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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알고 있었어요 (99/121)

98화. 알고 있었어요

“매들린.”

“존, 필요한 거 있어요?”

“…물…. 목이 말라서…”

컵에 물을 따라, 쿠션에 기대앉은 남자에게 건넸다. 천천히 유리잔을 입술에 대고 기울이자 남자가 간신히 목을 축일 정도는 되었다. 여전히 바쁘고 힘든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쟁은 한창이었고, 이안에게 오는 편지는 감감무소식이었으며 매들린의 손등은 터져 쓰라릴 지경이었다. 

남자의 입술 사이로 흐르는 물을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냈다. 일을 마친 매들린이 뒤를 돌아서려던 차에, 존이 입술을 달싹이며 그녀를 멈춰세웠다. 

“기억이 나는 것 같습니다.”

평소의 색색거리는 목소리가 아닌, 또렷하고 명징한 음성에 놀랐다. 마치 뒤를 돌아보면 전혀 다른 사람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존은 여전히 존이었고, 그는 전신에 화상을 입은 모습 그대로였다. 

“기억이요?”

“전..부는 아니지만.. 몇몇.. 장면들이…”

간혹 두통을 호소하면서도, 그는 조각조각 난 기억의 파편들을 되찾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존은 정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남자의 얼굴…입니다.”

“네, 계속 말씀해보세요.”

당장 의사를 불러와야 할 것 같았으나, 그러는 사이 존의 기억이 사라질까 두려웠다. 빠르게 노트와 펜을 꺼내 뭐든 옮겨 적을 채비를 마쳤다. 

“…갈색 머리, 푸른 눈, 천사일지도, 모르겠군요.”

그 말을 하며 존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울면서, 내게… 뭐라고 말하는데, 나는… 화를 내고… 그 사람을 울렸어요.”

“…….”

이 이상 고통스러울 수 없이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남자였으나, 지금의 그는 훨씬 더 괴로워 보였다. 

마치, 무간지옥의 한가운데서 조용히 벌 받는 사람처럼. 그 모습에 매들린은 잠깐 손을 떨었다. 그만하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안정을 취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고민스러웠다. 

“…모르겠어요, 매들린…. 너무, 많은 후회가…. 나를 목 조르는…”

“힘들면 굳이 기억해내려 무리하지 않아도…”

“오, 하지만…. 나는 기억해야만 해요.” 

그리고 이 기억은 말이에요. 당신과 나 사이에 맺힌 비밀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드는군요. 

* * *

오랫동안 준비한 살인 계획이었을 터인데, 라이오넬의 눈가에 당혹감이 스쳤다. 확실히 엔조와는 다르다. 오랫동안 손에 피를 묻히며 살아왔던 그자와는 달리, 호기만 앞섰지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긴장하고 있다. 

“무슨 소리지?” 

“나를 여기서 죽이면 후회할 거라고요.”

“너 따위 여기서 죽이고 버리면 그만이야. 아무도 못 찾아. 네 남편이 아무리 잘났어도 못 찾는다고.”

“살인하고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어요. 당신은 후자…”

“어디서 목사님 훈계야!”

라이오넬이 악귀 같은 얼굴로 총을 하늘에 발사했다. 작은 권총이지만 그래도 총은 총인지라 귓전이 울리듯 아팠다. 

“당신의 형이 제게 한 말은 달라서요.”

“…….”

“세상에 둘도 없는 천ㅅ-.”

“한마디만 더해봐.”

됐다. 여기까지 주저했단 이야기는 이미 그가 골든 타임을 놓쳤단 이야기나 진배없었다. 

병원에서 일할 적 참전군인들이 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군과 적군 참호가 워낙 가까이 붙어있다가 보니 아군보다도 더 정이 붙는 적군들도 있었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과 어쩌다 서툰 언어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들이 사람처럼 느껴져서 도저히 죽일 수 없는 때가 온다고. 가장 잔인한 게 사람인데, 또 인간성을 포기할 수 없어서, 결국 총을 애먼 데에다 쏘고 울면서 비겁자로 전락하는 게 사람이었다. 

