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농담이라도
매들린은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어쩐지 모골이 송연한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눈을 뜨니 새벽이었고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었다. 기분 좋은 기억을 성냥처럼 피워올리고 잠이 들었는데, 벌써 마음과 몸이 서늘했다. 바깥에는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때였다. 그녀가,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르며 침대를 구를뻔했다.
“뭐예요, 이안!”
문가에 기대어 서서 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림자가 남편이라는 걸 알아차렸길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졸도할 뻔했다.
“…미안.”
남자의 목소리에 잠기운이 가득했다. 한 번도 이렇게 제 앞에서 흐트러진 적이 없는 그인데, 문가에 기대어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무척 피로한 모양이었다. 매들린이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가 팔 한쪽을 내저으며 말했다.
“일어날 것 없소. 씻고 다시 올 테니까.”
* * *
남자가 몸을 씻고 잘 채비를 할 때까지 잠이 오질 않았다. 털썩, 침대가 기울고 의족을 벗는 소리가 나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왜 안 자고 있어.”
“당신이야 말로요. 일 끝났어요?”
“…이제 시작이지. 하소연할 생각은 없소.”
이 위기만 벗어나면 돼. 남자는 그 말을 단전 아래로 삼켰다. 그런 이야기 자체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당장의 신용만 확보된다면, 어떻게든 뚫고 올라갈 길은 보일 터였다. 그저, 지금 상황이 말도 안 되게 최악이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눈을 감고 침대에 누운 남자의 등 뒤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매들린은 매들린대로 점점 몸을 제 쪽으로 붙여오는 남자가 느껴져 좋았다. 그래, 고작 이 정도의 순간이라도 좋았다.
* * *
“미국이요?”
“말했잖소. 미국에 간다고.”
졸리지도 않는지 남자는 일찍 일어나서 전화를 걸고 있었다. 매들린이 뭐라고 말하려 하자 두 번째 손가락을 들고 양해를 구했다.
“어. 플라자호텔에서. 그래. 그곳에서 결착을 지어야겠군. 곧 봅세.”
전화를 급히 끊은 그가 매들린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당장 내일 떠나는데, 그전에 당신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어.”
“보긴 뭘 봤다고 그래요.”
“…미안.”
남자의 그 바스락거리는 것처럼 위태로운 얼굴에, 입술 속에서 새어 나오는 말 한마디에 가슴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부담 주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는데도 기어코 한마디가 나왔다.
“같이 가요.”
남자가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내쉬었다. 미간을 손가락 두 개로 꾹 누르는 게, 마치 예상했다 싶은 몸짓이었다. 그게 어쩐지 속상하고 화가 났다.
“그건 미안하지만…”
“미안하면 같이 가요. 이안, 절대로 귀찮게 하지 않아요.”
“귀찮은 게 문제가 아니오. 당신이 날 어떻게 귀찮게 할 수 있겠어?”
“…….”
“그런 게 아니야. 거기서 좋은 기억 같은 건 없잖아. 매들린, 가지 말고 여기에 안전하게…”
“이제 괜찮아요. 밤에 혼자 돌아다니거나, 낯선 사람을 따라가거나 하지 않아요.”
이안의 새장이 넓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스트레스 때문인지 아니면 뉴욕에 대한 염증반응 때문에 그런지 그의 반응에 날이 서 있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오. 지금 분위기가 매우 좋지 않아. 여기서 의미 있는 일을…”
“같이 가고 싶어요. 업무차 출장인 건 알아요. 절대 방해하지 않겠다 약속해요. 그저, 당신이 힘들 때 옆에 누워있는 것만이라도…”
“당신의 존재 자체가 내 약점이오.”
그가 매섭게 덧붙인 말에, 둘 다 퍼뜩 놀랐다. 말을 내뱉은 사람 쪽이 더 놀란 게 아이러니했다. 하지만 언제 놀랐냐는 듯, 이안은 곧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나름 스스로, 안에서 결론을 내린듯했다.
그렇게 찬찬히, 그가 오랫동안 생각하고 준비해온 것을 진술하듯, 건조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그러니 아주 만에 하나 말이야…”
“…….”
“모든 게, 뜻대로 풀리지 않고…, 빌어먹을 운명의 신인지 뭔지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헤어져야 할 수도 있소. 우리 둘이 말이야.”
지금 남자가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어 머리가 아팠다. 생리적으로 속이 안 좋고 뒤틀렸다. 아까 전까지 보고 싶었다느니 다정한 말을 해놓고는 왜 갑자기?
매들린이 천천히 다가갔지만 남자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채였다. 그녀가 이안의 팔을 붙들었다.
“장난이라고 해도 그런 이야기는 하는 거 아니에요.”
“매들린, 잘 들어봐.”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 탓이오. 위기를 과소평가해온 잘못이지. 하지만 그 정도는 내 선에서 오롯이 책임지면 돼. 그 과정에서 당신까지 힘들게 할 순 없소.”
