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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다시는 (101/121)

100화. 다시는

노회장과의 대화를 마치고 나자 다리에서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강행군을 마친 것처럼 사지가 후들거렸다. 문밖을 나오자마자 이안이 복도에 난 창을 통해 바깥을 응시하는 게 보였다. 

“이안.”

그를 불러봐도 남자는 대꾸 하나 없었다. 그저 조용히 바깥을 응시하며 침묵할 따름이었다. 괜히 무안해진 매들린은 입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라, 손을 꼼지락대며 남자를 쳐다볼 뿐이었다. 

“다시는.”

몇 초의 정적이 지난 후, 남자가 한껏 억누른 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그건 내가 할 소리예요.”

‘이혼이니 이별이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당신이 먼저 했다고요.’

“…….”

남자가 얇은 아랫입술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완고한 눈가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 그때 내가 지껄인 말에 대해서 줄곧 생각해봤소.”

“그런데요.”

“결론은 이래. 내가 아무리 밑바닥을 굴러도, 팔다리가 사라지고 그 이상의 추물이 되어도 당신은 못 놓겠단 거야. 미안해.”

“…미안하다니요.”

“내가 겨우 이정도 사람이라서 미안하단 거야.”

‘당신을 위해서, 당신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라서 미안해.’

이안이 매들린에게 다가가더니 허리를 살짝 숙여 그녀를 폭 감싸 안았다. 남자의 너른 등을 손바닥으로 감싸 안으며 매들린은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 * *

애틋한 해후를 마치고 나서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저택은 무척 넓었고, 덕분에 단둘이 있는 방에서 시선 걱정 없이 노닥거릴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안의 표정이 대놓고 언짢아지는 통에 매들린까지 긴장하고 말았다.

“이상하군, 에머스트 2세는 내게 유산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는데.”

“꼭 ‘제게’ 주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

“평소의 저 같았으면 성인 행세하면서 거절했겠지만요, 이번만큼은 당신 사업에 보탬이 되면…”

“그 문제는 잘 해결했소.”

“아, 정말요?”

곧바로 화색이 돌며 즐거워하는 매들린의 얼굴을 보며, 이안의 표정이 더더욱 언짢아졌다. 

“별로 안 궁금했나 본데?”

“아니, 정말 궁금했죠. 이렇게 헐레벌떡 달려온 것도 다 당신을 위해서…”

“당신이 회사 자금 사정까지 걱정하게 하다니 체면이 말이 아니군.”

“뭐예요. 걱정하란 거예요, 말란 거예요.”

“…….”

남자가 그제야 조금 웃었다. 

“걱정 안 하면 또 안 했다고 심통이지, 막상 걱정하면 자존심 상해하고.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네요, 정말.” 

“심통이라니 충격적인 발언이군. 내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당신밖에 없을 거요.”

“부인의 특권이죠. 그리고 전 이 특권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어요.”

그 말을 들은 남자의 미소가 하릴없이 깊어져 갔다. 

“…그나저나, 다른 가족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난리가 날 텐데.”

“이걸 알고 있는 사람은 변호사와 라이오넬밖에 없을 거예요. 아직은.”

그 말을 들은 이안의 표정에 살짝 긴장감이 어렸다.

“흠. 사실 그대가 에머스트 차남과 같이 도착한 게 새삼 놀랍긴 하군.”

그도 그럴 것이, 유언장의 내용을 알면 가장 적대적으로 나올 사람이 바로 에머스트 2세의 아들인 라이오넬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날 죽이려고 하긴 했는데….’

그 이야기는 일단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일단은 이곳을 떠나, 잠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안, 그건 그렇고 나 너무 피곤해요. 어디 묵을 데는 없을까요?” 

살짝 피곤해 보이는 매들린의 모습에 남자의 얼굴에 다시 치밀함이 돌아왔다. 

“지금 뉴욕으로 다시 돌아가긴 좀 힘들 것 같고, 근처 머무를 숙소 같은 걸 알아보겠소. 이곳에서 자는 건, 좀 그렇군.”

좀 그런 정도가 아니다. 일단 에머스트 2세의 유언장에 관한 내용을 전해 듣자마자 남자는 사업을 하는 얼굴로 조금 돌아왔다. 자신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바로 경계태세를 갖추는 그의 모습에, 매들린은 절로 반성하게 됐다. 

‘내가 너무 경계심이 없는 게 문제겠지.’

아직도 천진난만하게 굴고 있는 게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약간 심란해진 매들린의 표정을 확인한 이안이 얕은 한숨을 쉬더니, 그녀의 볼을 쓱쓱 무성의한 듯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당신 걱정은 내 몫으로 놔둬. 그편이 더 효율적이니 말이야.”

“…그래요, 그럼 난 당신 걱정을 할게요.”

“참으로 안심되는군.”

“정말….”

쿡쿡 웃더니, 남자가 문밖으로 나갔다. 나간 후 다시 방으로 고개를 내밀어 한마디 남겼다. 

“한 시간 뒤에 출발할 테니 잠깐이라도 앉아서 쉬어. 목마르면 물을 가져오겠소.”

“괜찮아요.”

