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말해주기를
“모든 일을 잘 해결하고, 곧 돌아가겠소.”
이안이 매들린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은 뒤 돌아섰다.
그 말 한마디를 남겨두고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매들린은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이안은 자신의 짐을 절대로 제게 지우지 않는다. 신체적인 아픔도, 마음의 상처도, 일터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스트레스까지 전부 다 자신이 책임지려고 한다.
그걸 지켜보는 매들린의 마음 역시 편치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의 말마따나 ‘정서적 지지’뿐인 걸까 싶어 괜히 위축되고는 했다.
“괜찮을 거야.”
매들린이 혼잣말했다. 괜스레 기분이 안 좋을 뿐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미래를 점치는 재주는 없었다.
* * *
담배 연기로 자욱한 회의실은 숨 하나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영국 은행장들과 한가락 하는 증권가들이 모여 시작된 회의는 진전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실타래를 풀어낼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지?’ 몇 번의 질문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안은 건조한 아랫입술을 가만히 씹었다. 지금 당장 이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제심을 요구받아 참는 것 하나는 잘하는 그였지만, 매들린과 결혼하고 나서부터 많은 것이 변했다. 응석받이가 된 건지도 몰랐다.
행복할수록 이런 긴장감을 견디기 점점 어려워진다. 언제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상황은 이안으로서도 낯설었다.
‘아냐. 난 이 기분을 알고 있어.’
참호 속에서 하늘을 덮듯이 밀려오는 새까만 까마귀 떼를 봤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거대한 재앙이 닥쳐오는데 무력하게 견디고만 있어야 하는, 개 같은 기분. 그런데 전쟁터 때보다 지금이 더 무섭다. 손에 쥐고 있는 게 많을수록 점점 겁쟁이가 되어가는 모양이었다.
“월가에서 곧 필요한 조처를 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이것도 곧 끝날 겁니다. 그저 심리적인 이유일 뿐입니다. 일시적인 시장의 발작인 게지요.”
패를 뒤집으면 뒤집어볼수록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안은 이 사태가 간단히 끝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미국에서 시작된 대재앙이 이곳까지 덮치는 건 순식간의 일일 터였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자신은 모든 것을 지킬 수 있을까?
* * *
--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두려움 자체입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 * *
이안은 이틀 뒤에 돌아왔다. 매들린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순간 침대 한쪽이 출렁이며 무게가 느껴졌다. 계속해서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며칠 밤을 새우며 일에 매달렸을 텐데 부러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의족을 벗는 소리와 사부작사부작 옷감과 이불 소리가 들렸다. 한참 뒤 가늘게 눈을 뜨자 매들린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안이 바위처럼 굳은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협탁 위에 있는 작은 등 덕분에 그의 표정을 알 수 있었다. 두려움, 기대, 욕망. 어떤 감정이라고 딱 짚을 수 없는 복잡한 눈빛이었다. 매들린이 팔을 뻗어 왠지 아득해 보이는 남자의 턱선을 더듬었다. 그 손길을 느끼는 듯 남자가 눈을 감았다.
“일하고 왔어요?”
“…마무리는 못 했지만, 대충 확인하고 왔소.”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
매들린의 나직한 위로에 남자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당신은 괜찮다고만 하지.’
하지만 이안은 그 속내를 꺼내지 않았다.
“괜찮지, 않다면?”
“…그래도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예요.”
“난 당신에게 모든 걸 주고 싶어.”
매들린이 대답하기 전이었다. 남자가 상반신을 숙여, 매들린의 입술에 키스하기 시작했다. 헐떡일 정도로.
* * *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심각해져 갔다. 미국에서 거대한 공룡 은행들이 하나둘 파산을 선언하기 시작했고, 성난 예금자들이 돈을 인출하기 위해 은행 앞에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얼마나 이 위기가 계속될지 예측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정치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공황은 이미 끝이 났다고. 하지만 그 끝은 계속해서 유예되고 있었다.
경제난은 매들린의 피부에도 다가왔다. 장학금을 필요로 하는 여학생들의 수가 늘기는커녕 줄어들었다. 생계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는 이들이 그만큼 많아지는 것이리라. 오히려 장학금 대신 실질적인 구호물자를 지원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학생들의 학업이 달려있다는 생각을 하면 말이다. 마리아나가 침묵하는 매들린을 보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매들린, 내 생각에는…. 당분간 장학금을 빈민들을 위한 기금으로 전환하는 게 어떨까 싶어.”
“…….”
매들린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한순간에 실업자가 된 사람들은 제 몸뚱어리를 광고판 삼아 거리를 배회했다. 이력을 잔뜩 적은 현수막을 어깨에 걸치고 빵을 구걸하며 직업을 달라고 빌었다. 밀려드는 빈민들을 보다 못한 성직자들이 의사당으로 난입해 당장 원조 대책을 세우라고 일갈해댔다. 총리는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얼버무렸다.
* * *
이안은 점점 집에 드물게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고, 홀츠먼이 넌지시 힌트를 줬다.
“너무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안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도 근심이 가득했다.
매들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단단하게 미소지었다.
