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다시 미국으로
금방 도착하겠다는 편지를 써 에머스트 2세의 편으로 부쳤다. 일을 저질러놓고 보니 막막했지만, 그렇다고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 당장 이안에게 전보를 보내자. 이사벨의 집을 향하면서 생각했던 계획을 그대로 실행하는 게 맞았다. 뉴욕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그에게 부담감을 더 얹을 생각은 없었으나, 말없이 떠날 수는 없으니 최소한 전후 사정을 설명할 필요는 있었다.
{ 뉴욕에 방문할 예정. 가장 빠른 배편으로 출발. }
전보는 간결하고 짧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머리가 더 아파져 왔다. 남자에게 환자 X에 얽힌 이야기와 에머스트 씨의 편지에 대해서 어찌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 에머스트 씨를 뵐 일이 생겨서 뉴욕에 가야 할 것 같음. }
흠. 이렇게 써놓으면 더 무슨 소리인지 모를 것 같다. 괜히 더 걱정만 시킬 것 같았다. 애초에 에머스트 씨와 저가 무슨 볼일이 있는지 의아해할 것 같았다.
머리를 싸매면서 단어를 넣고 뺐다가 결국 필요한 정보만 남기고 다 빼기로 했다.
{ 뉴욕 기준 토요일 오전 중 도착 예정, 플라자 호텔에서 봬요. }
전후 사정은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터였다.
* * *
“정말 혼자 가도 괜찮겠어?”
“…그래도 뉴욕에 있는 친구네 집에서 머무니까요. 그리고 제가 그곳에서 산 세월이 있는데, 밤에 혼자 다니는 것만 아니라면 나름 안전하답니다.”
물론 마피아와 얽힌 소동이 있긴 했지만, 그것까진 부러 알릴 필요는 없었다. 적당히 생략의 꾀를 부리는 수밖에.
선대 백작부인은 조금 걱정하는 눈치였으나, 매들린의 말마따나 뉴욕을 가장 잘 아는 건 바로 그녀 본인이었으므로 딱히 뭐라 말리진 않았다.
맥도먼드 부부는 순순히 방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뉴욕은 무법천지요 마수들이 들끓는 소굴이라 생각하는 세바스천은 경악했지만, 그녀가 신신당부하자 차츰 진정했다.
마침내 출발 날짜가 잡혔다. 단출한 짐을 싸며 편지의 내용을 곱씹었다.
‘존의 아버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가끔 존과 나누던 대화 내용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제대로 기억해내야 했다. 그래야, 그의 아버지에게 조금이라도 더 추억을 돌려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던 차, 전보에 대한 답이 돌아왔다.
{ 마중 나갈 사람을 보낼 테니 같이 오시오. }
“…….”
그래도 오지 말라거나, 뭐라 채근하는 메시지는 아니었다. 물론 전보는 짧으니 그 속에 담긴 마음을 어찌 알까.
‘이안이 이리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고작 이런 일로 귀찮게 해도 되는 걸까 싶네.’
물론 매들린 딴에는 무척 중요한 일이지만, 그래도 죽네 사네 사투를 벌이는 이안의 절박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런 생각에 살짝 풀이 죽을 것도 같았지만, 그래도 마음에 맺힌 일도 풀어내고, 이안의 얼굴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일에 대해서 사과도 해야겠지.’
전보 쪽지를 소중하게 품 안에 넣은 매들린은 이제 정말로 떠날 준비를 마무리했다.
* * *
대서양의 바다는 언제나 검푸르스름하니 불투명했다. 청정한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바다의 크기 자체가 다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광막한 해수면을 바라볼 때면, 매들린은 어쩐지 한없이 스스로가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그랬다.
* * *
다시 찾은 뉴욕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20년대의 흥청망청한 축제 느낌은 완전히 소강 되어있었다. 길거리는 더러웠고, 문을 닫은 가게들이 더러 보였다. 노숙하는 사람들이 힘없이 늘어져 있는 광경이 어쩐지 을씨년스러웠다.
축제는 완전히 끝이 났다. 이제 정산의 시간이었다. 물론 그 대가는 약자들이 더 크게 치러야 하겠지만 말이다.
배에서 내린 매들린을 맞이한 건 뜻밖의 남자였다.
“…에머스트 씨?”
라이오넬이 방긋 웃으며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아, 노팅엄 부인. 저희 아버지와 노팅엄 백작께서 친분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대표로 부인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이안이 보낸다는 사람이 라이오넬인 모양이었다. 매들린이 표정을 다잡고 한껏 위로의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형님의 일은 정말, 유감이에요.”
“이렇게 가까이서 뵀는데도 은인을 몰라본 게 참 안타깝네요. 아버지께서 말씀 안 하셨더라면 까맣게 모르고 지나갈 뻔했죠.”
번듯한 얼굴의 청년이 능숙한 손길로 매들린을 차로 이끌었다. 신원이 분명한 익숙한 사람의 모습에 안심한 그녀는 그가 인도하는 대로 뒷좌석에 앉았다.
“플라자 호텔로 가는 거죠?”
“곧바로 아버지께 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안을 먼저 보고 가야 할 것 같은데요?”
여기까지 왔는데 남편을 보지 않고 뉴저지로 가는 건 이상했다.
