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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천년 같은 시간 (104/121)

103화. 천년 같은 시간

‘그래, 알겠다. 알겠다고.’

매들린은 제 뱃속에 ‘아이’라는 존재가 들어있단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제 몸 역시 얼추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야 속이 부대끼는 건 물론이요, 머리가 핑핑 어지러울 때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견디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었다. 

‘아버지와는 달리 순한 성격인가 보네.’

몸과 머리로 안다고 해도, 이안과 자신을 나누어 닮은 생명체가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건 역시 너무도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은 무섭다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태어난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그래도 운이 좋은 아이일 거다. 이 세상에는 훨씬 힘든 처지의 사람들이 제 몫의 생을 살아나가고 있었다. 두려움은 두려움으로 놔두자. 그저 남에게 베풀고 선의를 지킬 줄 아는 사람으로만 키우자고 매들린은 어지러운 마음을 갈무리했다.

만약 고난과 슬픔이 있다고 해도 언제나 그녀는 생을 택할 것이다. 

* * *

매들린은 요즘 부쩍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을 느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티가 나기 시작하는 부푼 배가 저 자신도 낯설었으니까. 하지만 남자의 시선에 담긴 복잡한 감정까지 전부 아는 건 아니었다.

매들린으로서는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들끓는 욕망이라든가, 갈증, 두려움 같은 것까지 알아버리고 나면 조금 부담스러울지도 모르니까.

지금도 줄곧 자신을 지켜보는 남자의 시선을 눈치챈 매들린이 순하게 웃었다. 

“만져볼래요?”

“……”

“처음 만져보는 것도 아니고, 이리 와요.”

그 따사로운 몸짓에 홀린 듯 다가가, 얇은 옷자락 위에 떨리는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아직 안 차는군.”

“좀 더 기다려봐요. 자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힘들진 않고.”

“힘들기야 힘든데 기쁜 게 더 크죠?”

“나도… 기쁘오.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에서일지도 모르지만.”

‘당신과 나의 피를 반씩 이어받은 아이가 일종의 보험처럼 느껴진다니, 난 정말 이기적이고 끔찍한 사람일지도 몰라.’

차마 내뱉지 않은 속내는 깊은 심연 속에 가라앉았다. 그 어두운 마음까지 다 받아들이는 듯 매들린이 작게 웃으며 응수했다. 

“이유야 어떻든 반가운 건 맞죠?”

남자가 희미하게 웃더니 고개를 숙여 매들린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이 이렇게 밝게 웃는데, 내가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겠어.”

* * *

“아. 축하해.”

“오. 자네, 방금 그 말 정말 성의 없었어.”

홀츠먼이 성을 내건 말건 이안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이었다. 뒤늦은 혼인신고 후 신혼여행을 빙자한 장기간의 휴가를 갔던 이사벨 부부 역시 기쁜 소식을 가져왔다. 물론 그에 대한 이안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살짝 성가신 느낌까지 들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혼인신고를 해두길 잘했군. 안 그랬다면 난 자네에게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테니까.”

“그건 두고 봐야지.”

“오, 이사벨, 당신 오빠가 날 죽이려 해.”

“네, 빨리 결판을 내세요.”

이사벨은 건성으로 말하며 매들린과 떠들어댔다. 그 모습을 보며 홀츠먼이 고개를 저었다. 

“뭐, 아무튼 이렇게 된 이상, 선의의 경쟁을 하자고.”

“…그냥 할 말이 없군.”

어린 사람을 키우는 게 무슨 레이스 경주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홀츠먼이 한심스러울 따름이었다.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서 레모네이드를 나눠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게 즐거웠다. 이런 쓸데없는 모임이 즐겁다니, 자신이 너무 물렁해진 건 아닐까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잘나신 백작 각하도 어린애 기저귀 갈아주는 신세로 전락하시겠군.”

모두의 시선이 꽂힌 곳에는 레이밴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비뚜름하게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저 자식 누가 들여보냈어.”

라이오넬은 이제 이곳을 심심할 때면 들락날락하고는 했다. 매들린이 손을 흔들자 건성으로 마주 흔들었다. 

“오해 마시고. 난 재단 서류 전해주러 왔을 뿐이니까.”

“그런 건 우편으로 보내도 될 텐데.”

홀츠먼이 어이없어하건 말건 라이오넬은 의자를 당겨 이사벨과 매들린 사이에 앉았다. 이내 셋이서 마구 떠들기 시작했다. 서류는 뒷전이 된 모습에 이안은 관자놀이가 미세하게 지끈거렸다. 

“그래, 우리는 그냥 지폐 세는 사람이지, 암.”

홀츠먼이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정도나 되면 다행이지.”

“그나저나, 이안. 저 애송이는 예외야?”

“무슨 예외.”

“지금 와서 갑자기 경계심이 풀어진 건 아니겠고. 확실히 내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건가?”

“하.”

이안은 가소롭다는 듯 홀츠먼을 비웃었다. 

“그렇잖은가. 솔직히 매들린을 이야기할 때마다 자네가 뒤에서 어른거리는 통에 너무 불편했다고.”

