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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상상해왔던 순간 (90/121)

89화. 상상해왔던 순간

긴긴 금빛 머리칼을 단정히 틀어 올리는 과정은 고되고 힘들었다. 그래도 머리숱이 많아 예뻐 보일 거라며, 사람들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옅은 색조의 립스틱이 입술에 덧발리고, 다른 사람의 섬세한 손길로 단장 받는 기분은 묘했다. 자꾸만 얼굴을 간지럽히는 손가락들 때문에 웃음이 나오는 걸 애써 참아냈다. 

그렇게 모든 게 끝났다. 매들린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베일 뒤에 드리워진 얼굴이 은막에 영사된 이미지처럼 뿌옜다. 

‘이게 나….’

아주 가까이 거울을 들여다봐야 자세히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던 얼굴 위로 복잡한 감정이 금방금방 드러났다. 

나쁘지 않나? 이리저리 얼굴을 돌려가며 확인해본다. 반신반의하는 듯한 새신부의 얼굴 뒤에서 친구들이 너스레를 떨었다.

“…젠장, 너무 예쁘니까 확인할 필요 없어요.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봐요, 매들린. 꼭 우리 오빠랑 만나야겠어요?”

이사벨이 욕을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수지도 키득거렸다. 둘이 떠드는 걸 보고 있노라면 대서양 너머 친구들을 애써 불러모은 보람이 있었다. 

“웬만하면 봄의 신혼부부가 되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는데, 오빠가 그것도 못 참고…. 아직 서리도 안 떨어졌는데 밀어붙였죠.”

“하지만 그래야 연인을 쟁취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매들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저 지금 여기 있는데요. 그 연인이, 지금 당신들 눈앞에 앉아있다고요. 하지만 수지와 이사벨은 너무 흥분된 상태였고, 진정시킬 수 없었다. 

무척 긴장되는 것과 별개로 이미 한번 입었던 드레스여서인지 몸이 편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결혼식 도중에 토하는 건 사양이었다. 

[이 드레스는 선선대 백작부인과 내가 입었던 거예요. 오래된 옷이긴 하지만 수선을 다 해놓아서 흠 하나 없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전생과 똑같은 한마디라는 생각에, 심장이 조여왔었다.

전생의 결혼식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다. 아버지의 죽음과 빚 독촉으로 경황이 없었던 데다가, 그 이후로 부러 되새기지 않았으니까.

저 멀리서 걸어오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안이, 너무도 무서워서 주책맞게 울뻔했던 기억만이 있다. 

저를 마지못해 돌봐주던 후작부인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매들린, 밤에는 눈을 감고 그냥 버텨. 의연하게 닥칠 일을 견디란 말이야.]

그 말이 너무도 끔찍하고 화가 났었다. 팔려가는 물건처럼 제 의사 따위는 완전히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분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궁금한 게 있었다. 남자가 왜 하필 하고많은 ‘파산한 귀족 여자’들 가운데 제게 이런 제안을 해왔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저를 언제 봤다고 결혼을 하자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요!]

그 말을 들은 후작부인이 살짝 동정심 어린 시선을 던졌던 기억이 있다. 

[너를 몇 번 본 모양이긴 하더라. 전쟁 직전 사교계에서 여러 번 봤겠지. 전쟁 전에 데뷔탕트를 거쳤잖니? 그때 좋은 인상이라도 남긴 모양이구나. 하지만 매들린,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일단 그쪽에서 볼 때 이안 노팅엄이 하자가 있잖니. 그러니 파산한 너와 빨리 이어주려는 거 아니겠어?]

“……!”

아. 뒤늦은 깨달음. 매들린은 천천히 빙글빙글 남녀가 돌아가는 무도회의 광경을 떠올렸다. 그 누구도 갑작스레 끝날 거로 생각하지 않았던 1913년 런던의 사교계를 말이다.

사람들이 능숙하게 짝을 이뤄 춤을 추는 광경을 보며 우물쭈물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춤을 출지 말지 고민하며 몇 번 요청을 거절했던 것 같다.

이번 생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전생의 매들린은 대여섯 번째에, 기억도 나지 않는 어떤 영식의 춤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이안과 춤을 추지 못했던 것이리라. 거절하지 못해서.

만약 그때, 그녀가 계속해서 무연히 서 있었다면, 남자는 이번 생에서처럼 멋들어지게 다가왔을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때로는 아주 작은 선택이 많은 것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는단 걸 안 것이, 매들린의 두 번째 깨달음이었다.

이안과의 첫 단추부터 해서 많은 것들이 그렇게 바뀌었다. 그러나 지금 상념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등 뒤에서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로엔필드 아가씨. 이제 슬슬 준비해야 해요.”

아마 로엔필드 아가씨라고 불리는 마지막 순간일 터였다. 

“네. 준비됐어요.”

그녀는 거울 앞에서 일어났다. 

* * *

동화 속에서 신부는 신랑과 영원을 맹세하고 입맞춤을 하며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작은 예배당을 꽉 채운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구석에서 훌쩍이는 아버지는 더더욱. 이사벨도, 홀츠먼도, 선생님 오츠 부인도. 왠지 맥도먼드 부부와 엔조도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수지가 있으니까.

