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돌아온 이사벨
“에릭이니? 들어와.”
문 너머로 들리는 것은 분명 이사벨의 목소리가 맞았다. 그 소리를 알아들은 매들린이 활짝 웃었다. 뒤돌아서서 그 모습을 본 에릭이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 고초와 모욕을 겪고도 순수하게 사람을 반가워하는 저 얼굴이 참 신기했다.
문이 열리자 매들린이 본 것은 침대에 앉아있는 가냘픈 형상이었다. 뒤쪽의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고 있어서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나는 이만 여기서 빠지지요.”
에릭이 속삭이듯 말하고 물러섰다. 매들린은 한 발자국씩 방 안으로 들어갔다.
* * *
가까이 다가가자 형체가 이사벨임이 더 분명해졌다. 고고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했는데, 지금은 너무도 마르고 아파 보였다.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 알지 못할 일이었다.
“이사벨, 나예요.”
“…매들린.”
목소리가 잔뜩 쉬어있었다. 매들린이 이사벨이 앉아있는 침대 가장자리 가까이 다가갔다. 여기서 보니 그녀는 숫제 겨울의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심장이 덜컹거렸다.
“오랜만이에요.”
“…….”
멍하니 매들린을 바라보던 이사벨이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회한과 슬픔이 뒤섞인 흐느끼는 소리에 매들린은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미안해요. 내가 다 그르쳤어요.”
이사벨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
매들린이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제야 알아차린 사실은, 눈앞의 여자가 어리다는 점이었다. 혁명과 사상을 논할 때마다 눈에 불꽃이 튀던 그녀 역시, 결국 혈기에 치우친 한 젊은이란 것이 실감 났다. 동경의 베일이 걷히자 사람이 보였다.
“그때 너무도 무섭고 수치스러워서, 나는-.”
“말하지 않아도 돼요.”
매들린이 담담하게 말했다. 용서한다느니, 모든 게 괜찮다느니 같은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터였다. 사실과도 거리가 멀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일어났던 수많은 일을 축소하는 발언이었으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했다.
“그동안 유럽에 있었어요?”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죠.”
그녀가 힘없이 웃었다.
“내 치기 어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어요. 매들린, 어리숙한 귀족 여자가 세상 돌아가는 걸 바꿀 순 없는 거였어요.”
그렇다고 또 역사와 시대의 무게에 깔려 죽어 순교자가 될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다시 이곳으로 왔다고 말하는 이사벨의 목소리는 바스락거렸다.
“수치스러웠어요.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것도 전부 오라버니의 돈 덕분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부정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요.”
“이사벨.”
어리숙한 귀족 여자가 세상 돌아가는 걸 바꿀 수 없단 건, 매들린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전쟁을 막지도 못했고, 이안이 다치는 것 또한 막을 수 없었다. 전생보다 더 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바뀐 것도 있었다. 이안은 몸과 마음을 다쳤지만,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있었다. 매들린은 자신이 사랑하리라 예상하지 못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또한, 전생이라면 몰랐을 사람들을 알았다. 생명을 치료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이사벨, 당신은 내 회귀의 첫 번째 증거지요. 그래서 나는 당신을 그렇게 쉽게 용서해버렸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매들린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 * *
잠깐 어머니인 마리아나 노팅엄과 저택의 대소사를 의논한 이안은 대화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매들린을 찾았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치고는 매우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매들린의 방에 그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한참 매들린을 찾던 그는 복도에 가만히 서 있는 제 동생을 보자마자 신경질적으로 질문을 내질렀다.
“매들린은 어디 있지?
“집이 너무 넓다는 게 이럴 땐 참 안 좋죠.”
어렸을 때야 숨바꼭질을 하기 좋았지만, 이제는 불편함이 더 크다며 에릭이 너스레를 떨었다. 실없는 대꾸를 들은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를 할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헛소리 말고-.”
“이사벨이랑 이야기 나누고 있어요.”
“…….”
이안이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에릭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당장 비키라는 무언의 제스처에 에릭이 한숨을 쉬었다.