“단 한순간도 서운한 적 없어요.”
그런 매들린을 곁눈질하던 홀츠먼이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매들린, 요즘은 말입니다….”
“네?”
“이 망할 놈의 자본주의가 순식간에 무너져내릴 거라며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던 이사벨이, 이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
“그만큼 모두가 흔들리고 있어요.”
언제나 능수능란해 보이는 남자가 이렇게 불안해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충격을 받은 매들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홀츠먼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물론 부인이 걱정할 일은 없을 겁니다. 당분간 저와 이안은 캐나다로 출장을 갈 거예요.”
* * *
이안은 장기간 출장 후 예고도 없이 저택으로 오곤 했다. 그렇게 방문하고 나서 쉬고 있는 매들린을 확인하거나, 그녀를 안고는 했다. 마치 몸부림치는 것 같은 절박한 몸짓으로 제 아내의 몸을 탐했다. 매들린은 가끔 그를 받아내는 것이 버거웠지만 거기에서 비틀린 만족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이었다.
그런 제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가 그래도 그만큼은 자신을 의지하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인지, 순전히 육체적인 즐거움인지, 아니면 다가오는 이상한 불안감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시트를 더듬자, 그곳에 이안은 없었다. 살짝 철렁이는 마음을 안고, 이불을 끌어안고 침대에 앉았다.
협탁 위에 메시지가 놓여있었다.
{ 오늘 새벽 기차를 타고 런던으로 출발. 전보 보내겠소. }
밑에 펜으로 죽죽 그은 글귀는 알아보기 어려웠다. 쪽지를 뒤집으니 눌러썼다가 서둘러 지운 자국이 보였다.
{ 미안 }
무엇이 미안한 걸까. 오랫동안 저택을 비우는 게? 아니면 지난밤 들이닥쳐서 한참 몰아붙였던 게?
귀엽다고도 할 수 있는 면모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다, 이내 얼어붙었다. 어쩌면 지금 바로 진솔한 대화가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다. 전생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도 결국 대화의 부재 때문이었으니까.
“왜 맨날, 괜찮을 거라고만 하는 걸까.”
바깥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났다.
매들린이 아침 햇살 속을 거닐었다.
“당신이 어둠 속에 있을 때 건져내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어.”
전신이 추웠다.
* * *
“같이 런던에 가자고요?”
이사벨이 고개를 기울였다.
“네. 이안을 좀 보고 싶어서요.”
“…은행장 나리들 만나고 다니는 것 같더군요.”
“이안이 말해준 거예요?”
“그럴 리가요. 홀츠먼을 졸라댔지요.”
홀츠먼과 이사벨은 공고한 연인관계였으나 결혼 서류에 서명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같이 사는 둘을 이상하게 보는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게 전혀 없는 일은 또 아니었다. 이안도 딱히 재촉하지 않는 걸, 다른 사람들이 어떤 권리로 참견할까.
“이사벨, 신문을 읽고 있고 라디오를 듣고 있지만, 전혀 모르겠어요.”
“지금 돌아가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피셔와 케인즈 교수를 합해놓은 것 이상으로 똑똑한 이일 거예요.”
피셔와 케인즈는 현재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들이었다.
“이사벨, 정말 제이크가 말했던 것처럼 이 세계가 무너지나요? 바뀌나요?”
“…….”
이사벨이 눈을 크게 뜨고 매들린을 바라봤다. 그녀가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닌 것이 분명해지자 이사벨이 복잡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된다고들, 믿죠.”
“그렇다면 어떻게…?”
“그 누구의 이기심 때문이 아니라 지금의 체제에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고 믿는 거예요. 갈수록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줄어드는데 자본가들은 과잉생산하고, 또 그로 인해 이윤율이 줄고…. 결국 지금처럼 공황이 찾아오게 된다는, 논리예요.”
이사벨이 아주 명료하고 빠르게 말하는 통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대충 가닥은 잡혔다.
“…….”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또 다른 전쟁이 필요한 거고요.”
매들린의 얼굴이 더더욱 새하얗게 질리자 이사벨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이론이에요. 매들린, 현실은 더 다양하고 많은 변수가 있어요. 그리고 우리 오빠 정도는 믿어도 된다고 생각해요. 강한 사람이잖아요?”
“이사벨은 어떻게 생각해요?”
“…나도 모르겠어요. 독일에 있는 친구 말로는 사정이 나쁘대요. 이 위기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겠죠. 곧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할 것 같지만,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어요.”
“이안이 혼자 힘들어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네요.”
“오라버니도 알 수 없어서 그런 걸 거예요. 지금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불안감을 주고 싶지 않은 것이겠죠.”
“…….”
하지만 매들린은 이안이 알지 못하는 외부 상황에 대한 정보 같은 걸 원하는 게 아니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주기만을 바랐다.
“매들린, 세상이 무너져서 뭐라도 바뀌길 바라는 사람들이나 모든 것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나 똑같아요.”
“…….”
이사벨이 살짝 콧잔등을 찡그리며 멋쩍게 중얼거렸다.
“다들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 뿐이지요. 그 누구도 먼 미래까지 예측하진 못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