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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속내 (102/121)

101화. 속내

공주와 기사가 사랑에 빠져 평생을 담보로 한 영원한 맹세를 맺은 뒤에도, 결혼식에서 억겁 같은 키스를 한 뒤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적어도 난 기사는 못되겠군.’

이안은 자신이 공주를 비탄에 빠지게 하는 괴물쯤은 되지 않을까 자조했다. 물론 크게 신경 쓰이는 일은 아니었다. 결말이 달라져도 둘이서 행복하면 그만이니까. 

매들린을 만나 숙원이라도 풀었는지, 존 에머스트 2세는 2주 뒤에 작고하였다. 호텔에 머무는 둘에게도 그 소식이 날아왔다. 

장례식에 참석하는 발걸음이 무거운지 매들린의 발걸음이 축 늘어져 있었다.

“음?”

“네?”

“아무 말도 안 했소만.”

“…절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난 정말 아무 말도 안 했소.”

아무것도 아니라고는 했지만, 어쩐지 침울해 보이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추념하는 대상이 이미 죽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매들린의 관심을 한 자락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런 치졸한 제 모습이 역겨울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이 이상한 건 사실이네요. 오랫동안 편찮았던 분인 건 확실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이상할 수 있지.”

“단순히 이런 이유로 제가 그 돈을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안 받아도 상관없소. 당신이 편한 대로 해.”

‘사실 말이야, 난 당신이 그런 돈 같은 건 안 받았으면 좋겠어.’

이안은 생각했다. 당신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거든. 

하지만 그런 말 따위는 목구멍 안으로 집어 넣어버린다. 괜히 매들린을 속상하게 할 것을 알기에.

‘왜 나를 못 믿냐, 사랑도 신뢰가 있어야 참사랑인 거다.’ 그렇게 씩씩 울먹거리는 얼굴을 할 여자를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상하지. 난 당신에게 언제나 확인받고 싶어 하고, 당신은 매번 그 확신을 돌려주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는 너무 목이 말라.’

“그래요? 회사 일은 정말 잘 마무리된 거예요?”

“…….”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입가에 키스하고 옷깃을 여며줬다. 몇 주간 다시 머문 뉴욕은 울적했지만, 곧 있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조금 분위기가 들떠 있었다. 삼삼오오 사람들의 인파를 헤치며 교회에 도착했다. 

에머스트 2세의 장례식에 도착한 조문객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유력 정치인들부터 시작해서 은행가들까지. 무자비한 황색 언론사의 대명사였던 ‘더 트리뷴’의 창업자를 기리기 위한 행렬이 길고도 길었다. 

예배당 안을 둘러보다가 라이오넬과 눈이 마주쳤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그는 누가 봐도 침통한 왕자님 같았다. 곧 융성한 왕국을 상속받을 예정인 그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애정없는 부자 관계였기에, 아니, 오히려 애증이었기에 더 슬플지도 모르겠다.

매들린이 살짝 인사하자 그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숨을 쉬며 작게 웃었다. 그게 다였다. 

추도식 내내 매들린은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적어도 죽은 사람들은, 죽은 세계에서 자유롭기를 말이다. 에머스트 2세가 정말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현세의 얽힌 원념에서는 벗어나기를 잠시나마 기도했다. 

부부는 추도식이 끝난 후 관 앞에서 묵념하고 교회를 빠져나왔다. 

그때였다. 대리석 계단을 내려오는 둘 앞에서 익숙한 환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매들린의 눈이 자연스레 동그래졌다. 

“..엔..조?”

“아.”

말쑥하니 정장을 입은 엔조는 마치 유능한 사업가처럼 보였다. 물론 어찌 보면 정말로 사업가가 맞긴 했지만, 칼이나 총을 든 모습보다는 계약서 위에 유려하게 서명하는 모습이 더 어울릴 법했다. 

풍성한 속눈썹을 깜빡이며 얼타던 엔조보다 먼저 이안이 선수를 쳤다. 

“반갑군.”

손을 척 내미는 그의 모습에 엔조가 그제야 뒤늦게 실실 웃었다. 능글맞게 픽 코웃음 치면서 말이다.

“백작 각하. 제가 워낙에 못 배워먹어서 그런지 옹졸하기 그지없거든요. 제게 악수를 청해주실 줄이야.”

일전에 매들린 앞에서 악수를 거절한 백작의 행동을 그대로 돌려주는 셈이었다. 

“엔조…라오네 씨. 이곳은 무슨…?”

“아. 매들린, 아니 ‘백작 부인’, 존은 제 친구였습니다.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고받은 사이기도 했고요.”

‘여러 가지 도움’이라. 하기야, 세를 불린 마피아들이 정계 진출까지 노리는 마당에, 신문사 재벌과 이런저런 관계가 없는 게 더 이상했다.

“…그나저나 돌려준 시계는 잘 쓰고 있어요. 매들린.”

“…네?”

이안의 표정이 살벌하게 변하건 말건 엔조는 농담을 던질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제 주머니에 있는 회중시계를 쓱 보여줬다. 자세히 보니 매들린이 돌려준 손목시계를 나름 바꿔놓은 모양이었다. 

