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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어째서 (98/121)

97화. 어째서

서명까지 마치자, 안도의 한숨이 비집어져 나왔다. 그런데도 정신 하나는 말짱했다. 

무서운 일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정말이지 무서운 일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결연하게 마주했을 결과에 애태우고 절망하다가 끝내는 안도하게 만든다. 감정의 파고를 더 거세게 만들고, 쓸데없는 희망 때문에 웃고 울게 만든다. 판돈이 제 몸뚱이 하나라면 모르겠는데, 매들린과 닿을 수 있는 기회까지 걸려있다고 생각하니 협상 테이블 위에서 절박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처량한 심경이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유익한 만남이었습니다.”

테오도어 체이스 회장이 능글맞게 웃으며 이안에게 손을 뻗어왔다. 그 손을 맞잡으며 이안은 나른하게 웃었다. 

“덕분에 당장의 숨돌릴 기회는 주어지겠군요.”

“저는 자선사업가는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한순간도 잊지 않을 거고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노회장이 물끄러미 이안을 보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당신이 내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지 잠시 생각도 해봤는데, 차라리 이리 만나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당신이 내 자식이었다면, 분명 조급해졌을 테니까요. 누구든 이겨먹으려는 성질머리라니.

* * *

“노친네가 한 그 말, 기분 나쁘라는 말이었지?”

홀츠먼은 여전히 분을 못 이기고 씩씩거렸다. 사실 화를 낼 수 있는 게 축복이었다. 어떻게 붙잡은 동아줄인데. 적어도 가족회사는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을 번 셈이었다. 지루한 서류작업에 끝이 보이자 뇌리에 스치듯 생각이 떠올랐다. 

시계를 확인하자 이미 오후 세 시였다. 

“매들린은 이미 도착했을 것 같은데.”

“사람을 보냈다 하지 않았어? 호텔에 있겠지.”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을 보내긴 했는데, 매들린을 본 적 없는 사람이라 그녀를 잘 찾을지 걱정이었다. 이런 걸 쓸데없는 걱정이라 핀잔줄 이도 있겠지만, 충격적인 사건을 연거푸 겪은 이안으로서는 틈새 하나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사방 민심이 흉악한 건 더더욱 명백한 일이어서, 매들린이 행여나 불쾌한 일을 겪을까 걱정스러웠다. 

물론, 그렇게 걱정하는 게 어쩐지 웃기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녀에게 모진 소리를 퍼붓고 한심하게 보인 주제에 말이다. 

“호텔에 전화를 한번 해야겠어.”

“그러시게나. 나는 여기서 좀 더 확인하겠네.”

* * *

“이안이 에머스트 씨를 보냈으니, 그이도 알고 있겠군요?”

그녀가 편지를 받은 일이며 그에 얽힌 뒷사정까지 모두.

라이오넬 에머스트는 이미 이안과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그러니 이 모든 일들을 우연의 일치라 치부하기는 어려웠다. 

“네. 제가 먼저 말씀드렸죠. 부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차가 뉴욕을 벗어나 점점 외진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뉴욕 근교가 외진 곳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모든 게 이상할 것은 없는데, 매들린의 마음속에 어쩐지 석연찮은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안을 어디서 만나셨죠?”

“그야…, 신사들이 묵는 사교클럽이 여기도 많지 않습니까. 늘 누가 오면 소문이 돌지요.”

그럴 리가? 지금 분초를 다투는 위급한 사건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을 남자가 사교클럽을 다닐 리 만무했다. 게다가 이안은 영국에서부터 그런 사교 행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시건방진 애송이들이 제 깃 세우는 꼴이 웃기다고 했을 정도니 말이다.

“아버지께서 정말 많이 위독하신가 봐요.”

사실 선상 파티에서 라이오넬을 처음 봤을 때부터 존 에머스트 2세가 편찮은 건 알고 있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돌이킬 수 없이 쇠약해졌다는 게 이해는 갔다. 

“그렇죠. 지금은 정신력으로 버티고 계십니다.”

그 말을 하며 라이오넬은 힘겨운지 차창 밖을 바라봤다.

* * *

‘이상해.’

마중 나가라 보냈던 사람은 연락도 안 되고, 호텔에서는 매들린이 체크인하지 않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여자가 있는 위치를 짐작할 수 없자마자 곧바로 머릿속 경보가 울렸다. 편집증적일 정도로 특정 인물에 대해서는 경계심이 발달한 남자는 머릿속 시나리오를 하나둘 점검하기 시작했다. 

길을 잃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부랑자의 습격? 소매치기? 더 나쁘게는 흉악범의 소행? 

엔조 라오네. 그 빌어먹을 짜증 나는 인간말종의 얼굴이 떠오르자 피가 식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몇 년 전의 연적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그의 사업은 여전히 번창하고 있었다. 지금은 할렘에서 무료 급식소를 열었다는데, 마피아 놈들이 하는 짓거리가 다 거기서 거기지. 의적 로빈후드 행세라도 하는 거다. 

아무 이유 없이 욕하고 싶은 상대라 하더라도 그를 의심할 근거가 많지는 않았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서, 그녀가 나를 비웃어줬으면 좋겠군.’

