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미국에서 온 우편
-- 우리 그것만 생각해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걸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어쩔 수 없는 일을 붙잡고 씨름하지도 말아요. 운명이 우리에게 시킨 일들은 변명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거예요.
- <밤으로의 긴 여로> 발췌, 유진 오닐 作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게 울부짖었을 때는 내내 꽉 옥좼으면서, 막상 사랑한다고 할 때는 먼저 사라지고 마는 남자가 미웠다. 이 형용모순의 상황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절망하기는 쉬웠다. 그에게 손에 잡힐 만큼 단단한 확신을 주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이 상황에 대해서 손쓸 힘도 없는 제 무력함에 대한 죄의식. 어느 쪽이든 빠져들기 쉬운 함정이었다.
그러나 인생이란 묘한 것이라서, 한 길이 닫히면 어김없이 또 다른 길이 열리곤 하는 것이다.
* * *
이안은 미국으로 떠났다. 아마도 결정적인 협상안을 도출해내기 위한 출장일 터였다.
‘이 시도가 실패하면 어찌 될지 알 수 없겠지.’
기껏 힘내서 밝게 굴어봐도, 처진 집안 분위기는 또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언제 이곳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용인들의 불안이 팽배했다.
‘일어나기 싫다.’
하루하루 좋지 않은 소식들을 듣는 것도 지친다. 빳빳하게 다린 신문에는 로스차일드가 운영하는 오스트리아의 은행이 파산했다는 소식이 실려있었다. 신문을 고이 접어 다른 사람들이 읽게 놔두었다. 제 몫의 편지를 하나둘 기계적으로 개봉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재단의 수혜자들이 보내는 감사편지들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하나하나 주의 깊게 읽었을 편지들인데 평소처럼 읽기에는 어쩐지 마음이 무거웠다. 앞으로 더는 사람을 도울 수 없을 것 같아 한없이 마음이 착잡했다. 이 상황에서 후원이니, 장학금이니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들렸다.
그렇게 편지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난 다음 마지막으로 손에 집힌 것은 얇은 종이봉투였다. 미국에서 온 국제우편.
‘이안의 편지가 벌써 도착했을 리는 없는데?’
뭔가가 기이함을 느낀 매들린이 종이봉투의 겉면을 살폈다. 파크로우 카운티, 뉴저지. 매들린이 모르는 건물 이름이 적혀있고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없었다.
“그쪽 동네는 가본 적이 없는데.”
뉴욕이나 롱아일랜드 정도만 방문해본 매들린으로서는 낯선 지명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발신인 이름조차 적히지 않아 의문이 더해갔다. 나이프로 봉투를 조심스럽게 개봉하고 안에 든 내용물을 꺼냈다.
아마도 이안의 친구들 중 하나가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었다.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 매들린 로엔필드 양에게. }
타자기로 쓴 글귀에 매들린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그녀의 결혼 이전 성을 알고 있다.
{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겠죠. 언제부터인가 당신이 사라져서 간호사들에게 물었더니, 그 누구도 제대로 된 답을 해주지 않지 뭡니까. 답답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푸념할 시간이 없어요. 아마 난 곧 죽을 테니까.
이제 와 죽음이 무섭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보다 명예롭게 숨을 거두는 게 낫겠다 싶었으니까요. 물론 이곳에서의 생활이 늘 불행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당신 덕분에 깨어있는 모든 순간이 고통스럽지는 않았어요, 그건 매들린만이 부릴 수 있는 마법이었습니다.
매들린, 난 이미 모든 것을 기억했어요. 당신의 간호와 설득 덕분에 내가 누구였는지, 가족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전부 깨달을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기억하자마자 밝힐 수 없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누워있단 이야기를 들으면 가족들이 실망하고 아파할까 봐 두려웠거든요.
하지만…. 이제 그것조차 내 이기심이었단 걸 알게 됐어요. 막상 난 당신이 말도 없이 사라지니 허전하고 걱정되었으니까요. 저와 당신 같은 사이도 그럴진대, 피로 이어진 부모님은 어떠했을까요?
우리가 다른 세상에서, 다른 사람으로 만났더라면 더욱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니까요.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요.
당신의 존, 환자 X가. }
* * *
몇 번을 읽고 또 읽어봐도 같은 내용이었지만 감회는 깊어져 갔다. 뜨겁게 흐르는 눈물이 볼을 달구고 간 자리가 아려올 지경이었다. 그 재판을 겪으면서 온통 제 불행만 생각했는데, 남겨진 사람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존, 당신을 어떻게 잊었겠어요.’ 그는 이 세상에서 그녀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한숨과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봉투에는 한 장의 얇은 종이가 또 있었다. 그것은 육필로 작성된 짧은 편지였다.
{ 노팅엄 백작부인께.
