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당신의 생각은
환한 응접실에서 애프터눈티를 마시며 둘은 결혼식 계획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안이 내민 두꺼운 서류를 받아든 매들린의 얼굴이 그만 사색이 되었다. 일단 방대한 분량도 분량이었거니와, ‘결혼식 및 피로연, 신혼여행의 건’이라는 제목을 붙여도 무리가 없을 건조한 문체로 쓰여있었다.
게다가 웨딩드레스며, 매들린이 입고 걸칠 것들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예산이 배정돼 있었다. 현실감각이 투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안을 냅다 결재 올리듯 내미는 것이 뭔가 싶었다.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어째서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양 눈썹을 위로 기울이는 남자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평정을 찾아야 한다, 평정을 찾아야 한다. 눈앞에 있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읽으며 생각했다. 공주의 결혼식도 이 정도는 아닐 터. 세간의 이목을 끌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실속이 없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해질 지경이었다.
“지나쳐요.”
“지나치다…라.”
이안의 숱 많은 검은 눈썹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가 이번에는 미간을 찌푸렸다.
“왕족처럼 대성당에서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화동들이 걸려 넘어질 정도로 긴 면사포도 필요 없고요. ”
“동감이오.”
이안이 제 미간 사이를 손가락 마디로 꾹 눌렀다. 실용적인 걸 좋아하는 남자니, 거추장스러운 결혼식은 원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근데, 이 계획은 거의…. 그에 필적하는…. 아니, 그보다 심한 것 같아요.”
매들린이 종이를 들고 이안의 앞에서 팔랑였다. 정작 상대방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고개를 기울이며 시선을 피했다. 솔직하지 못한 남자. 매들린은 자칭 이안 노팅엄의 전문가로서 그의 저의를 파악하고자 애썼다.
“아, 알아냈어요.”
“뭘 알아낸단 말이오. 그때 그 열차에서처럼 내 생각을 맞춰보려고 하는군.”
“하하.”
매들린이 다시 그 카드를 펼치는 점성술사 같은 제스처를 취했다. 이안이 끄응 웃음을 애써 참아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미국에서 한 이야기 때문에 그러는 거죠?”
“음?”
남자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굴자 매들린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때, 법원에 서류 제출한다는 걸 애써 말렸더니, 이제 제대로 해보겠다는 거잖아요.”
“…….”
“정말 괜찮으니까. 이런 건 당장 취소하는 게 좋겠어요.”
‘피로연 하나 치르느라 온 영국의 장미를 다 꺾게 생겼네.’
에릭이 했던 말이 새삼 와닿았다. 날 때부터 부자인 사람들은, 사고 체계 자체가 다르다고. 물론 말하는 본인도 날 때부터 잘 사는 이였지만 말이다.
매들린이 종이를 스윽 밀어 탁자의 다른 편으로 치웠다.
“어떤 게 좋겠소?”
“제 의견을 묻는 건가요?”
“…….”
남자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뭔가가 생각났는지 재빠르게 덧붙였다.
“물론, 결혼은 한다는 조건에서. 그리고 내가 의미하는 결혼은, 성직자 앞에서 맹세하고 관계 서류를 법원에 제출하는 것까지를 포함하오.”
“농담도 참 짓궂으시네요…. 제가 여기까지 와서 결혼을 안 하겠다 할 리가 없잖아요. 정말 약혼자에 대한 신용이 땅바닥에 떨어졌다고밖에는 말 못 하겠어요. 물론 그럴 만한 일이 있기는 했지만.”
매들린이 씁쓸하게 미소짓자 이안이 고개를 저으며 매들린의 손 등 위로 장갑 낀 제 손바닥을 포갰다.
“농담이었어. 이제 그럴 일 없으니까 상관없잖소. 그보다 우리의 결혼식에 대한 당신 이야기가 듣고 싶군.”
“내 생각이 그렇게 중요하…”
“중요해.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래요?”
“그렇소. 처음에는 당신의 의중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건 실수였소.”
실수. 단어의 선택이 미묘했지만, 뜻은 알았다. 매들린이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작은 결혼식을 하고 싶어요.”
“…그렇군.”
“아주 작은, 소규모 결혼식이요.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들만 모여서 작게 치르고 싶어요. 이곳 노팅엄 저택 가까이에서 했으면 좋겠고요. 물론, 당신의 사회적 위신과 체면도 중요하죠. 그건 잘 알고 있어요.”
위신과 체면이라. 이안은 솔직히 말해, 그런 것에 단 1온스만큼의 무게도 두지 않았다. 어차피 제 몰골에서 점수가 깎일 텐데 무슨 소용일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발설했다가는 매들린이 곧바로 경을 칠 터였다.
“…그, 예배당 어때요?”
“예배당?”
이안이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이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내 뭔가가 생각났는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진심이오? 버린 곳이나 다름없는 폐가 같은 곳에서 결혼식을 하고 싶단 말인가? 거의 백 년 가까이 방치돼 있었을 텐데.”
“세인트폴 대성당 정도로 화려하진 않지요. 하지만 당신 말대로 폐가 같지는 않아요. 세바스천이 이따금 관리해놓아서 깨끗하다고요.”
“흐음.”
이안이 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기는 동안(여전히 한 손은 매들린의 손 등을 쓰다듬는 중이었다), 매들린은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예배당에서 같이 영화를 보던 중 이안이 쓰러졌던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때를 기점으로 돌이킬 수 없이 메말라갔던 관계가 안타까웠다.