“저 녀석을 내가 왜 경계해.”

“하기야…”

한참 둥근 탁자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는 세 사람을 보며 홀츠먼이 뒷말을 얼버무렸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이사벨이 담뱃갑을 꺼냈다. 불을 붙이려는 자연스러운 동작에 홀츠먼이 뛰쳐나갔다. 

“이건 아니지, 당신 뭐 하는 거야.”

홀츠먼이 담뱃갑을 멀리 던져버리자 이사벨이 이마를 탁, 쳤다. 

“미안해요. 안 그래도 속 안 좋은 매들린 토하게 만들 뻔했네.”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아니, 담배가 건강에 좋다고 그러던데.”

매들린이 한숨을 쉬었다. 

“이사벨, 자본주의가들의 말도 안 되는 선전에 넘어가는 거예요.”

“허. 이렇게 말하면 내가 못 이기지.”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하하 호호 깔깔거리며 호탕하게 웃는 세 사람을 보며 홀츠먼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폐나 세러 가련다.”

* * *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미국의 동북부지역의 겨울은 영국과 달리 혹독했다. 영국의 겨울이 뼛속 깊이 축축하다면, 이곳의 겨울은 시간조차 얼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

이안은 초조하게 복도를 돌아다녔다. 어찌나 안절부절하지 못했는지, 다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나 통증조차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럴 수 없었다. 

- 아…!! 악!!!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진한 비명에 백 번이고 머리를 찧고 싶었으니까. 예정보다 이른 날짜에 진통이 시작되었으나 대비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의사와 조산사가 빠르게 도착했다. 이미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돌려본 시나리오인데도 어찌 이리 무력한지. 

산고가 길었다. 

시간을 헤아리고 또 헤아려봐도 너무 긴 것 같았다. 임신과 출산에 관한 책을 열 권 이상 독파한 것 같았으나 알면 알수록 끔찍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기 위해서 이 정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스러울 지경이었다. 

과학기술이 제아무리 발달했다고 떠든다지만, 여전히 아이를 낳다가 많은 여자들이 목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죽음은 그저 ‘운이 나빴다’고 여겨질 따름이었다. 

만약 매들린이 그 ‘운이 나쁜’ 경우에 해당한다면, 그렇다면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세상과 자신을 말이다. 그리고 아이까지. 물론 아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저 두 사람의 욕심에 의해 잉태된 존재였다. 

그러나 이안은 원래 신사와는 거리가 먼, 비열한 남자였다. 남을 탓해서라도 매들린이 돌아온다면 기꺼이 비난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일각이 여삼추라, 천년 같은 30분이 더 흐르고 나서였다. 문이 열리더니, 초췌한 표정의 의사와 간호사가 나왔다. 

“긴급한 상황입니다.”

“…정말 빨리도 말해주시는군요.”

“누굴 탓할 일은 아닙니다만, 큰 병원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태아가 움직이지 않아요.”

“…방법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방법은 여기서 구할 수 없…”

이안이 의사를 놔두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색이 되어, 천천히 누워있는 매들린에게로 다가갔다. 

“…꼴좋죠?”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매들린을 보며 이안이 입안의 여린 살을 씹었다. 그리고는 누가 봐도 인위적인 미소를 지어냈다. 간신히 입꼬리를 당기고, 어떻게든 괜찮다는 듯이.

“그래, 정말 꼴좋군.”

그러니까 살아야지. 힘을 내야지, 포기하면 안 돼. 당신답지 않잖아? 벌린 입술 사이로 나오는 건 짐승의 신음뿐이었다. 버림받은 개가 주인을 향해 내지르는 애원 같은 숨소리였다. 

“매들린, 병원에 가자.”

* * *

다시 방 밖으로 나온 이안이 의사에게 고갯짓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수배해놓은 병실이 있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을 때였다. 

“갑시다.”

매들린과 의사, 간호사를 먼저 운전사와 함께 먼저 보내고 나서야 이안은 차체의 시동을 걸었다. 

의사에게는 이미 언질을 해둔 터였다. 

[만에 하나, 매들린이 조금이라도 위험해질 것 같으면, 당신이 내려야 할 선택은 명확하오. 여기에 선택의 여지 같은 건 전혀 없소.]

[…….]

[주저 없이 그녀의 목숨을 살리는 데에 집중하시오. 아이는… 괜찮아. 그녀부터. 알겠소?]

[노력하겠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라니.’

노력하겠다 따위의 말은 전쟁터에서나 들었었다. 상황이 개차반 같고 전혀 나아질 기미는 안 보이는데, 억지로라도 상부에 보고서를 올려야 할 때나 쓰던 말이었다.

그런 말을 이제 듣는 처지가 되니 속이 뒤틀렸다. 오장육부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사정없이 꼬여버렸다. 

‘그렇게 쉽게 행복해질 줄 알았어?’

그렇다면, 넌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남자야.

펑펑 흰 눈을 내리붓는 검은 하늘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런 너를 믿어준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여자쯤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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