왜 그런 걸 걱정하고 그런대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묻다가 푸스스 웃어버리고 말 그 표정을 빨리 보고 싶었다. 칭찬도 받고 싶었다. 미안하다고도 하고 싶었고. 그녀를 안고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않게 강해지겠다고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뭔지, 약해질 순간을 한 번도 허락하지 않는 게 제 인생인 모양이었다. 일단 빨리 쪽지를 비서에게 건네 저택으로 전보를 보내게 하고, 호텔로 향했다. 무작정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이때, 누구를 찾아가야 하나. 이안의 머릿속에서 인쇄된 것처럼 뚜렷한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럴 때는 가장 본능에 기반한 선택을 내려야 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 * *

“솔직히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매들린이 나직이 말했다. 

“제가 안 그래도 힘든 분을 더 힘들게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아버지는 형님을 끔찍할 정도로 아끼고 사랑했으니, 형님이 좋아한 사람은 무조건 좋아할 거예요.”

매들린은 어쩐지 그 말에 깔린 냉소를 파악할 수 있었다. 사람의 감정에 둔하다 생각했는데, 기시감을 찾아내는 데에는 능숙했기 때문이다. 오래전, 철없던 에릭이 저에게 접근하면서 이안에 대해서 비꼰 적이 있었다. 그런 차남의 콤플렉스가 느껴졌다. 

‘어째서지.’

하지만 이미 존은 죽었다. 어차피 형제들 중 가장 연장자는 라이오넬일 터였고 그가 질투를 할 이유는 정말이지 하나도 없었다. 

“그럴 리가요. 전 그저 이야기만 들어줬을 뿐이라 솔직히 너무 과분한 초대인 것 같아요.”

“…노팅엄 부인. 저는 부인을 처음 본 순간부터, 이렇게 나오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

“부인은 착한 사람이에요. 배 위에서 처음 뵀을 때부터 확실히 느낄 수 있었죠. 세상을 긍정하고 아름답게 보고, 누구에게나 선의를 베풀려는 그런 사람 말이에요.”

생각해보면 딱히 별거 아닌 인상비평일 수도 있었으나 어째선지 싸늘하게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 불안감의 정체를 정확히 짚을 순 없었다.

머리를 빠르게 돌려, 병원에서 존이 했던 이야기들을 복기했다. 어렴풋이 기억인지, 상상인지 생각났다면서 동생들에 대해서 뭐라고 했었는데…. 그리고 매들린은 그걸 전부 노트에 옮겨적었었다. 그의 신원을 찾을 실마리라도 될 것 같아서 말이다. 

“저는 착한 사람이 아닌데요.”

“착한 사람이죠. 그 누구도, 대가 없이 온몸이 불에 지져져 죽고 싶어하는 남자의 넋두리를 들을 만큼 참을성 있진 않으니까요. 또,”

그가 한숨을 쉬면서 무감하게 문장을 이어나갔다. 

“온몸이 반으로 부서진 백작의 아내로 살면서 기부까지 하시다니요.”

그가 조용히 웃었다. 차는 빈 공터에 멈춰 섰다. 조금만 도시를 벗어나도 사방이 고요한 게 미국이었다. 갑자기 갈대밭이었다. 

“당황스럽군요.”

이런 상황은 정말 지긋지긋했다. 

“저도 유감입니다. ‘착한’ 사람을 해하는 건 별로 취향이 아니라서.”

남자의 품에서 아주 작은 권총이 나왔다. 

“이거, 가까이서 쏘면 꽤 아파요.”

* * *

수지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 오라는 매들린은 안 오고 백.작.님은 여기 무슨 볼일이신지요.”

“…구면이군요.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매들린이…”

“설마 없어진 건 아니죠?”

“…….”

“설마요.”

이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꼴이람. 매들린 같은 세상 순한 애를 건들다니 다들 진짜 지옥에나 꺼져버려라. 수지는 딱 삼 초간 욕설을 욱여 내뱉더니, 침착하게 자신이 받은 편지를 보여줬다. 

“처음에는 우리 숙소에서 자고 간다고 했거든요. 그러다가 백작님 묵는 호텔로 가는 걸로 약속이 바뀌었어요.”

“……?”

“에머스트인지 뭔지를 만나러 간다고 적혀있더군요. 누군지는 차차 설명해준다는데, 설마 저 작자랑 얽힌 일, 저기, 백작님?”

이안은 편지를 손에 쥔 채 거리로 나갔다. 두려움보다는 극렬한 분노가 앞섰다. 인과를 그려낼 순 없어도 적어도 의심 가는, 욕설과 증오를 퍼부을 수 있는 상대 하나는 확실히 생겼으니까.

매들린을 건드린 사람은 이안의 분노와 먼저 마주해야 할 것이다.

오, 그 작자의 목을 비틀거나 배를 가르는 건 그에게 무척 괴롭고도 즐거운 일이 될 게 분명했다.

* * *

“… 절 죽일 생각으로 편지를 조작한 건가요?”

“반만, 딱 반만 조작했어요.”

라이오넬은 매들린을 차에서 내리게 한 다음 고개를 까딱였다. 운전사 역시 품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당신을 찾는다는 건 사실입니다. 죽기 전에 그 노인네가 갑자기 미쳐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재산의 반을 떼다 준다는데 어느 자식이 눈이 안 뒤집히겠어?”

아름다운 얼굴의 남자가 이토록 역겨워 보일 줄은 몰랐다.

라이오넬은 매들린이 그 재산을 독차지할 거라 이미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군. 물론, 저 사람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고 해선 안 돼.’

그보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매들린이 천천히 말했다. 

“저를 살해하는 거,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닐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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