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숨통
이안과 밤을 보낼 때마다 인정하기 싫은 공포스러운 감정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지난 생에서 그에게 느꼈던 공포감과는 달랐다. 그보다는 극한의 희열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어서 느끼는 낯선 감정이었다. 남자에게 통제되고 다뤄지는 데에서 오는 쾌감과 또 반대로 그녀가 그에게 일종의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즐거움이 있었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겠지.’
결국, 남자를 지배하는 건 나라고 정신적으로 합리화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대화보다는 언제나 몸의 대화로 이어지는 요즘의 나날들이 석연찮은 건 사실이었다.
매들린은 기차를 타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지켜보았다. 회귀하지 않은 시간을 살다 보니 낯선 감각 자체가 낯설었다. 언뜻 본 풍경이 아니라, 세상은 언제나 새로운 모습이었다.
이사벨의 몸이 좋지 않아 혼자 나선 런던행이었다. 물론 자주 왔다 갔다 하는 곳이긴 하지만, 이안에게 통보 없이 갑자기 찾아가는 건 처음이었다. 이안이 묵고 있는 숙소는 런던의 핵심지역인 시티오브런던에 위치해 있었다.
매들린은 역에서 내려서 신문 몇 부를 산 뒤 자신이 묵을 숙소로 갔다. 신문을 하나하나 펼쳐놓고 바라본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몇 개의 회의들. 미국은 미국대로 수입 수출을 닫아걸었고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이 혼란스러웠다.
이 혼란 속에서 이안은 어떤 위치에 서 있을지 알 수 없었다.
* * *
“당장 어디서 융통할 수 있는 돈이 없어.”
“…….”
몇 시간을 밤샘 회의를 하고서도 결론은 같았다. 이안은 피로에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사업이 쉽기만 했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이토록 힘든 적은 없었다. 대형 금융기관까지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하자 연쇄작용처럼 파국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유나이티드 스테이츠가 망할 때 그 누구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지.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있는 상황…”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굳이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이안이 펜을 책상 위에 두드리며 말했다.
“중요한 건 당장 숨통을 틔워줄 자금을 구하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이 그렇게 우리를 불신한다면, 우리 쪽에서 그들에게 믿을 만한 담보를 제공하면 됩니다.”
몇 시간 동안 연석회의를 했지만, 노인네들이나 젊은이들이나 답을 구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대인들이 문제라는 소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처칠-당시 재무부 장관-의 오판으로 금이 바닥이 나버렸다느니 분석하는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엄청난 갈증을 느낀 이안은 손을 뻗어 물을 찾아 마셨다. 그러나 근본적인 허기는 달래지 못했다. 이럴 때면 언제나 매들린이 생각나서 문제였다. 그녀와는 말다툼도 나름 재미가 있었는데, 저 인간들이랑 1분 1초 시간을 낭비하는 게 짜증스러웠다.
‘요새 자주 보지 못하고 있군….’
이래서야 결혼한 보람이 없는데. 햄튼의 그 별장에서처럼 온종일 붙어있고 싶었다. 물론 여러 가지를 하면서.
가라앉는 기분이 점점 더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내와 함께 보낸 지난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제 위에 여자를 태우고 이런저런 것을 했는데…. 물론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지금 상황에 도움 되는 건 아니었다. 당장 극한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요행에 다름없었다.
“오늘의 회의는 여기까지 합시다. 일단 캐나다 회의에서 나온 방안을 들고 미국에 가서 합의를 봐야겠지요.”
가장 연배 많은 은행장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국인들과의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아니, 그런 결과는 있어서는 안 되었다. 파산이 줄지어 일어날 테고 공룡 은행들이 쓰러질 게 틀림없었다.
이안의 투자회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 속절없이 한숨이 나왔다. 마른 얼굴을 손등으로 쓸었다. 자꾸만 온몸이 바늘로 찔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통제할 수 없는 게 세상에서 제일 혐오스러운데 지금의 이 상황은 그런 변수들로 넘쳐났다.
“저, 노팅엄 경?”
“무슨 일이지?”
얼빠진 얼굴의 비서에게 날카로운 말을 내뱉은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곤두서있으니까.
이안이 미안하다는 듯 얼굴을 풀고 고개를 저었다.
“용건을 말해보게.”
“그, 저. 전화가 왔습니다. 백작부인께서 지금 런던에 계시다…”
“무슨 소리지? 내 아내가 왜 여기 있는 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책상으로 손을 뻗어 균형을 잡았다. 제기랄. 욕설을 살짝 내뱉은 뒤 아무렇지 않게 비서에게 대답했다.
“당장 만나야겠어.”
* * *
매들린은 초조하게 카페에 앉아 이안을 기다렸다. 비서에게 전화를 해두긴 했는데 제대로 전달이 됐을는지 모르겠다. 언제 회의가 끝날지 몰라서 미리 와서 앉아있었다. 다행히도 창밖 구경을 하는 게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처음 가출을 감행했을 때와 남자랑 같이 놀러 왔을 때가 생각났다. 둘 다 이제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지는 것이 참 신기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였다. 카페에서 이안의 직장으로 전화를 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남편이 나타났다.
