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당신을 닮은 아이라면
남자에게 화를 내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안 그래도 그는 이미 충분히 고통받고 있었고 거기에 제 감정까지 얹는 건 좀 부당했다.
그의 말대로 힘들다고 고백해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면, 서로가 서로를 그저 말없이 응원하는 게 최선일 수도 있으니까. 사실 모르겠다. 무엇이 그나마 나은 건지.
매들린은 노팅엄 저택으로 돌아갔다. 이안에게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그는 짧은 전보와 편지를 보내올 따름이었다. 거기에 어떤 감정 같은 게 읽히지는 않았다. 아마 의도된 것이었으리라. 전쟁 때에서보다 노련해진 남자였으니 제 절박한 심경 같은 걸 구구절절 쓰고 싶지 않을 테고.
“인생이 왜 이리 쉽지 않은 건지 모르겠구나.”
하늘도 무심하지. 왜 이렇게 제 인생에 질곡이 많은지 새삼스레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한참 자신이 감옥에서 괴로웠을 때보다 지금이 더 한탄스러웠다. 이안이 조금이라도 아프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누군들 앞날을 미리 알고 살아갈까. 분명히 난관을 타개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매들린은 천천히 전보가 적힌 쪽지를 손가락 끝으로 매만졌다.
{ 건강 챙기시오. 아침을 꼭 먹고, 신선한 바람 쐬는 거 잊지 않길. }
정말 어려워진다면, 매들린은 저택을 파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여겼다. 물론 저택 같은 걸 사고 싶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단 게 문제였다. 귀족들은 저택을 팔고 런던의 아파트로 들어갔고 빈 건물 안에는 노숙자들이 깃들어 살았다. 그들을 두고 무서운 이야기가 떠돌았다.
노팅엄 저택은 가장 마지막 생존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게다가 전쟁통에 병원으로서 역할을 했으니, 매들린에게는 꽤 정도 든 곳이었다.
하지만 유지비를 감당할 수 없다면 물러나는 게 맞는 일이었다.
매들린은 조용히 편지지의 겉면을 쓰다듬었다.
‘둘밖에 없으니까, 오히려 더 걱정할 게 없어.’
둘밖에….
어쩐지 지난 일을 회상하게 되었다. 지금 일과는 아무런 관계는 없으나, 거짓말처럼 행복했던 몇 달 전의 사건이 어쩐지 씁쓰레하게 다가왔다.
* * *
-- 5개월 전, 프랑스, 리비에라.
이안은 일이 많은 만큼 또 과감하게 휴가에 투자하는 경향이 있었다. 전의 생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말이다. 프랑스 리비에라 코트다쥐르는 전 세계에서 몰려온 피서객들로 붐볐다. 따사로운 프랑스 남부의 햇살이 모두를 즐겁게 해주는 데다가 바다까지 청명했다.
“어때요?”
수영복을 입은 매들린을 두 눈으로 훑은 이안이 아주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짧은 치마를 한 제 아내를 보자 복잡한 심사인 모양이었다.
“역시 별로인가….”
“…….”
이안이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정색하자 좀 객쩍었다. 게다가 그 치밀한 시선을 돌리지 않고 계속해서 제 무릎 위 허벅지의 흰 살을 쳐다보는 것이, 뭔가 의아했다.
“이상해요? 뭐라고 말을 좀 해보지 그래요? 색깔이 마음에 든다거나, 안 든다거나.”
이안이 한참 말이 없자 괜히 더 쑥스러워 눈을 내리깔게 되었다. 신혼여행 때도 못 입어본 수영복을 이제 와 입어보니 참 낯설고 신기했다. 막상 다른 사람들은 더 파격적인 옷차림으로 해변을 잘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정도의 차림에 머쓱해하는 건 영국에서도 가장 고리타분할 두 사람뿐이었다.
“좀 추울 것 같긴 하군.”
결국, 풀죽은 매들린의 모습을 못 이긴 이안이 마뜩잖게 한마디 했다.
“…지금 7월이에요, 이안.”
이안이 돗자리 위의 숄을 들어 건넸다. 그걸 받은 매들린이 마지못해 숄을 어깨에 걸쳤고 그러자 몸이 좀 가려졌다.
“더워서 죽을 일 있나요?”
“바닷바람이 은근히 춥소. 행여 감기라도 걸리면 낭패니까.”
아무튼, 순 억지 같았다. 지중해성 바람은 습하거나 강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매들린은 그래도 이안과 이렇게 한때를 보낼 수 있어 기분이 굉장히 들떠있었다. 지난 생에서는 이렇게 해외를 돌아다닌다거나 망중한을 보내는 건 상상도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매들린의 차림새도 차림새였지만, 이안의 옷차림도 퍽 자유스러웠다. 흰색 와이셔츠를 팔뚝까지 걷고 단추를 한두 개 풀었다. 긴 바지와 구두는 여전했지만 말이다. 원래는 아주 잘 정리한 앞머리가 몇 가닥 내려와서는, 미풍에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그 나른한 모습이 어쩐지 아름다워 보인다면 그건 좀 지나치려나.