아무튼 소중한 사람들조차 볼 겨를이 없었다. 엷은 면사포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서인지, 길의 끝에 오로지 이안 노팅엄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력이 나쁜데도 남자의 표정을 알 수 있었다. 기대와 공포, 열정이 뒤섞인 표정. 남들이 볼 적에는 무척 무감해 보이는 겉모습의 이면에 거대한 화약고가 있었다. 무서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할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세 번째 기회는 없다. 매들린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아. 괜찮지 않을까? 실수하고 엉망진창이 된다 해도 당신의 곁에 내가 있다면 말이야.’

매들린이 결심을 내리고 미소지으며, 남자의 팔을 잡았다. 

그 순간 그녀는 이안이 숨을 멈추고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접촉 때문인지, 매들린의 화사한 얼굴을 가까이 봐서인지, 정확한 이유야 이안만이 알 터였다.

신랑 신부는 모두의 축복과 환호 속에서 그렇게 서약의 키스를 했다.

* * *

샴페인 잔을 두어 번 들이키자 살짝 머리가 띵했다. 술을 한참 안 마시다 보니 주량이 줄어든 모양이었다. 그걸 은연중에 파악하고 있었는지, 매들린이 한잔을 더 들이키려 하자 남자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말렸다. 더 마시면 피곤할지도 모른다고 속삭이면서. 

제 아내가 첫날밤에 졸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이안.’ 

사실 매들린은 너무 긴장이 된 나머지 술을 찾는 중이었다. 지나치게 긴장해서 피곤할 뿐이었다. 

숙맥에다가 겁쟁이인 게 들키면 얼마나 분위기가 이상해질지 알 수 없었다.

하기야, 남자도 긴장은 되는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홀츠먼과 이사벨이 치근덕거리는 걸 뻔히 보고도 아예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매들린에게 완전히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 주의의 대상이 된 처지에선 부담스러웠다. 

기분 나쁜 부담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정말 속에 나비나 개구리가 앉은 것처럼 매슥매슥하고 이상한 방식으로 긴장되었다. 

조촐한 피로연이 끝나고 노곤해진 신랑·신부는 모두의 재촉과 성화 속에서 퇴장했다. 당장 이곳을 나가라는 축객령이 쏟아졌다. 

“우리 저택인데, 어이가 없군.”

이안이 못 말린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본 매들린이 큭큭 웃었다.

둘은 속닥거리며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전기등이 설치되어서 발을 헛디딜 염려가 없었다. 하나둘 천천히 난간에 의지하며 올라가던 이안이 돌연 멈춰 섰다. 

“싫으면, 물러서도 괜찮소.”

“…….”

“하지만 같이 가는 순간 돌이킬 수 없어.”

“알고 있어요.”

“자제력이 넘쳐나는 사람이 아니라 미안하오.”

꿀꺽. 침을 삼키며 매들린은 찬찬히 이안의 얼굴을 살폈다.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서 알아보기 어려운 얼굴 한편으로 안광이 빛났다. 

“…좋아요. 그리고 물러선다는 이야기는, 낭만적이진 않아요.”

핏. 바람 빠진 것처럼 웃는 소리가 났다. 그가 매들린의 입술에 제 입술을 비비듯 키스했다. 

“올라가요. 당신을 원해요.”

* * *

침실은 이전과 달랐다. 딱딱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아니라, 적당히 생활감 있는 색조로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그걸 세세히 감상할 정신머리가 있을 리 없었다. 이안은 몇 번이나 생각하고 연습한 것처럼 쉽게 웨딩드레스를 벗겨냈고, 매들린은 그 능숙함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너무.. 너…무 잘하잖아요?”

“…….”

이안이 그녀의 드레스를 내리며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들이쉬는 거센 숨결이 너무 적나라해서 기절할 지경이었다. 

이안이 정신없이 쏟아내듯 말을 뱉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안고 싶어서 미쳐버릴 때. 외로움 때문에 자살하고 싶을 때가 있어.”

“…….”

무슨 말로도 대꾸할 수 없었다. 

“그때 이 순간을 상상하고 또 상상하면 좀 낫더군.”

내 손 아래에 잡히는 이 살결을 말이야. 

“…….”

“죄를 짓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지.”

“… 그..그만-.”

“난 분명히 경고했소. 같이 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고.”

매들린은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기댔고, 남자는 제 의족을 벗어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놓았다.

그가 제 옷을 벗는 소리가 났다. 매들린 역시 어떻게든 의복을 마저 벗어버리는 데에 성공했다. 이따금 느꼈던 격렬한 욕망의 불길이 지펴져 올라왔다. 이안이 그 모습을 보고 청년처럼 맑게 웃었다.

“순진무구한 당신이 이리 원하는 걸 보니 너무 귀여워 죽을 것 같군.”

“그래도 봐줄 생각은 없잖아요?”

“당연하지. 말했잖소. 난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두 몸이 전라가 된 건 시간문제였다. 매들린의 곡선으로 이루어진 하얀 몸과 이안의 뼈대가 큰 몸이 드러났다.

이안은 넋이 나가 할 말을 잃은 채, 거친 두 손으로 그녀의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제 몸의 결손이나 흠 같은 것에 정신을 쏟을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그녀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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