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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존 에머스트 (100/121)

99화. 존 에머스트

운전석에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살인 미수범이 앉아있는데도 눈꺼풀이 자꾸만 감겨오는 것이 참 곤란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안심했는지, 아니면 지나치게 긴장한 후라 몸에서 힘이 다 빠졌는지 모르겠다. 시차 적응도 하지 못한 채로 며칠째 스트레스를 받으니 안 그래도 약한 몸이 버텨나가질 못했다. 

“언제 도착하죠?”

“곧.”

운전하는 내내 남자는 말이 없었다. 창문을 열고 줄담배를 피울 뿐이었다. 힐끗힐끗 돌아본 그의 옆얼굴에는 수치심이 역력해서 굳이 말을 걸고 싶지도 않았다. 남자의 말마따나, 한순간에 홱 돌면 바로 총을 꺼내 나쁜 짓을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가 지금 저리 돌변한 이유는 결국 존에 대한 일말의 양심 때문이겠지.

사람은 죄로 인해서 오히려 구원받을 수도 있는 것일까? 그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게 정녕 세상의 섭리라면, 매들린은 그 이치를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거부하진 않을 생각이었다. 

* * *

파르테논 신전같이 우아하지만, 지나치게 고전미를 추구한 나머지 또 어색한 느낌이 나고 마는 저택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는 이보다 더 화려한 저택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 정도면 에머스트 일가의 부에 누는 안 될 정도였다. 딱 그 정도.

“당신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잘못 하나 저지른 게 없는데 어째서 눈치가 보이는 건지, 매들린이 눈알을 도륵도륵 굴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라이오넬은 내빼고 말았다. 솔직히 그가 저지른 짓거리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눈앞의 귀기 어린 이안의 표정을 보면 더더욱 말이 되는 행동이었다. 이곳이 에머스트 일가가 소유한 저택만 아니라면, 무슨 일을 내도 족히 냈을 모습이었으니까.

“…뉴욕에서 이곳까지 그리 먼 거리는 아니요.”

미국이라는 걸 감안하면 말이지. 이안이 손목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여전히 매들린이 선물로 사준 시계를 차고 다녔다. 가죽끈이 닳은 그대로 매고 다녀서 선물한 사람이 더 무안하게 말이다.

이안 딴에는 기분이 나쁠 만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남자의 상식선 하에서 기분 나쁠 만하다는 이야기였다. 매들린이 몇 시간 동안 자신이 알 수 없는 곳에 있었다는 것도 굉장히 불쾌한 일인데, 그것도 라이오넬인지 뭔지 하는 애송이와 단둘이 함께였다니 이가 앙다물릴 지경이었다. 

“잠시 길을 헷갈려가지고요. 그뿐인데 왜 이리 화가 나셨을까?”

이안에게 사실을 말하면 당장 일을 그르칠 것 같았다. 일단 당장 살인이 나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에머스트 씨가 편찮으시다고 해서 연락은 이곳에 와서 하려고 했어요.”

“직접 위층에서 확인하고 왔소만, 얼굴 한번 마주하지도 않은 사람치고는 늦지 않았나.”

“말했잖아요, 그건 길을 잃어서…”

“저 남자가 제 본가까지 오는 길을 헤맸을까. 믿기 어렵군.”

“아, 그건 뉴욕에 도착하고 나서 우연히 만나기까지….”

남자가 변명이 긴 매들린에게 심통이 났는지 고개를 돌렸다. 

“긴말할 것 없겠소. 일단 에머스트 씨를 뵈어야 하지 않겠어, 이리 급하게 왔는데…”

“…….”

이안이 어째서 저보다 빨리 이곳에 도착했는지, 그의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묻고 싶은 질문이 많았으나 남자가 워낙 묘하게 뾰로통한지라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뾰로통하게 보인다는 그녀의 생각을 지금 주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경을 칠 터였다. 당장 에머스트 저택의 사람들도 눈치를 보며 얼어있었으니 말이다. 