인간적인 동정심이 개입되는 순간 살인은 실패로 돌아갈 확률이 높다는 걸, 그렇게 배웠다. 

“전혀요. 그보다, 형님이 당신에 대해서 한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나요.”

이 천일야화의 노름은 성공할 거다. 왜냐하면 매들린은 남자가 가장 원하고 듣고 싶어 하는 걸 가지고 있으니까. 

* * *

에머스트 2세는 자신이 직접 만든 감옥 같은 성채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뒈지는군, 덤덤하게 생각하면서. 영국으로 보낸 사절단이 무사히 매들린 노팅엄을 데리고 오길 기다리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편지도 보냈다. 직접 영국으로 가 그녀를 데려올 사람도 보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런데 어찌 이리 고통스러운가. 

[아버지가 만든 신문은 쓰레기예요. 나는 그런 짓으로 먹고 살 수 없어요.]

[헛바람만 든 게다. 그게 다 네가 어려서 고생을 안 해서야! 헝가리 출신 이민자로 태어나봐야…]

[…….]

[이게 뭐냐.]

[자원입대 신청서입니다.]

[…….]

애초에 비행기니 뭐니 하는 취미를 붙여주지 않았어야 했다. 너무 곱게만 키워서, 좋은 것만 보여주고 키워서 저리 객기를 부리는 걸까 싶기도 했다. 목숨보다 아끼는 아들은 자발적으로 군대로 떠났고 그 빈자리는 그를 오랜 세월 동안 좀먹어갔다. 하물며 그 아이가 죽기 전 몇 년간을 타국에서 고생했다는 소식은 그를 미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살아있는 둘째 아들, 라이오넬을 보면 절로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죽은 아내가 낳은 자식이지만 제 아들은 아니었다. 

‘둘째 아들이지만 아들은 아니다.’ 언뜻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문장은 그의 입장에선 말이 되었다. 곱상하고 흰 피부, 형처럼 곧은 이목구비를 가졌지만 크면 클수록 제 핏줄이 아니란 것만 분명해졌다. 일단 에머스트 일가는 전부 금발이었으니까. 단순히 외탁이라 치부할 수 없는 문제였다. 

갓 태어난 아이를 보고서 이 가문을 망치러 나타난 소악마나 다름없다 여겼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이 키워야 했다. 아이를 낳다 죽은 아내에게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녀석에게 제가 피땀을 흘려 이룬 모든 것을 내어준다니, 어림도 없는 소리! 그가 만든 미디어 제국은 영원해야 했으나 그게 꼭 가족기업이라는 형태로 이어질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그 제국의 영광이 그 소악마에게 향할 바에야 전부 불 지르고 태우는 편이 나았다. 

…하나 더해서 줄곧 석연치 않았던 점이 있었다. 제 형을 바라보던 그 시선은.

‘죄다. 죄야. 오 하느님, 제발, 저놈에게 지옥의 불길을 사하시고 나를 구원하소서.’

에머스트 2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저 독사 같은 녀석을 내던져 버려야 했어. 그랬다면 내 아들은 죽지 않았을 거야. 

에머스트 2세는 자신이 직접 만든 감옥 같은 성채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 * *

“나는.. 나는 한 번도, 말한 적이.. 그럴 리가 없어. 형이 알았을 리가 없어.”

남자가 들고 있는 총은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 옆에서 멀뚱히 서 있던 운전사가 한마디 덧붙였다. 

“지금 쏴버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도련님.” 

“당장 꺼져.”

운전사가 헛, 숨을 멈추더니 총을 다시 홀스터에 넣고 느릿느릿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갈대밭에 두 사람만 서 있는 형국이었다. 

“…존은 알고 있었어요.”

“형을 안다는 것처럼 그렇게 지껄여대지 마.” 

“글쎄요. 당신이 아무리 그렇게 을러대도 저는 그의 친구였는걸요.”

