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행복하고, 변해가기를
“저택을 떠난다는 게 실감이 안 나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안은 솔직히 후련했는지도 모른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격언을 제쳐두고서도 말이다. 좀 더 볕이 잘 드는 곳에 집을 짓고, 매들린과 함께 살아가는 미래 같은 걸 꿈꾸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테니까. 그녀가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었지만.
미국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기로 결정한 뒤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저택을 문화재 보호재단에 기부하고 그 필지를 알아서 처리하도록 내버려 둔 뒤 쓸만한 가재도구라든지 서류를 모아 미국으로 보내는 것만도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추 정리된 지라, 진짜 몸만 가면 끝나는 상황이었다.
“이안, 잠시만요.”
“무엇 하게?”
매들린이 이안을 남겨두고 저택으로 다시 향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그에게 안심하라는 듯이 작게 웃어 보였다.
“차 안에서 기다려줘요. 잠깐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어요.”
* * *
노팅엄 저택으로 들어가자 벽이 휑했다. 한때 회화와 태피스트리가 걸려있던 곳인데 그것들을 전부 옮기고 나니 다소 황량한 느낌까지 들었다. 천장에 매달려있는 샹들리에와 조각상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잠깐 감상에 젖어 주위를 둘러보던 매들린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이쯤이었나, 그녀가 떨어진 곳이. 대충 눈대중으로 짐작하다가 몸을 수그려 앉았다. 대리석 계단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정확히 짐작할 수 없는 이유로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왜? 누구한테 미안한 거야?
“지난 삶의 이안에게 미안해. 지난 삶의 나 자신에게 미안해. 내가 저버렸던 가능성들에 대해서.”
[괜찮아.]
등 뒤에서 들리는 것 같은 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얼떨떨한 기분을 간직한 채, 홀린 것처럼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지하 문으로 향했다. 제이크와 얽힌 소동 이후로 발걸음 한 적 없는 곳이었다. 이안이 단단히 잠가두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무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힘을 주어 여니 끼이익 하는 으스스한 소리가 났다. 그러나 무서운 것만은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주방에서 준비해온 초를 켰다. 작은 빛이 어두운 통로를 밝혔다. 한 걸음 두 걸음 걸어가며 돌벽을 더듬었다.
‘이곳은 제이크가 있었던 곳이야.’
짚더미가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모양새가 마치 그때가 어제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곳에서 시선을 거둔 후, 뒤편의 복도로 향했다. 지하실을 들락날락했을 때조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텅 빈 포도주 창고가 양옆에 나 있는 좁은 복도였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석실이었다. 방의 한가운데에는 딱 봐도 몇 세기 전 것으로 보이는 돌로 된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수염을 기른 남자가 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상이었다. 그 아래에는 작은 제단이 놓여있어서 음산함이 더했다.
이사벨이 말했던 그 옛날 이교도의 제단이 바로 이거로구나 싶었다. 제단 위 먼지를 조심스럽게 털어줬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 초를 든 채 묵념했다.
딱히 종교적인 의미를 담은 행동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기도의 의미였다. 이안이 행복하기를, 저쪽의 이안과 이쪽의 이안이 행복하기를, 그가 마음의 안식을 찾기를, 세상이 좀 더 나은 곳으로 변해가기를….
그렇게 가슴 속에 맺힌 작은 응어리가 점점 사라져갈 때쯤, 위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 *
“그사이를 못 참다니요.”
“매들린, 당신 지하에 무슨 좋은 추억이라도 있었나 보오. 그곳에 숨겨둔 보물이라도 있나?”
“네. 지하창고에는 참으로 좋은 기억이 서려있지 뭔가요. 다 죽어가는 사람 치료해주고 감옥도 가고….”
“…….”
입을 꾹 다무는 이안을 보며 매들린은 제 농담이 지나치게 독했나 걱정했다. 그러나 남자는 금세 기분을 풀었다. 매들린의 손을 잡아오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새로운 땅에서도 날 사랑해줘.”
“…….”
“당신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갑자기…?’
의아한 것과는 별개로 심장 한쪽이 짜르르 울려왔다.
그러고 보니 남자에게 직접 ‘사랑한다’는 말을 한 기억이 없었다. 스쳐 지나가듯 말하기야 했겠지만, 기억을 되짚어봐도 분위기를 잡고 고백한 일은 없었던 것이다.
“날 사랑한다고 말해줘.”
남자가 돌연 눈을 빛내며 요구해오는 통에 물러설 수 없었다. 하기야, 말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사실이니까. 매들린이 한 박자 늦게 결연히 대답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내뱉고 나니 후련하기도 했다. 그 기세를 몰아 이안이 갈급하게 재차 요구했다.
“나와 평생 함께할 거라고, 그렇게 말해줘.”
“당신과 평생 함께할 거예요.”
남자의 표정이 일견 미묘해지더니 일그러지는듯하다가 미소만이 떠올랐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나를 언제나 절망에서 건져내는 건 당신이지.”