차에 타자마자 무언가 의아함을 느낀 매들린이 물어오자, 라이오넬이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응수했다.
“저희 아버지가 지금 많이 위독하십니다.”
“……!”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라도 로엔필드, 아니 노팅엄 부인과 말씀 나누고 싶다고 하시거든요.”
그러니 지금 당장 출발해야겠습니다. 운전사에게 출발할 것을 알리는 모습이 우아했다. 선상 파티에서, 또 여행지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
* * *
돌아가는 꼴이 무척이나 더럽다. 누가 판을 짜놨는지, 아주 흉했다. 열 살 이후로 흥미를 잃은 체스였지만, 지금 상황은 마치 흑백으로 짜인 판 위에 말을 세워둔 느낌이었다. 미국의 은행가들은 냉소적인 걸 뛰어넘어 적대적이었다.
이런 불황의 시기에는 그렇다. 모두가 서로를 믿지 못한다. 신용은 마르고 서로가 서로로부터 빌려준 돈을 받으려 절박하게 악다구니를 쓰지.
섣불리 금본위제로 돌아가려 한 게 실수였다. 아니, 나라의 병증은 그보다 깊었는지 모른다. 내실 없는 겉뿐인 성장은 금방 제 밑천을 드러냈다. 파운드화의 가치가 맥을 못 추고 떨어지면서 영국 내 금이 빠른 속도로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나마 미국회사에 투자를 많이 한 이안이었지만, 지금 그는 그렇기에 오히려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미국이냐, 영국이냐.
유치한 진영논리지만, 인간은 원래 이런 식이다. 패권은 나눠 가질 수 없고, 힘들 때일수록 전선은 명확해져 간다. 미국은 이미 영국과의 전쟁계획을 굉장히 구체적으로 세운 상황이었다. 두 국가 간의 관계는 무척 좋지 않았다.
이럴수록 침착해야 한다.
울거나, 화를 내도 전혀 소용없단 걸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오로지 본능에 몸을 맡기고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더욱 불길했다. 앞으로 몇 년 안에 지난 전쟁이 끝났을 때부터 우려했던 일들이 터지기 시작할 것이다. 은행가들은 지나친 욕심을 부렸고,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리는 데에 일조했다. 절대로, 절대로 그 나라가 갚을 수 없단 걸 알면서도.
‘결국, 그 대가가 어떤 방식으로든 돌아올 거야.’
저를 포함해 악귀들의 판이지만, 당장 숨돌릴 기회만 주어진다면, 무엇이든 하겠다. 그게 제 다른 다리를 판돈 위에 올려놓는 행위라도 말이다.
“솔직히 말해, ‘노팅엄 씨’의 제안은 감사하지만 말입니다.”
머리가 벗겨진 노회장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팅엄 백작 각하니 하는 호칭의 무용함이 여기서 드러난다. 그래. 돈은 사람을 평등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가장 솔직하게는 만들지. 이안은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담보물로 제시한 자산이 저희에겐 그리 안전해 보이지 않는군요.”
지금이 몇 번째 거절인지 모르겠다. 물론 지금 말하는 노인의 속 역시 바싹바싹 마를 터였다. 돈을 가지고 있는 자는 가지고 있는 자대로 이 상황에서 최대한의 이득을 내고 싶을 테니까.
“새로운 절충안을 만들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절충안이라 함은, 그러면…”
그가 제시한 2안에 홀츠먼이 욕을 지껄였다.
“너무하시는군요. 그 정도 돈에 지분을 그렇게 갈라 가지시겠다 하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힘들게 쌓아올린 탑인데, 홀츠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체이스 씨. 이렇게 비열한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그 말, 그대로 돌려드려도 될까요?”
노인은 전혀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
“노팅엄 씨. 사실 당신의 회사에 대해서 그간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
이안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홀츠먼이 멋쩍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사람이 모든 걸 취할 수는 없어요.”
그걸 잊은 대가를, 지금 사람들이 치르고 있는 겁니다.
* * *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라이오넬과 매들린은 차창 너머 바뀌는 풍경을 바라봤다.
“부군의 사업은 번창하고 있겠죠?”
나른한 표정으로 의표를 찔러오는 통에, 매들린은 질문의 뜻을 한 박자 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 네. 힘든 일도 있지만 잘 될 거라 생각해요.”
“…아, 그렇겠군요. 다들 힘든 시기 아닙니까.”
에머스트 가문이 운영하는 신문사 역시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지만 견딜 만했다.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만평을 실으며 사람들을 선동하고 자극하는 통에 판매고가 쏠쏠했다. 그런 사정을 얼추 아는 매들린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일이에요. 존은, 그러니까 에머스트 씨의 형님은…, 신문사 이야기는 한 적이 없거든요.”
“그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형님은, 신문을 파는 일이 무슨 치부라도 되는 양 생각했죠. 문학을 사랑하는 고결한 사람이니 당연하지만.”
비꼬는 투는 전혀 없었다. 그보다는 약간 쓸쓸해 보이는 표정에, 매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존은 고결한 사람이에요.”
그 말을 들은 라이오넬의 표정에 스친 복잡한 냉소를, 매들린이 파악하기엔 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