“괜찮다고 말했잖아요! 소박하게 살아도 된다고! 아니, 소박할 것도 없어요. 감옥까지 갔다 온 내가 무슨 영화를 더 바란다고 그래요? 도대체 당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돈 때문에 만난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저택도 필요 없고 사치도 필요 없다고 몇 번이고 말했잖아요.’
도대체 이 이상 뭘 주겠다고, 이런 망발을 지껄이는 건지 매들린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까이서 본 그의 눈은 완전히 돌아가 있었다. 그러니까, 매들린을 지키고 죽겠다는 식의 그런 광기가 있었다.
“이런 종류의 파산은 아주 지저분해. 자, 그래. 매들린 울지 말고 내 말을 들어봐. 이혼을 하게 된다면, 만약에 모든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내 재산의 반을 가지고 가서 원하는 일을 시작…”
-찰싹.
천둥번개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몇 초 뒤에서야 매들린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홱 돌아간 남자의 뺨과 살짝 아릿한 제 손바닥. 그리고 낮은 신음까지.
‘내가, 이안을 때렸어.’
“…그, 그런 말을, 이상한 말을 하니까… 나는….”
“…….”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선선히 받아들이는 표정이 더 무서웠다. 매들린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평생 폭력을 저지르기보다 당해왔던 그녀로서는 매우 낯설고 기괴한 감각이었다.
“나는, 이안, 당신과.. 헤어질.. 생각.. 없어요.”
“가보겠소.”
남자가 서류 가방을 들고 나가려 했다.
“비겁해요.”
“당신은 그 정도의 남자와 결혼한 거요. 그 선택을 철회할 기회를 주겠다는데 왜 마다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
“당신은 비겁하고 질 나쁜 남자야.”
험하고 날 선 소리가 나왔다. 그녀가 그의 뒷모습에 대고 일갈했다.
“같이 진창을 굴러도 좋겠다고 했잖아? 이런 식으로 날 모욕하지 마요.”
그는 계속 못 들은 척 문고리를 거칠게 잡아 돌렸다. 그때 매들린이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다른 사람과 행복한 꼴은 못 볼 거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상처 주는 게 그렇게 즐거워요?”
그 말이 어느 정도 유효타를 남긴 모양이었다. 남자가 잠시 멈춰 섰다. 그의 어깨와 등이 들숨 날숨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남자가 매들린을 향해 몸을 천천히 돌렸다.
“매들린, 방금 말하는 내내, 나 자신의 혀를 자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소.”
“거봐.”
“하지만, 아버지의 일까지 겪은 당신을 그런 위험에 두 번 처하게 하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오. 그럴 바에는 내 목이 잘리는 게 나아.”
그가 제 목덜미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행동에 매들린이 할 말을 잃었다.
“그냥 가정이었소. 당신을 힘들게 하려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냥 잊으시오.”
“…농담이라도, 가정이라도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에요.”
“…….”
그 말에 남자가 알 듯 모를 듯, 쓸쓸하면서도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전화하겠소.”
남자가 완전히 방에서 나가고 나서야 매들린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이혼이라니, 가정법이라 해도 너무나 잔인하고 끔찍했다. 이안의 마음속에 있는 끔찍한 괴물은 아직 똬리를 틀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생에서는 무한한 집착으로, 지금 생에서는 자기학대라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가 모르는 사실이 있어. 내가 고통스러웠던 건 아버지가 파산해서가 아니었어.’
물론 이번 생에서 힘든 게 없진 않았다. 아버지가 파산하고 나서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여러 고난을 겪은 것 역시 분명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더욱더 큰 상처를 준 것은, 지난 생에서 아버지의 파산 후 행동이었다.
그는 매들린을 놔두고 도망치듯 세상을 떠났었다. 그녀를 세상에 버려두고 사라졌었다.
그런 종류의 배신이 더욱 고통스럽다는 걸, 왜 저 남자는 모르는 걸까.
* * *
남자가 미국으로 떠나고 나자 남은 건 묵직한 고독뿐이었다. 그녀는 지나치게 우울하고 파괴적인 생각에 몰두하지 않으려 했다. 이안에게 왜 신뢰를 주지 못한 것일까.
‘아이가 있었다면 달랐을까?’
뒤늦게 찾아온 생각에 매들린은 몸을 떨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지만, 그래도 한 생명을 그런 식으로 이안과 저를 묶어줄 방편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쪽으로 사고의 가지가 뻗어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프랑스 여행 이후로 매들린은 넌지시 남자에게 자녀에 대해서 물어보곤 했다. 진지한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이제 슬슬 가족을 늘려도 좋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좀 주저하는 기색을 표했다.
[물론 당신이. 내 아이를 품는다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
[행복할 것 같군. 하지만,]
[하지만요?]
[하지만, 당신의 미소와 내 고집을 닮은 아이라면, 그것 나름대로 좀 무섭지 않겠소. 좀 준비를 더 하고….]
지금은 나와 당신만으로 모든 게 완전하잖아.
그가 그렇게 말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