 게 더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매들린이 이안을 꼭 안았다. 세 가족이 꼭 감싸 안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래요. 그러니까 자신을 해하는 말은 이제 하지 말아요.”
당신이 아프면, 난 더 아파요.
“내가 말했죠, 당신은 아름답다고.”
“……”
“아름다운 당신을 사랑해요.”
둘은 입을 맞추었고, 존은 까르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