“형님. 형님이 이사벨이랑 매들린을 떨어뜨려 놓고 싶어 한단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만나게는 해줘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문제가 해결되죠.”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적절한 방식으로 만나야겠지. 그리고 이제 문제가 일어날 여지는 없어.”
“둘은 친구-.”
“잘 알고 있다. 그 빌어먹을 우정 때문에 매들린을 잃을 뻔했어. 다시는 그런 실수할 생각 없으니 비키도록.”
에릭이 입을 잠시 다물었다. 에휴, 이 빌어먹을 통제광 형님 같으니. 하지만 그만큼 이사벨과 매들린 사이에 있었던 일이 남긴 상처가 깊다는 의미였다. 에릭은 그때의 이안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형님이 우리 두 사람을 미워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번에는 매들린을 좀 믿어봐요.”
“미워한다니? 헛소리 말아라.”
“…비난하려고 없는 소리 지어내는 건 아니에요.”
에릭이 침착한 표정으로 이안에게 말했다. 청년의 초록 눈동자가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래도 형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아버지가 편찮으셨을 무렵부터 형님이 우리 집의 가장이었으니까요. 그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이제야 조금 알겠다니까요. 그 와중에 한 녀석은 열등감에 찡얼거리고, 한 녀석은 또 혁명을 부르짖으니 골 아팠겠죠.”
“마음에도 없는 자학은 그만하지? 슬슬 소름이 돋으려 하는구나.”
제 동생의 속내를 들은 이안은 무척 떨떠름해 보였다. 하긴, 이안은 살가운 것과는 거리가 먼 남자였다. 전쟁으로 인해 다치기 이전에도 그는 동생들에게 권위적이었다. 그 권위에는 언제나 가족으로서의 애정이 있었지만, 그래도 어린 마음에는 반항심이 들었다. 잠깐 매들린에게 수작을 부린 것도 어쩌면 그 반항기의 소산이었을지 몰랐다.
“매들린은… 그런 형님께는 유일한 안식처였겠죠.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이 그걸 빼앗으려 했잖아요? 부당하게 느껴졌을 만도 합니다.”
“…….”
이번에 이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에릭과 이사벨을 원망한 적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 테니까.
매들린은 온전히 그의 것이어야만 했다. 아무리 동생들을 사랑한다 해도 한 조각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에릭이 별장에 매들린을 초대한다며 득의양양하게 굴었을 때, 얼마나 증오스러웠는지 모른다. 치졸한 감정이란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도 티를 내진 않았다.
갓 전쟁터에서 나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자신과 달리 에릭은 밝고 명랑한 청년이었다. 어쩌면 매들린과 가장 어울리는 한 쌍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믿지도 않는 신을 원망했었다.
이사벨에 대해서도 복잡한 감정이 있는 건 맞았다. 애써 그 미움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애초에 둘은 오래전부터 신념이나 가치관이 완전히 달랐다. 사소한 대화가 언쟁으로 불붙고는 했다. 하지만 태생적인 성향 차이가 다가 아니었다.
전쟁 전, 매들린과 이사벨이 친해졌을 때부터 석연찮은 감정이 있었다. 그 핑계로 매들린과 말이라도 한마디 더 섞을 수 있는 건 좋았으나, 불안했다. 그는 제 혈육과 매들린을 나눠 갖는 건 사양이었지만, ‘거대한 이념’ 따위와는 더더욱 나누고 싶지 않았다. 괜히 매들린이 이사벨을 따라서 위험한 행동을 벌일까 걱정스러웠다.
결국에는 그렇게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막판에 증언을 뒤집은 건 매들린의 선택이었다. 그러니 온전히 이사벨만의 탓은 아니란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사건의 발단을 일으킨 제 동생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그녀를 끝까지 내치지 못한 건 매들린의 당부가 적힌 편지 덕분이었다.
에릭이 제 형님의 복잡한 심사를 눈치챘는지 이안의 어깨를 살살 두드리고는 그를 지나쳐갔다.