* * *

매들린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폭발하고야 말았다. 

“…진짜 무슨 일이에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이 사람, 또 시작이야!

한숨이 절로 나왔다. 호텔 로비에서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지만, 잔뜩 곤두선 이안의 모습이 이상했다. 

“오늘 아침부터 뭔가 불만스럽다는 티를 계속 내잖아요.”

“불만스러워할 일은 전혀 없는데 이상하군.”

“흐음. 그러게요, 어젯밤을 생각해보면 불만이 남아있는 게 이상한 일이죠.”

“…….”

매들린이 옆에 서 있는 승강기 운전원을 의식한 듯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런 건 상관없는듯했다. 그보다는 제 부인이 그런 종류의 농담을 했다는 것에 묘하게 들뜬 얼굴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매들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 라이오넬이나 엔조 때문에 성질이 곤두선 건 아니죠? 가끔은 당신을 이해할 수 없…”

“이해할 수 없긴 뭘 이해할 수 없어.”

그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을 보고 사랑에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이상한 거야.”

“…오.”

매들린은 민망하다 못해 잔뜩 얼어붙고야 말았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누가 제 등 뒤에 차가운 얼음을 문대는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옆에 선 승강기 운전원의 안색을 살폈다. 

볼이 새빨개진 청년의 얼굴이 가관이었다. 

* * *

엘리베이터를 빠르게 빠져나와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가는 내내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매들린이 분통을 터트렸다. 

“그 청년 참 안 됐어요. 저도 호텔에서 일하면서 못 볼 꼴 많이 봤는데….”

“별말도 안 했구만.” 

“…애정표현은 암살이 아니에요. 자연스럽게 은은하게 좀 해봐요.”

“당신의 마음을 얻는 건 언제나 진지한 문제야. 내가 어찌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겠어?”

이 사람이 또 수작인가 싶어 눈을 부라렸지만 이안은 그저 침대에 앉아 진지한 얼굴로 의족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아까까지만 해도 예민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고 말았다. 매들린이 냉큼 이안 옆에 딱 붙어 앉았다. 

“왜요, 의족이 요즘 불편한가 봐요? 저번에도 그러더니. 당신 장례식 참석한다고 무리한 건가요?”

“새걸로 바꾸면 또 바꾸는 대로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더군.” 

둘이 두런두런 의족과 짓무른 다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연고는 무얼 바르는 게 좋다느니 하다가 매들린이 은근하게 이안의 어깨에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한동안 침대에 있어요.”

“…요즘 정말 왜 이래.”

미국에 있으면 더 호방해지나? 이안이 헛웃음 지으며 매들린을 돌아봤으나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그보다 그 말을 들은 뒤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는 게 시커먼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왜요, 싫어요? 계속 마구 돌아다니고 싶고 그래요?”

“아니. 당신은?”

“그건, 아, 대답도 듣기 전에 부딪히면 어떡해요. 아, 손 치워요!”

정말이지 오랫동안 갈구해온 평화였다. 

* * *

자신이 한때 일했던 호텔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노라니 기분이 새삼 묘했다. 그것도 제게 총을 겨눴던 상대와 마시니 차 맛이 더욱 이상했다. 

물론 지금 마시는 얼그레이가 맛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유언장이 공개되었어.”

“…….”

“나는 승복할게.” 

예기치 못한 라이오넬의 한마디에 매들린이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이 바보 같아서 웃기는지 라이오넬이 큭, 웃었다. 

“왜. 지저분한 법정 공방이라도 기대하셨어?”

“이렇게 맥빠지게 포기할 거면서 그런 짓은 왜 꾸몄어요?”

“글쎄.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거든.”

“…죽은 사람도 우리가 기억하는 한 살아있는 거나 다름없어요.”

기억이야말로 떠나간 사람들이 계속해서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는 한 방법이지요. 

“아주 소네트를 지으시는구만, 셰익스피어 납셨어. 그나저나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군. 당신네 충견이 나를 계속 노려보는 통에 간담이 서늘하거든.”

“이안은 사람 안 물어요.”

“얼씨구.”

이안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 초조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인자하게 바라보는 매들린의 모습에 라이오넬이 아주 학을 뗐다. 

“아, 정말 싫다. 나는 먼저 간다.”

“…집 주소와 전화번호는 적어주셔야죠.”

“…….”

남자는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수첩을 쭉 갈라 찢은 종이 위에 아무렇게나 제 주소를 휘갈겼다. 그걸 받아든 매들린이 이제 가보라는 듯 훠이훠이 손짓했다. 

“당신을 보고 천사라는 둥 지껄이는 치들이 이해가 안 가.”

“칭찬 감사해요.”

“…에휴.”

짐짓 깊은 한숨을 내쉬는듯하던 남자는 뒤돌아서자마자 씩 웃었다. 이상한 여자지만, 나쁜 여자는 아니다. 

그리고 이 혼탁한 세상에서 나쁘지 않다는 건 얼마나 귀한 일인가. 

‘…이안 노팅엄이 내 뒤통수만 그만 노려보면 참 좋을 텐데.’

라이오넬은 홀가분한(?) 마음을 안고 호텔 최상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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