“하하…. 그래? 그러면 그럴수록 내가 너를 죽여야 할 이유가 더 느는걸?”

당연하지 않은가. 라이오넬의 입장에선 이렇게 된 이상 더더욱 매들린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품어서는 안 될 마음을 제 손위 형제에게 품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안 되니까. 존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매들린은 그 비밀과 함께 반드시 죽어야만 했다. 

“저도 그 남자가 당신인 줄은 몰랐어요. 아까 전 당신의 행동을 보고 짜 맞추어낸 것일 뿐이죠.” 

“…….”

“존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울었어요. 그 남자가 당신이 맞다면, 당신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들은 라이오넬이 속이 뒤집히는 듯 무릎을 굽혀 가슴을 쥐어뜯듯 괴로워했다. 

“오히려 용서해야 할 건 존이야. 난 그 사람의 동정심을 자극했어. 그를 죽인 건 나야. 내가 객기만 안 부렸다면 존은 입대를 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렇게 죽지도 않았을 테니까.”

“…….”

그가 말하는 객기가 무엇인지는 굳이 캐어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매들린은 자신이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느꼈으니 말이다. 침범하지 않아야 할 영역이었다. 

[그 사람이 나 때문에 상처받고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군대에 갔어요.]

[…….]

[지금은 그저……. 한없이, 불쌍하군요]

[존…, 그러면 그 사람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있나요?]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냥, 그뿐입니다.]

“네가 그렇게 존과 영감의 환심을 동시에 사는 꼴을 보니 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날 죽일 거예요?”

“…하….” 

새삼 도덕적인 말로 비난을 퍼붓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 사람은 이미 자신의 지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귀가 된 걸지도 모르니까. 물론, 그렇다고 섣부른 동정이나 이해 같은 걸 할 일도 아니었다.

“존은 당신이 행복하길 바란다고 했어요.” 

“…….”

“자, 그러면 당신 아버지가 저를 초대했다는 건 사실이겠네요?”

일부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씩씩하게 표정을 고쳐 말하는 매들린을, 라이오넬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런 그를 무시하고 매들린은 차 뒷좌석에 탔다. 

“그 저택으로 당장 날 데려다줘요.”

* * *

멀리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운전사를 놔두고 차를 출발시키는 라이오넬을 보며 매들린이 걱정했다. 

“저 사람은 놔두고 가도 돼요?”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 마을이 있어. 알아서 하겠지.”

“…….”

둘은 차 안에서 말이 없었다. 흉악한 죄인과 바보 같은 여자가 같이 길을 가는 꼴이라니. 매들린은 웃음이 비집어져 나오려 해도 정작 나오는 건 바람 빠진 딸꾹질 소리뿐이었다. 

“담배 피울래?”

“…별로요.”

“…….”

“근데, 내가 당신을 살인미수 및 협박으로 경찰에 신고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냥 감옥에 가야겠지.”

“…심경의 변화가 너무 지나치네요. 아까까진 악귀처럼 굴었으면서 갑자기 의욕을 다 잃었어요. ”

“아직 총 안 버렸으니 운을 너무 시험하지는 마.” 

매들린은 입을 다물었다. 아직 흥분한 남자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이었으니, 조용히 있는 게 최선이었다. 

남자가 한 손으로 핸들을 지탱한 후 다른 한 손으로 담배를 피우려 꼼지락거렸다. 연초 한 대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켜는데 계속 헛손질이 났다. 결국, 보다 못한 매들린이 라이터를 빼앗아 불을 붙여줬다. 

그녀는 창문을 레버를 움직여 열고 환기를 시켰다. 이안이 갑자기 보고 싶었는데, 거기에는 딱히 명명할 수 없는 애틋한 이유가 있었다.

미국의 풍경은 납작하고 어쩐지 외로웠다. 도덕도, 인간의 희로애락도 전부 압도해버리는 대자연이 어쩐지 무심해 보였다. 

빨리 도착해서 무전을 칠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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