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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도대체 무슨 (91/121)

90화. 도대체 무슨

“정말, 도대체가….”

홀츠먼은 정말이지 세상에서 가장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아버린 기분이었다. 망연자실해 하는 그를 앞에 두고 이사벨과 세바스천은 뭐가 흡족한지 만면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며칠을 저 빌어먹을 방에서 나가질 않는구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층이겠지. 그 안에서 둘이 알아서 잘살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렴.”

“이사벨, 저 둘이 어디 이민이라도 간 것처럼 말하지 마.”

홀츠먼이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자 이사벨이 데구루루 눈을 굴렸다. 

“아니, 한창나이의 젊은 사람 둘이 이제 와 좀 재미 보겠다는데 열렬하지 않으면 이상한 거 아냐?”

“하지만 좀 지나치잖아?”

“그동안 답답한 게 많았겠지. 원래 저렇게 금욕적인 유형이 실전에서는 더 열정적이래.” 

“알고 싶지 않아, 정말 알고 싶지 않아.”

홀츠먼은 중얼거리며 방을 빠져나갔다. 남은 건 세바스천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우쭐한 표정의 이사벨이었다. 

* * *

“..목, 목이 말라요….”

매들린이 끙끙거리자 남자가 금방 깨끗한 물이 든 잔을 가져왔다. 언제 이런 건 또 챙겼는지, 아무튼 준비성이 철저한 남자였다. 매들린이 상반신을 간신히 일으키자, 이안이 잔을 그대로 매들린의 입에다 가져다 댔다. 급하게 물을 대령하는 손이 떨려서인지, 아니면 매들린이 고개를 먼저 숙여서인지 물방울이 그대로 상반신에 흘렀다. 

“으음….”

갈증이 풀려서 좀 살만해진 매들린이 나른하게 몸을 풀었다. 나신에 흰 이불만 걸친 데다가 햇빛이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이리저리 빛내고 있었다. 그걸 그저 지긋이 쳐다보기만 하는 이안이었다. 

“뭐해요?”

매들린이 눈을 깜빡였다. 남자는 계속해서 매들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문득 시선의 끈덕짐을 알아차린 매들린이 이불 속으로 숨으려 했지만, 불행히도 남자가 더 빨랐다. 그가 이불을 살짝 걷어내 매들린을 찾아냈다. 

“으악.”

“당신이 너무 이뻐서….”

속으로 살짝 뜨악했지만, 매들린이 억지로 멋쩍게 웃었다. 그걸 눈치챘는지 남자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싫은…가?”

조심스러운 말투가 조금 가증스럽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매들린이 헛웃음을 지었다. 

“제발요, 눈 좀, 잠깐이라도 붙여요….”

“한 번만…. 하겠소.”

“정말, 양심이… 아, 없으시네요!”

물론 좋았다. 왠지 죄를 짓는 것 같았지만 좋은 건 좋은 거였다. 그보다 남자가 저렇게 생기 넘치게, 청신하게 웃는 걸 이토록 많이 본 적이 없었다. 병약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체력 하나는 정말 대단했다. 

에릭의 말대로 자신이 미국으로 떠난 뒤로 정말 미친 듯이 재활과 운동에 몰두한 모양이었다. 온몸이 흉터로 성한 곳이 없었으나, 타고난 체력과…, 노력이 받쳐주자… 결과는 놀라웠다. 

그의 상처투성이 몸과 결손을 볼 때면 가슴 한쪽이 묵직해졌지만 말이다. 이안은 그런 매들린의 안타까운 시선조차 게걸스럽게 탐하고 있었다. 

매들린이 목을 젖히며 끄응 앓는 소리를 내자, 이안이 허점을 노렸다. 한 손을 뻗어 매들린의 몸 선을 타더니, 복부의 흉터를 더듬었다. 

“…간지러워요.”

“…….”

흥분과 욕망이 들끓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상처를 관측하는 표정이 부담스러웠다. 뭔가 굉장히 심오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속상해.”

“네?”

매들린은 남자가 무엇을 속상해하는지, 체력적으로 기진한 탓에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오. 매들린, 힘들어 보이니 가만히 누워있으면… 돼.”

“그것도 힘들다고요….”

매들린이 흰 목을 드러내고 침대에 누웠다. 

남자가 낮게 웃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천국의 나날 같은 하루는, 아무래도 체력적으로는 고되게 시작할 모양이었다. 

* * *

-- 5년 후.

“정말 이런 건 필요 없는걸요.”

매들린이 무척 난처한 표정으로 상패를 바라봤다. 

“그래도 저희 학과 최고의 후원자님이신데, 상패 들고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시지요.”

“하지만 총장님… 저는, 어디까지나 익명의 후원자로 남고 싶은걸요.”

“아니, 아니죠. 백작부인 같은 멋진 분을 알게 되면 모두에게 기분 좋은 일일 겁니다.”

매들린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백작부인’이라는 직함은 들어도 들어도 익숙하지 않았다. 마치 맞지 않는 옷처럼 품이 남아돈다고 해야 할까. 그보다는 그냥, ‘매들린’이라고 불러줬으면 할 때도 있었다. 아주 가끔 드는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매들린과 마리아나 노팅엄은 작은 후원 재단을 설립해서, 의학 공부를 하고자 하는 여학생들을 돕고 있었다. 비록 록펠러와 같이 무지막지한 자금을 운용하지는 않지만 나름으로 열심히 일을 살피며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있단 자부심이 있었다. 