계단을 올라가자 최신식 기계로 가득한 복도가 있었다. 양 벽에는 에머스트 2세가 이룬 업적들이 명화처럼 가득 걸려있었다. 각종 기사와 받은 상들로 도배가 되어있다시피 했다. 조금, 위축될 지경이었다. 

“어떠세요, 많이 안 좋으세요?”

“그 상황에 대해서 그 남자에게 이미 들었을 텐데.”

“참나, 속이 참 넓으시네요.”

명백하게 불쾌해 보이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서도 자꾸 안도의 한숨 섞인 웃음이 나왔다. 그런 매들린의 실없는 모습에 마음이 더 상한 듯 이안은 말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복도가 어찌나 넓은지, 노팅엄 저택에 필적할 만했다. 

아픈 노회장이 누워있는 방문 앞은 동향이었다. 문 앞에 흰 가운을 입은 주치의와 간호사들이 서 있었고, 수행비서로 보이는 사람 한 명이 매들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경 쓴 비서는 아주 공손하게 그녀를 맞이했다. 

“노팅엄 백작부인, 회장님께서 몹시 기다리고 계십니다.”

‘좀 곤란하긴 하네.’

몇 시간 전에 회장의 아들과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걸 모른 척하고 있어야 하는 게 조금 걸렸으나, 아픈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병실에 누운 회장은 몹시 말라 고목 나무 같았다. 형형한 두 눈은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매들린의 천성 때문일까. 

그녀가 오는 걸 보지도 않은 채, 에머스트 2세가 중얼거렸다. 

“매들린 노팅엄 백작부인.”

“…에머스트 회장님.”

“회장님이란 겉치레는 놔둬요. 어차피 죽을 때 가지고 가지도 못할 직함이니.”

“그건 백작부인도 마찬가지지요.”

매들린이 병상 옆의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재치있는 대꾸에, 병색이 깊은 얼굴에 설핏 웃음이 비집어져 나왔다. 

“편지를 읽고 온 거라면, 그 내용도 알고 있겠군요.”

“…….”

유산의 절반. 라이오넬의 말을 들어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회장이 보낸 진짜 편지는 그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존은… 내 평생의 후회입니다.”

“아드님이 기억을 다 찾은 줄 알았더라면 곧바로 알렸을 거예요.”

“…그 애가 당신에겐 일부러 숨겼더군요.”

“드문드문 장면들을 떠올리긴 했어요.”

“…다, 다 얘기해줘요.”

눈앞의 남자가 절박하게 아들과 관련된 기억의 조각들을 요구하는 모습에, 매들린은 할 말을 잃었다. 라이오넬도, 에머스트 2세도 한 사람의 부재로 거대한 흉터를 지고 살고 있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없어 그곳을 헤매는 유령처럼. 

그래서 그녀는 다시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아주 사소하고, 많이 각색된 이야기를.

* * *

“난 어쩌면 아버지와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던 걸지도 몰라요.”

“그래요? 저랑 비슷하네요.”

“..하하..”

존은 웃었다. 

* * *

“회장, 아니 에머스트 씨. 그 내용에 대해서… 사실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필요 없단 소린 안 하겠지. 이 파란만장한 시대에서 돈이 안 필요한 사람은 없어. 그게 설령 몇 대째 지독하게 부자인 댁내 남편 같은 사람이라도 말이야.”

노회장이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까 전 존의 이야기를 들을 땐 아기처럼 울망거리던 눈빛이 금세 교활하게 바뀌었다. 물론 그 정도로 총기를 유지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사실, 전부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못 하겠네요.”

“솔직해서 좋군.”

“하지만 절반이라니요. 그랬다가는 전 졸지에 영국에서 제일 부유한 여자가 되어버릴 거예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지금 밖에 변호사가 있으니 바로 부르지.”

“…이안을 도와주세요.”

“그대 남편 말인가?”