키가 원체 커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이안이 나타나자마자 매들린이 그를 향해 미소지으며 팔을 흔들었다.
“여보!”
살갑디살가운 호칭에 사람들이 둘을 쳐다보다가 또 말았다. 이안은 부끄러운지 인상을 찌푸렸다. 괜히 멋쩍어진 매들린이 손을 슬몃슬몃 다시 집어넣었다.
이안이 한숨을 쉬며 의자를 당겨 매들린의 앞자리에 앉았다. 동시에 의족으로 이루어진 다리 한쪽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소음이 거슬리는지 남자의 미간이 좀 더 찌푸려졌다.
“그렇게 인상 쓰면 주름 생겨요.”
“뭐 어떤가. 이미 버린 상판대기인데.”
“미운 말 금지예요.”
“…….”
남자가 피식 웃었다.
“이안,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그래. 당신이 이상한 소리를 해서 깜빡할 뻔했소. 이곳까지 왜 온 거지?”
“당신이 보고 싶어서요.”
“…그건,”
“그냥. 요즘 본 지도 오래됐고, 잠시나마 당신과 이야기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어서요.”
“…하…매들린. 미안한데 그럴 여유가 없어.”
“상황이 많이 안 좋아요?”
그러니까 경제라든지, 당신이 투자 사업을 하고 있는데…. 매들린이 얼버무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 그런데 바로 그게 실수였는 모양이었다. 이안의 표정이 불편하게 일그러졌다. 미약한 짜증과 일그러진 속내가 아주 잠시지만 보였다.
“당신이, 신경 쓸 주제가 아니오.”
“어떻게 그래요?”
“모든 게 잘 되고 있어. 왜 굳이 걱정을 사서 하는 건지 모르겠군.”
“힘들면 힘들다고 이야기해도 괜찮은걸요.”
“……”
“이안,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저도 알고 싶어요.”
“매들린, 제발. 당신에게 말한다 해서 해결될 문제였으면 내가 이러고 있지 않을 거요.”
“하지만-.”
“당장 돌아가시오. 지금 돌아간다면 밤에는 도착하겠군.”
이안이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며 말했다.
“내 세바스천에게 이야기해서, 기차역 앞에 차를 대기시켜두리다.”
* * *
유행하는 것처럼 둥근 모자를 쓰고 겨울 코트를 걸친 매들린은 아름다웠다. 멍하니 카페에 앉아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긴 모습이 잡지의 표지로 쓰여도 괜찮…을 거라고 남자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런 남자의 쓸모없는 망상은 아무래도 좋았다. 매들린이 이안을 보자마자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기 때문이다.
“여보!”
아. 그 호칭을 듣자마자 가슴 한쪽이 짜르르 울렸다. 이런 순간에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안은 생각했다. 웃는 방법을 잘 몰라서 찡그리기만 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자리에 앉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젠장맞을 노릇이었다. 요새 몸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긋날 때가 있었다.
하지만 가장 열 받을 때가 있는데, 그건 바로 매들린 앞에서 이런 어색한 모습이 나올 때였다.
매들린이 우물쭈물 묻기 시작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아요?”
머리가 아팠다. 두통이 밀려오는 것처럼. 일단 스스로에게 가장 화가 났다. 왜냐하면, 매들린에게까지 걱정을 끼쳤다는 게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결국, 모난 소리가 나와버렸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
당장 여자에게 모든 어려움을 이야기해서 해결될 문제였으면 이러고 있지 않을 터였다. 그녀와 노닥거리는 대신 이곳에서 늙은이, 애송이들의 칭얼거림을 받아주는 것도 이미 너무나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같이 호텔로 가는 선택지를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았다. 부적절할뿐더러 여기서 매들린을 몰아붙이는 건 정말 최악이었으니까. 그녀만큼은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으면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이 난관을 벗어나는 데에 집중해야 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이안. 나는 돈이 없어도 괜찮아요.”
“…….”
이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뜨고 매들린을 쳐다보게 되었다. 눈앞의 여자가 너무 놀랍고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이해할 수 없었다.
“바보 같은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당신을 돈… 때문에 만난 건 아니란 이야기예요. 물론 제가 먹고 입는 데에 전부 그 돈이 들어가는 건 알고 있지만요.”
“매들린. 나는 평생을, 당신의 그 착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 싸울 용의가 있어.”
“……”
“그리고 또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돈이 필요해. 아무튼 걱정할 건 하나도 없소. 미국의 친구들에게 필요한 신용을 융통 받을 테니까. 급한 불만 끄면 모든 게 순탄할 테니까…”
제발 나 때문에 걱정하지 마.
어쩐지 마지막 한마디는 의도했던 것보다 다소 절박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