이런 편지에 으레 동반되는 구구절절한 자기변명과 후회, 슬픔에 너무 많은 문장을 할애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나는 이미 너무나도 고통받았고, 그 아이의 마지막 나날을 함께하지 못한 건 더더욱 괴로운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니 너무 늦게 존의 편지를 보내는 점, 부디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나마 나는 당신이 마지막까지 아이의 옆에 있어 준 것을 지난 몇 년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있었더군요. 부인과 같은 은인을 꼭 직접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부모 된 입장에서 듣고 싶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노팅엄 백작과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습니다만, 그분이 아니라 당신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니, 그러니 부디 가엾이 여기어 이 노망난 늙은이의 초대를 받아주길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존 에머스트 2세.
추신 – 내게도 남은 시간이 얼마 없군요. 빌어먹을 병마가 내 목숨을 깎아가고 있답니다. }
추신 옆에는 휘황찬란한 서명이 있었다.
“…?”
재벌 존 에머스트 2세와 제가 돌봤던 환자의 관계를 어떻게든 추론해내려고 했다. 생각이 부유했다가 종잡을 수 없다가, 마침내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존 에머스트 3세. 그래, 그 사람의 이름이야.”
허스트라는 성과 에머스트라는 성은 너무나 비슷했다. 아마도 앞의 철자가 기억에서 사라졌던 모양이다.
참 운명은 기묘하고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라이오넬은 존 에머스트 2세의 또 다른 자식이고 환자 X와 라이오넬은 형제 관계일 터였다.
그제야 초면임이 분명했던 라이오넬의 얼굴이 왜 그토록 낯익었는지 알 수 있었다. 존의 얼굴을 천으로 닦아주다 보니 손끝이 그의 생김새를 기억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골격도 알고 있었으니까.
라이오넬과 다치기 이전의 존은 아마 무척 닮았으리라. 머릿속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난 다음에는 선택의 시간이었다. 물론 크게 고민할 여지는 없었다.
“당연히 가야지.”
게다가 추신을 읽으니 판단이 더욱 섰다. 당장 뉴욕으로 가는 배편을 끊고, 거기서 뉴저지로 가는 길을 찾아야 했다.
문제는, 지금 그녀 곁에는 이안이 없단 것이었다. 그 역시 뉴욕에 있단 건 알지만 일로 바쁜 남자에게 더 큰 숙제를 내줄 생각은 없었다.
‘아마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매들린은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 * *
결혼하고 나서 운전을 배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안은 무척이나 걱정했지만, 그녀의 의지를 꺾지는 않았다. 그저 몇 번, 과속하지 말라고 지나가듯 말을 흘렸을 뿐이었다. 물론 운전을 배우고 나서도 정작 차를 몰 일이 많이 생기진 않았다.
그들에게는 전용 운전사가 있었으니 굳이 직접 운전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이안이 없을 때 매들린은 교외를 드라이브해 버릇했다. 남자가 없으니 심심하기도 했고 신선한 바람을 맞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자동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이사벨이 있는 집으로 가는 데에는 30분 정도가 걸렸다. 이사벨은 마당에 나와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고 있었다. 그렇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주치의와 홀츠먼이 난리를 쳐서 그나마 양을 줄인 게 이 모양이었다.
“오. 매들린.”
재떨이에 담배를 끄고 이사벨이 일어섰다. 아직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었다. 폐는 한번 병이 들면 다시 낫기 어렵다고 한다. 공장과 공장을 전전하며 활동하던 그녀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상해있었다.
“담배 피우지 말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피우네요.”
“잔소리하러 왔어요? 매들린, 이게 제 처음이자 마지막 담배예요. 유일한 인생의 낙이라고요. 이렇게 햇빛이 드는 곳에서 좋은 책을 읽으며 딱 한 대를 피우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데요.”
“…잔소리하러 온 건 아니에요.”
* * *
이사벨의 집 안으로 들어가자 놀라울 정도로 모든 게 친밀하게 느껴졌다. 공식적으로는 소유지만 실상은 두 사람이 동거하고 있는 집. 이사벨이 천천히 메모카드를 뒤지더니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놨다.
“적어도 3주는 걸릴 거라 했지만 정확히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어요. 여기, 그렉이 묵는 숙소와 사무실 전화번호요.”
그녀가 넘겨주는 카드들을 받아든 매들린이 고맙다며 인사하고 떠나려던 차였다.
“오라버니에게 직접 묻는 편이 더 낫지 않아요?”
“…싸웠거든요.”
‘내가 그 사람 뺨을 후려쳤지.’
후회한다거나 스스로가 끔찍하다거나 그런 피상적인 표현들로는 차마 표현해낼 수 없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그냥 맞았다. 맞고도 떨거나 반사적으로 피하지 않았다. 마치 매들린이 가하는 모든 폭력과 상처는 성스러운 것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런 반응이 더욱 무섭고 괴로운 것이었다.
“…그렉과 나는 나중에 미국으로 가서 살까 해요.”
“…….”
“캘리포니아 같은 데서, 해변 옆에 작은 집이나 사두고. 그렇게 살려고요. 유럽은 내게 너무 안 좋은 기억만 줘요.”
“우리는, …더구나 이안은 이곳을 떠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가끔, 그가 나와 함께 다른 곳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 이곳에서 죽는 편을 더 편하게 생각할까 봐 두려워요.’
매들린에게는 발설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굳이 털어놓을 필요는 없는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