팔뚝을 가득 수놓은 화상 흉터도 멋있어 보였다. 그러나 매들린은 감탄만 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파라솔을 살짝 남자 쪽으로 조정했다. 괜히 남자의 살결이 다치면 안 되니까. 그런 배려의 그늘을, 남자는 살짝 눈을 감으며 즐기는 중이었다.
그렇게 잠시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날이 조금 어두워지자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호텔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앞으로 어디를 놀러 다닐지 즐거운 고민을 나눴다.
그때였다.
“노팅엄 백작 각하, 백작부인 아니십니까?”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어딘지 익숙한 얼굴이었다. 매들린이 머뭇거리는 사이 이안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아. 두 분을 여기서 뵙는군요. 해블러 양, 에머스트 씨. 이쪽은 제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안녕하세요.”
흡사 공작새처럼 아름다운 화려한 미모의 여성과 라이오넬 에머스트였다. 라이오넬은 이름을 듣고서야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엄청난 통신사, 신문사 재벌 존 에머스트의 아들이라 했나.
이안은 잠깐 매들린을 향해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괜히 저 때문에 즐거운 저녁이 방해받는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매들린으로서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오히려 이안의 친구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았다.
“구면이군요. 두 번째인가요?”
라이오넬이 웃었다. 그때보다 어쩐지 세련되어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거니 싶었다. 매들린은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객선에서는 제가 좀 정신이 없었네요.”
서로의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매들린과 라이오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였다. 별로 공통점이랄 건 없는 사람인데도, 나머지 두 사람이 말을 별로 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두 분은 아직도 사이가 좋으시네요. 누가 보면 신혼인 줄 알겠어요.”
여자의 이름은 릴리안 해블러였다. 결혼 전, 매들린이 햄튼 별장 파티에서 얼핏 보았던 여자였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눈썹을 씰룩였다.
“10년이 안 넘었으니 사실상 신혼이나 다름없죠.”
이안이 딱 잘라 말했다. 그 대꾸에 라이오넬이 픽, 웃었다.
“…….”
이안이 살짝 거슬린다는 듯 라이오넬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부자들 간의 미묘한 신경전 같은 건 알기 어려웠다.
“그나저나 두 분은 자녀계획은 따로 없으신가 보죠?”
릴리안이 한 번 더 공을 던졌다. 이걸 맞받아쳐야 하나. 매들린이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였다. 이안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저, 저는…”
“말씀하시는 것처럼 지극히 행복한 지금을 즐기고 싶습니다. 굳이 제 안사람을 더 부담스럽게 하고 싶진 않군요.”
“아하. 부인 사랑이 지극하시네요. 부러워요.”
몇 번 말을 더 섞었으나 이미 소강한 분위기를 되살리기는 어려웠다. 결국 이안이 피로한 척하며 일어서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몸 상태가 이렇다 보니 좀 피곤해서 이만 올라가 봐야 할 것 같군요. 두 분을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 * *
그날, 호텔의 스위트룸에 누워 매들린이 이안의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었다. 정말 신혼 같을 이유는 없는데, 남자는 그동안 바빴던 걸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집요했다. 여름휴가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매들린으로서도 비꼬거나 놀릴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너무나 지친 까닭이었다.
“정말, 이안. 몸 상태니 뭐니 그동안 괜한 걱정 한 것 같아요. 이렇게 힘이 남아도는 걸 어째요.”
“당신이 너무 약한 거요. 그리고 난 여전히 당신의 걱정과 배려가 필요해.”
그가 손을 뻗어 저를 내려다보는 매들린의 뺨을 감싸 쥐었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시작되었던 손길이 점차 의도를 가지고 끈적해지기 시작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매들린이 약간 감정을 실어 좀 강하게 몸을 뒤로 뺐다. 결국, 이안의 손은 허공에 어색하게 부유하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여기서 그만하죠? 저 정말 너무 졸려요.”
“…….”
“제발 그렇게 보지 말고요. 좀….”
“그렇게?”
“그러니까 뭔가 사탕을 받지 못해서 우울한 아이의 표정 말이에요.”
“난 사탕 안 좋아하는데….”
“갑자기 논점을 흐리시네요.”
잠깐 할 일이 없어진 손을 제 눈두덩 위에 두고 가만히 숨을 몰아쉬던 이안이 느닷없이 중얼거렸다.
“…아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아이요?”
어쩌면 매들린이 너무 빠르고 격하게 ‘아이요?’라고 되받은 걸지도 몰랐다. 그 반응에 남자의 목소리가 곧바로 울적해졌으니 말이다.
“잊으시오. 별말 아니니까.”
“이안, 뭔가 또 저 모르게 파고 들어가는 것 같아요.”
매들린이 다시 몸을 붙여왔다. 이안의 손이 다시 매들린에게로 다가갔다.
“거짓말은 하지 않을게요. 결혼한 여성치고는 지나치게 생각 못 한 주제긴 해요.”
“…….”
“하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
“당신의 눈동자와 고집을 가진 아이라면, 얼마나 귀여울까 싶기도…”
하지만 문장을 다 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안이 그대로 두 팔로 매들린을 품에 안고 반바퀴를 굴렀다.
“악!”
“앗. 미안, 매들린 괜찮아?”
“아니에요. 저에게 격투기 같은 건 쓰지 마세요.”
둘은 깔깔거리며 밤을 지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