아 정말 괜찮아요. 몇 번 말하고 나서야 남자가 나갔다. 갑자기 너무 졸려 눈을 감았다가 떴더니, 10분 정도는 족히 지났는지 푹 수그린 고개가 아팠다. 그리고 뭔가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으악.”

“쉿.”

저, 저 흉악한 살인미수범, 아니 라이오넬이 삐딱하게 벽에 기대서서 매들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기서 날 죽일 생각이면 그것도 딱히 좋은 생각은 아니야.”

“하.”

“이안에겐 말 안 했어. 당신 아버지에게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게 좋을걸?”

“그 말 들으니까 오히려 이안에게 더 말하고 싶어지네. 그 사람은 내가 미래에서 왔다고 해도 믿을 사람이거든.”

은은하게 굳건한 매들린의 표정을 보자 기가 질리기라도 했는지 라이오넬이 중얼거렸다. 

“축하해. 유산상속 말이야. 덕분에 영국에서 떵떵거리고 살 수 있겠어?”

“…그러게. 당신 몫을 뺏어서 미안. 아니, 사실 안 미안해. 당신의 살해 협박 덕분에 죄책감이 사라졌거든.”

“형님이 당신 같은 여자를 좋아했다니 믿을 수 없군.” 

“존이 날 좋아했다고?”

그때 잠시였지만 라이오넬의 표정이 무척 아득해졌다가 조금 화나 보였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둔하기까지 하시네. 그 편지 읽고도 몰랐어?”

“…분명히 달리 만났으면 친구가 되었을 거라고.”

“…….”

라이오넬이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피우려다가 말았다. 그가 잠시 주저하더니 비뚜름하게 웃었다. 그가 이번에 품 안에서 꺼낸 건 담배가 아니었다. 지갑이었다. 그 안을 손으로 뒤적이다가 작은 흑백사진을 꺼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이건?”

“형 사진. 나야 넘치도록 많이 있으니까, 당신에게 하나 줄 수는 있어. 적어도 형 얼굴은 알아야 할 것 아니야.”

획 던진 사진을 받아들었다. 

그 작은 네모 칸 속의 남자는 처음 본 사람인데도 묘하게 낯이 익었다. 라이오넬과 소싯적 에머스트 2세를 반반씩 섞어놓은 것 같은 얼굴. 묘하게 수려한데도 강인함이 느껴졌다. 제복을 입고 정면을 바라보는 시선이, 제 앞날을 예견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 * *

뉴욕으로 다시 올라오는 길 내내 매들린은 차 뒷좌석에서 잠이 들어있었다. 이안은 조수석에 앉아 그녀를 편하게 눕게 해줬다. 지나가며 보이는 교외 풍경이 자못 을씨년스러웠다. 나아진 건 하나도 없었다. 후버 대통령의 정책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고 불황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당장 지금도 차창 밖으로 거대한 판자촌이 모여있는 광경이 보였다. 먹고살 방편이나 몸 누일 곳도 없어진 빈민들이 되는 대로 만든 마을이었다. 이름은 ‘후버빌’.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당신 덕분에 이렇게 살게 되었다는 비명 같은 명칭이었다. 

그 울적한 광경에서 시선을 떼고 뒷자리를 돌아보면, 매들린은 곤히 자고 있었다. 어쩐지 그녀가 말하지 않는 사실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 추궁할 권리가 있었나? 

라이오넬의 수려하다는 얼굴을 보니, 첫인상이 다시 떠올랐다. 정말 아버지를 하나도 닮지 않았다는 그런 짤막한 단평이. 

남의 집안 지저분한 사정 같은 건 단 하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런 내력에 매들린이 휘말릴 필요는 없다 여겼을 뿐이었다. 돈도 사실은 안 받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당장 회사도 숨통이 트인 상태였고 말이다. 하지만 매들린에게 또 포기를 종용하기엔 이미 너무 물러져 버렸다. 

“…마음에 들지 않네.”

‘자꾸 손 틈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아서 좀 마음에 들지 않아. 게다가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지.’ 

그도 눈을 감았다. 아주 잠깐은 잠이 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 * *

뉴욕에 도착한 부부는 플라자 호텔의 스위트룸에 몸을 뉘었다. 

계속 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는 매들린을 침대에 눕히고 몸을 씻기 위해 일어서려는 찰나, 무릎에 엄청난 통증을 느껴 다시 침대 위로 주저앉았다. 

“…젠장.”

평소에 쓰지 않는 욕을 지껄이며(그야 매들린이 자고 있으니) 바지를 걷어 올렸다. 의족을 빼내니 상태가 안 좋았다. 

‘새로 맞추든가 해야겠어.’

너무 걸어 다니면 좋지 않다고, 기술이 그 정도로 좋지는 않다고 신신당부하는 의사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차마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요새 무리했었나.’

아까 전까지는 통증도 못 느꼈는데 이제 그래도 좀 살만해졌다고 아픈 게 웃겼다. 

“하아…”

“여보. 괜찮아요?”

매들린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졸린 시선이 이안의 놀란 얼굴을 훑다가 이내 하반신으로 내려갔다. 

“안 되겠다, 내가 연고 발라줄게요.” 

부스럭거리며 일어나려는 매들린을 남자가 손으로 조용히 눕혔다. 

“왜요, 혼자 하려고요?”

“아니, 발라주시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다른 걸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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