가끔은, 피와 땀이 흐르는 현장이 그립기도 했다. 물론 그것 역시 배부른 소리란 걸 알기에 그리움이 오래가진 않았다. 

‘적어도 이안의 새장이 훨씬 커진 것에 감사하자.’

그리 생각했다. 그의 새장이 점점 더 커져, 세상을 집어삼킬 정도가 된다면, 그때, 매들린은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니까.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저편에서 깔깔거리는 여학생들의 웃음이 교정을 메웠다. 매들린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냉큼 트로피를 총장에게 건넸다. 

“생각해 보니까 제가 곧 기차를 타야 해서요, 너무 아쉽게도 이만 가봐야겠어요. 즐거웠습니다. 제닝스 박사님.”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매들린의 뒷모습을 보며 제닝스 총장이 혀를 찼다. 

“저렇게 학생들에게 장학금 기부를 하시면서도, 모습을 보이는 건 극구 사양하니.” 

매들린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 나간 교정의 한복판에는 남자가 서 있었다.

어쩐지 오랜만이라는 듯 묵묵히 주변 풍경을 둘러보는 그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살금살금 다가가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안이 눈치를 챘다. 

“왜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소?”

물론, 남자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매들린이 어디에 있는지 그냥 바로 아는 신묘한 능력이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매들린이 손을 흔들었다. 

“손 안 흔들어도 안다니까….”

이안이 작게 중얼거렸으나 매들린이 들을 순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마주 흔들어 보였다.

행인들의 입장에서는 꽤 열렬한 신혼의 젊은 부부라는 생각이 들 법도 했다. 물론 저 둘, 그러니까 남자의 진상을 아는 사람들 입장에선 해괴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지만 말이다. 

그건 차라리 런던의 사교클럽에 떠도는 괴소문에 가까웠다. 일에 있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이안 노팅엄이 제 아내에게는 간과 쓸개를 다 내주듯이 한다고. 백작은 아무래도 두 얼굴을 가진 모양이라고 말이다. 

* * *

“하지만 그런 것치고 두 분 사이에 자식은 없잖아요?”

연기 자욱한 런던의 사교클럽에서 한 젊은이가 던진 말에, 좌중이 정적에 휩싸였다. 조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말, 내 선에서 끝난 거로 하지? 난 아무래도 새파란 젊은이가 서슬 시퍼런 백작 각하에게 멱살 잡혀 박살 나는 걸 보고 싶진 않으니까.”

“…아니, 저는 딱히 뭔가를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요.”

조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 바보 녀석. 부부에게는 각 부부의 사정이 있거늘. 나름 이안의 배려라거나, 각자의 인생 계획이 있는 것일진대.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는다. 어차피 말해봤자 알아들을 놈도 아니고. 

“재미없는 백작 각하의 속내는 그만 짐작하지? 그보다는 쓸만한 종목이나 추천해줘 봐.”

“아, 그거라면 남미에 유전 탐사하는 데가 있는데…”

그때였다. 사교클럽의 사환 하나가 클럽의 회전계단을 타고 헐레벌떡 올라오는 것이었다. 

“저, 저기. 전보들이 왔습니다.”

“전보‘들’?”

“어이, 토미. 뭐가 문제야. 왜 이렇게 끙끙거려?”

와하하. 어른 남자들이 웃어대건 말건, 사환은 사색이었다. 

“전쟁이라도 일어난 거야?”

사환 토미의 얼굴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비슷한 재앙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숨 막힐 정도로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일제히 시선을 집중했다. 어린 사환이 뻘뻘 식은땀을 흘리며 전보들을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한마디 한마디가 더해질 때마다 남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뉴욕에서 날아온 낭보는 믿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2시간 만에 주식이 절반이 날아갔다고? 시카고는 조기 마감을 했고, 사람들이 은행에 몰려 들어가 남은 주식을 팔려고 한다는 이야기였다. 

가장 먼저, 젠슨이 일어났다. 그다음으로는 헨드릭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분하게 남의 이야기를 하던 남자들은 말수가 없어졌고, 침묵 속에 공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10월 24일 목요일, 증권거래소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였다. 큰 외부요인이 없는 상황, 다들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오전 11시가 되고 하나둘, 사람들이 팔기 시작했다. 사겠다는 사람 없이. 그렇게 파도는 해일이 되었고….

점심시간이 지나자 파산한 투자자 11명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 *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것도 좋지만…”

“왜요. 당신은 도움 없이도 멋진걸요?”

“당신의 정서적 지지 정도는 필요할지도 모르겠군.”

“웃기네요. 정서적 지지라니요, 제가 얼마나…”

그때였다. 

“노팅엄 경, 급한 소식이라 부득이하게 역에서 뵙니다.” 

기차를 타려는 이안에게, 긴급한 얼굴의 남자 하나가 달려왔다. 그가 남자의 귓가에 한참을 속삭였다. 

소식을 듣는 이안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그는 동요하는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곧 가겠네. 회의 소식은 수시로 파악해주게.” 

그가 침착하게, 그러나 자못 긴장감이 서린 말투로 매들린에게 말했다. 

“매들린, 정말 미안하오. 먼저 저택에 가있는 게 좋겠어.”

“무슨 일이에요?”

“간단한 일이오. 아무 일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다만 좀 귀찮은 일이라 시간이 걸릴 것 같군.”

그가 매들린의 볼에 가볍게 키스한 뒤,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모든 일을 잘 해결하고, 곧 돌아가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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