이미 며느리를 대하듯 스스럼없이 저를 총애하는 노인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라이오넬이 저리 미쳐버린 게 아주 조금은 이해되었다. 

“네. 은혜는 반드시 갚…”

“그대가 은혜를 갚을 때엔, 난 이미 죽고 없을 텐데.”

“……”

“나는 그저 순전한 이기심으로 그대에게 유산을 제안한 걸세. 왜냐. 내 유일한 상속자는 존 녀석 하나뿐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에.”

“…….”

“하지만 전부 자네에게 주었다가는, 온갖 비방과 의혹이 제기될 게 분명하기에 자제했는데 뭐가 지나치다는 거지.” 

“저는 그저 제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래. 그래도 존이 유언장에서 그러더군, 그 비참한 순간에 오로지 자신을 인간으로 대우해준 건 당신밖에 없었다고.”

곤란한 상황이었다. 완전히 거절할 수는 없는데, 또 그렇다고 이렇게 많은 재산이 지척에 있으니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나는 얼마 전까진 미칠 수도 없었어. 매들린, 내가 미쳐버리면 노망이라며 유언장을 무효화시킬 테니 말이야.”

“이미 유언장을 만드신 건가요?”

“…그래. 변호사의 관리 감독 아래, 내 가장 믿을 만한 입회인을 두고서 작성했어. 이미 밀봉한 채 법원 문턱까지 가있지.”

“…존.”

남자가 제 이름을 불렀으니 그녀도 남자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존은 존과 똑같지만, 또 다르다. 약간의 자기비하가 섞인 독설적인 유머, 고집스러움. 그리고 이상한 자기 파멸적 기질까지. 

“존, 그렇다면 알려줘야 할 게 많을 것 같아요. 그래야 당신의 뜻에 따라 유산을 관리할 수 있을 테니까.”

“하! 말했잖아. 난 내 혈육은 한 명 빼고 다 증오스러워. 아내는 이미 죽어서 있지도 않지. 회사는 나 없이도 잘 굴러가고 있고, 지분은 이미 그 한심한 ‘가족들에게’ 넘겼소. 당신에게 물려줄 건 그걸 제외한 내 사적인 재산의 반일 뿐이야.”

긴긴 문장을 토해내고 난 뒤 노인은 잠시 기진한 듯 눈을 감았다. 

“나에게 유지 같은 건 없어. 그저 수치스러운 이름을 남겼을 뿐이지.”

사람들에게 증오를 부추기고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지. 이제 그 가족이란 이름으로 계속될 일이지. 그걸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지.

매들린이 곰곰이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에머스트 2세와 눈을 마주쳤다. 

“재단을 만들어볼까 해요.”

“…난 록펠러처럼 신앙심이 깊은 사람도 아니야.”

“언론의 자유를 위해 헌신한 사람을 위한 상 같은 걸 만드는 거예요. 회장님의 이름을 따서.”

“…사후의 명성 따위는…”

“그건 아무래도 좋지요. 하지만 회장님이 이룩한 부인걸요. 그걸로 훌륭한 보도로 인류의 역사를 진보시킨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상을 만드는 거예요.”

“…거창하군.”

하지만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그저 수줍어 보일 따름이었다. 

“그걸로 내가 구원받아 천국에 가진 않겠지. 하지만, 매들린, 자네 같은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어.”

“저를 얼마나 봤다고 믿으시나요?”

“…오, 내가 사전 조사를 안 했을 것 같나?”

“…….”

“존의 유언장은 곧바로 내게 왔어. 그 편지를 받아든 이후로, 나는 당신을 계속해서 예의주시해왔지. 영국에서 미국으로, 또다시 영국으로 가는 걸 보며 늘 마음속에 죄책감을 품고 살았지. 당신을 외면했었으니까. 이제 죽기 전에 올바른 행동을 하게 해줘. 내 아들을 도운 당신을 돕는 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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