“알고 보니 난 어부가 적성인가 봐요. 당신 허우적거릴 때마다 건져내느라 팔뚝 힘이 제법 강해졌어요.”
능청을 떠는 아내의 모습에 한참 웃던 이안이 숨을 갈무리했다.
“그래서 무서워.”
“왜 계속 무섭다고 해요.”
“사랑을 알게 되어서 무섭소.”
아, 피를 뚝뚝 흘리는 살아있는 심장을 꺼내 바쳐오는 듯한 남자의 행동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 심장이 흉측하고 무섭게 생겨도 받아들어야…겠지? 아니, 언제라도 기꺼이 받아들 거다.
“나도 무서워요. 그래도 계속 날 좋아해 줄 거죠?”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를 밝게 말하는 것도 재능이군.”
“그래서 이번에는 라디오쇼에 나가보려고요.”
“재주가 많으니, 직업이 열 개가 되겠어.”
“그러게요. 날 당신 말고 누가 감당하겠어요?”
둘은 손을 꼭 붙잡고 저택을 나왔다. 과거와 지난 상념들을 놔둔 채 햇빛 아래로 걸어 나왔다.
* * *
“저기, 이안.”
미국으로 온 지 삼 주째가 된 어느 날 아침이었다. 속이 어지럽고 뒤집히는 느낌에 매들린이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괜찮소?”
옷을 입고 있는 남자가 그녀를 기민한 눈으로 살폈다. 아직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비몽사몽 앓던 매들린이 끙끙거렸다.
“아무래도 임신인 것 같아요.”
“…….”
그러니까 매들린은 오늘 날씨는 우중충하네요, 라든가. 찰스 린드버그가 대서양을 횡단했다지요? 같은 식의 가벼운 어조로 임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왜 말이 없어요?”
여전히 벌거벗은 몸에 이불만 뒤집어쓴 채로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매들린이었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자, 시선의 끝에는 잔뜩 얼어붙은 창백한 남자만 있을 뿐이었다.
“…잠시만, 생각할 시간부터 줘야 하지 않겠소.”
“생각할 시간이라뇨. 저의 일천한 생물학적 소견에 따르면 임신밖에 더 있어요?”
“하…의사를 부르겠소.”
“네. 고마워요.”
매들린은 다시 눈을 감았다.
‘자는 거야? 설마?’
이안이 천천히 다가가자 그곳에는 눈을 감고 아침잠을 자는 부인이 있었다. 천사 같이 잔다는 감상을 마무리 지을 새도 없이 황당함이 치솟아 올랐다.
그가 손을 뻗어 매들린의 맨 어깨를 부드럽게 잡고 흔들었다.
“왜… 아, 왜요….”
“매들린,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하면서 어찌 그리 태평할 수 있어?”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제가 졸린 건 당신 때문이에요. 아, 당신이 얼마나 나를 못살게 굴면 내가 이러겠어요.”
아직 완전히 잠에서 깨지 않은 매들린은 좀 더 직설적인 편이었다. 그통에 이안까지 멋쩍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사랑스러웠다.
“그래. 미리 축배를 들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난 솔직히 상관없소.”
덧붙인 말이 의아하다는 듯이 매들린의 풍성한 속눈썹이 자르르 떨렸다. 그녀가 눈을 뜨고 오묘한 얼굴의 남편을 향해 되물었다.
“왜 상관없어요?”
“자식 말이야.”
“원하던 것 아니었어요?”
“…원하긴 하지. 그러나 없어도 괜찮아. 나는 이미 만족하고 있으니 말이오.”
“내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거라면 놔둬요.”
얄미운 소리를 하면서 푸스스 웃는 아내의 모습에 절로 광대가 치솟고 말았다. 그런 남편의 모습이 재밌는지 매들린이 계속 약 올려댔다.
“혹여 아니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고요. 그리고 맞다면…. 그땐, 그때 가서 생각해봐요.”
“…저녁에 봅시다.”
“네. 저도 좀 이따 일어나서 일을 해야겠어요.”
에머스트 2세의 유지를 이어받아 설립한 재단은 규모가 굉장히 컸다. 그녀가 이안의 돈으로 운영하던 장학재단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말이다. 그만큼 신중을 기해야 할 요소도 많았다. 그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과 일하는 것도 배울 수 있었다.
“음…, 그 일을 꼭 해야 하나?”
이안이 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단서를 달았다. 그 모습에 매들린이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제 이안에 대한 나름 전문성이 생긴 걸까. 왜 일을 하면 안 되냐느니, 당신 사고방식이 잘못되었다느니 토를 달면 달수록 더 불타오르는 남자의 성정을 알고 있었다. 그보다는 우회로를 택하는 편이 안전했다.
“무리 안 할게요.”
“…지켜보겠소.”
남자가 완전히 방문을 나가자 매들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사람도 참 한결같다, 그리 생각하며 매들린은 밀린 잠을 이어 자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