* * *
매들린이 콧노래를 부르며 서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전생에서 남편이 애용하던 서재였다. 책의 배치도 거의 비슷한데, 뭔가 미묘하게 달랐다. 책등을 손가락 끝으로 훑던 매들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멸망사>라든지 월터 스콧의 <아이반호> 같이 그가 어린 시절에 읽은 책들과 경제학책들, 존 메이너드 케인스라는 사람이 쓴 <화폐개혁론> 같은 책들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나이팅게일 자서전이라든지, 간호학 관련 책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너희들이 범인이었구나.”
매들린이 살풋 웃으며 책을 꺼냈다. 페이지 귀퉁이가 접혀있는 걸 보니 다 읽은 게 분명했다.
다시 제자리에 책을 꽂아 넣은 매들린은 계속 서재를 둘러보다가 익숙한 책등을 발견했다.
<탬벌레인 대왕>
매들린이 추억에 잠겨 책을 펼쳤다. 오래된 종이가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바스락거렸다. 전생을 반추하자 왠지 서글퍼지기도 했다.
‘우리는 둘이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도 너무나 행복하지만, 과거의 남자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다가 맨 끝으로 가자 연필로 뭉툭하게 적은 메모가 보였다. 아니, 희귀한 초판본에다가 낙서를 갈기다니, 누구의 짓이지! 분노한 매들린은 이내 낙서한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휘갈겼지만 못나지 않은, 거친 글씨체는 분명 이안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 이해할 수 없음, 도대체 왜?
“…응?”
주인공을 이해할 수 없단 건지,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단 건지, 이 책을 재밌게 읽었다는 매들린을 이해할 수 없단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끝까지 책을 읽고 짜증이 나서 쓴 거란 건 분명했다.
‘낭만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란 걸 알지만, 얼마나 짜증이 났으면 책에다 낙서를 다 했을까…’
어차피 제 소유물이니 마음대로 다룬 거겠지만 말이다. 슬몃슬몃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재밌는 거라도 발견한 모양이군?”
뒤에서 이안의 목소리가 들리자, 매들린이 책을 서둘러 덮었다.
“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
이안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가 매들린의 뒤로 붙자, 어쩐지 몸 둘 바를 몰랐다.
“아.”
이안이 매들린이 왜 웃었는지 짐작한 모양이었다. 이제 그가 쑥스러워할 차례였다.
“당신이 초판본에다 낙서를 다 할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잠시 분별력을 잃은 모양이오. 그리고 그건 낙서가 아니라 메모요.”
“일단 말해봐요. 뭐가 싫었던 거예요?”
매들린이 눈을 반짝였다. 비록 취향이 다를지라 하더라도 이안에게 솔직한 감상평을 듣고 싶었다. 매들린을 곁눈질하던 이안이 한숨을 쉬며 안락의자에 앉았다.
“일단 전쟁은 극본에서 묘사되듯이 전혀 명예롭거나 흥분되는 일이 아니오. 거기서부터 공감이 안 되니까 주인공이 하는 행동이 다 이해가 안 가더군.”
“…….”
“뭐, 일개 병졸의 입장과 ‘대왕’의 입장이 같다고는 할 수 없겠지. 많은 걸 소유하면 할수록 기분 좋아지는 것도 사실이니, 주인공의 탐욕스러움을 비난할 수만은 없어….”
그가 말끝을 흐렸다. 뭔가 살짝 불쾌한 기색에 매들린은 더는 추궁하고 싶지 않았다. 매들린은 모르는 일이었지만 약간의 동족 혐오가 배어 있는 말투였다. 그녀가 안락의자로 재빨리 다가가 이안의 어깨를 만졌다.
“빨리 결혼식이 열렸으면 좋겠어요.”
그 말과 함께 이안의 머릿속에서 책에 대한 생각이 휘발되었다. 오늘 점심에 이사벨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보려 했던 생각도 덩달아 사라졌다.
그가 위를 올려다보자 생글생글 웃고 있는 매들린의 모습이 보였다. 이안은 볼 안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씹어가며 미소를 참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