“…그게 당신의 생각이라면, 그렇게 추진하리다. 하지만 그전에 좀 준비를 해두어야겠어.”
“고마워요.”
“왜 고마워하는 건지 모르겠군. 당신의 뜻이 내 뜻인데.”
이안의 초록 눈이 오후의 느지막한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였다.
* * *
장소가 바뀐지라 하객의 명단도 줄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매들린은 자신과 이안의 결혼이 사회 명사가 주최하는 거대한 행사처럼 치러지는 게 싫었다. 그 끔찍한 노팅엄 가문 사람들이 몰려와서 수선을 떠는 것도 싫었고, 냄새를 맡고 찾아올 지역신문 기자 양반들도 끔찍했다.
하지만 그러느라 이안이 초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또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벌써 노팅엄 백작부인의 마음가짐이 되어가네.’
매들린 로엔필드에서, 매들린 노팅엄이 되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한숨을 쉬는 와중이었다. 2층에 나 있는 창문 너머로 홀츠먼과 이사벨이 보였다. 마른 이사벨이 홀츠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둘이 뭐가 웃긴지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저 둘이 콩깍지 안의 콩들처럼 저리 화기애애할 때가 있었죠.”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매들린이 고개를 돌렸다.
마리아나 노팅엄 선대 백작부인이었다. 단순한 드레스에 온갖 자수가 놓인 가운을 걸친 그녀는 무언가 무척 나른하고 편안해 보였다.
“노팅엄 부인.”
“정 없게 노팅엄 부인이라고 하지 말아요. 마리아나라고 불러줄래요?”
“…마리아나.”
“이제 가족으로 얽힐 사이인데 좀 더 친해져야 하겠지요.”
마리아나와는 병원 때 자주 이야기를 나눴었다. 물론 이안에 대한 주제로 뭔가 말을 나눠본 적은 없었다.
“나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에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은 대부분 루이스에게 맡겼고, 루이스가 떠난 이후에는 이안에게 의지했지요.”
작고한 선대 백작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여자의 얼굴은 묘했다. 물기 어린 눈동자에서 희석된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런데 병원이 많은 걸 바꿔놓았어요.”
“…저도요.”
그 경험은 모두를 바꿔놓았다. 영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전쟁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 상처를 남겼지만, 그때 이사벨과 함께 일하면서, 내 안에서 뭔가가 영영 바뀌어버린 것 같아요.”
“…….”
매들린이 두 눈을 깜빡였다.
“매들린이 그렇게 떠나고 이사벨까지 사라지니, 남자들이 만들어내는 적막감을 참 못 견디겠더군요. 이렇게 둘이 돌아오니 병원을 꾸리던 옛날 생각이 나서 참 좋아요.”
“저도 그래요. 마리아나.”
매들린이 눈을 접으며 햇살 같이 웃었다. 마리아나는 그런 매들린의 환한 미소가 어색한 듯 눈을 깜빡이며 작게 미소지었다.
“다시 옛날처럼 무언가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아. 매들린이 순수한 기쁨으로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마리아나가 그런 뜻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마리아나, 저도요.”
매들린이 덥석 손을 내밀어 마리아나 노팅엄의 손을 잡았다. 그런 친밀감 넘치는 스킨십에 수줍음을 탔는지 백작부인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우리 같이 많은 걸 해요.”
그때였다. 둘의 지척에서 헛기침하는 소리가 났다. 매들린이 마리아나의 어깨를 넘어 바라본 곳에는 이안이 살짝 멋쩍게 서 있었다.
“둘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긴 싫지만, 지금 최종 하객 명단을 작성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
뭐가 좋은지 히죽거리며 웃는 매들린의 모습에, 이안이 자신의 어머니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안. 매들린이 네 앞에서만 웃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하지만 정곡을 찔려 언짢은 듯 그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무튼 너희 둘이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 기쁘구나. 늦었지만 지금 이야기해야겠어.”
“어머니, 지금은 하객들의 명단을 빨리 정해야…”
“매들린, 이안을 잘 부탁해요. 이 아이를 저리 살갑게 만드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매들린뿐이니까.”
“맙소사. 어머니.”
이안이 저리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매들린의 웃음이 이번에는 장난기를 띠기 시작했다.
“후후. 이안, 저랑 있는 게 살가운 거라면 문제가 있네요. 걱정 마세요, 마리아나. 제가 이안을 아주 사랑받는 아들로 만들어드리겠어요.”
“…음.”
언제 둘이 저렇게 친해졌나. 서로 합심해서 자신을 놀리는 모습이 딱히 싫지는 않았다. 매들린에게 딱히 말하지 않은 이야기지만, 마리아나는 이안이 결혼식 소식을 전하자마자 무척 좋아했다.
무척 좋아한 정도가 아니었다. 전보를 보낸 다음 날 답으로 얼른 식을 치르라며 압박까지 해왔다. ‘전과니 공산주의자와 얽힌 추문 같은 건 상관없다, 네가 그렇게 사람 같지 않은 몰골로 밖으로 내도는 꼴을 보기 싫다.’ 했다.
‘그간 꽤 적적하셨던 모양이군.’
이안은 제가 저지른 불효에 살짝 송구스러웠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전생을 모르는 그는, 제 어머니의 인생 또한, 많이 바뀌어버렸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중요할까. 남자는 하객 명단을 두고 토론하는 고부를 바라봤다.
‘…이러니까 정말 가족 같네.’
문득 든 생각에, 주체할 수 없이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그는 자제력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금세 다시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