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드디어, 드디어 (87/121)

86화. 드디어, 드디어

‘라이오넬 에머스트. 역시 내가 아는 누군가를 닮았어.’

연회장을 빠져나오고 나서야 매들린은 뒤늦게 자신이 느꼈던 미묘한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시감이었다. 그러나 그 기시감의 원인까지 파악할 순 없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미청년을 본 적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생각이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이안과 함께 계단을 내려가면서 딴생각을 할 순 없었다. 

“이안, 내일이면 도착이네요.”

“고생했소.”

음? 고생은 이안이 더 했죠. 매들린이 조심스레 이안의 턱 가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연회 시작 전부터 피로해 보이는 그가 안쓰러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춤을 추면서 힐끔힐끔 남자를 돌아보고 확인했다. 간호사로서 진찰을 내릴 순 없었지만 말이다.

물론 지금 그녀가 발휘하는 관찰력은 그것과는 상관없었다. 그보다는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더 신경 쓰이는 법이니 당연했다. 

그녀는 이리저리 이안을 확인했다. 그 감시가 싫지 않은 듯 남자는 말 잘 듣는 짐승처럼 그 눈길과 손길에 어울려줬다. 

“어디 보자…”

“상처 난 곳은 없소?”

“그럴 리가요. 그보다는….”

자신보다 갑절은 커 보이는 남자를 걱정하며 이리저리 안색을 살피는 매들린의 모습은, 혹자에게는 이상해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남자 쪽은 전혀 싫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였을 때보다 여자와 단둘이 복도에 있을 때 더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다. 

“원래도 딱히 외향적인 편은 아니었죠?”

“…그다지 친구를 사귀는 편은 아니긴 했지.”

“하긴, 처음 뵀을 때도 좀 그랬어요, 당신은.”

“그랬다라?”

남자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 나누고 있는데 대뜸 찾아와서는, 사냥 재밌다고 하질 않나, 갑자기 왜 미워하냐고 따지질 않나.”

“그거야 당신이 날 이유 없이 미워했으니까. 억울했을 뿐이오.” 

어…. 그 말에는 솔직히 대꾸하기 어려웠다. 사실이잖나. 매들린이 그를 미워하며 죽다 살아났단 사실을 토설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할 말을 잃은 매들린의 모습에 이안이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가 무언가 생각난 듯 그녀에게 속삭였다.

“신혼여행지 생각해놓으시오.”

* * *

다시 찾은 노팅엄 저택은 기억과 똑같았다. 여전히 고풍스럽고, 고고하고, 침범할 수 없는 요새 같은 분위기. 여러 사람이 황급히 돌아다니던 예전의 활기는 없어졌다. 전쟁 전에는 사용인들이, 전시에는 의료진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하기야, 만찬이나 연회니 하는 일도 자주 있지는 않을 테니까. 게다가 주인이 밖으로 나도는 터라 일도 적을 터였다. 

차 밖에는 예전의 방식대로 사용인들이 줄을 서서 이안과 매들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얼굴들이 더러 보였고, 익숙한 얼굴들은 저마다 세월의 풍파를 맞은 모양새였다. 그 모습에 어쩐지 마음 한쪽이 뻐근했다. 전의 삶에서는 큰 관심 두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나 이번에는 다르기를 바랐다. 

‘잘해야지.’

뭐가 됐든 말이다. 

사용인들보다 한 발자국 앞에 선대 백작부인과 에릭 노팅엄이 서 있었다. 시력이 좋지 않은지라, 차창 너머 힐끔힐끔 보면서 그들이 맞나 아닌가 가늠했는데 그녀의 옆에서 이안이 부드럽게 말했다. 

“어머니와 에릭이오.” 

“앗.”

매들린은 서둘러 차체에 눌려 구겨진 드레스 옷자락을 손끝으로 폈다. 다행히 틀어올린 머리는 장시간의 여행에도 불구하고 무사했다. 

“괜찮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구면이지 않은가.”

“아니, 그래도, 경우가 다르잖아요.”

따지고 보면 약혼녀인데. 어쩌지. 매들린은 안절부절못했다. 돈도 없는 데다가, 불미스러운 일에 휩싸인 전적이 있는 사람을 받아주려나 걱정스러웠다. 그런 불안한 마음을 아는지, 이안이 다독이듯 말했다. 

“걱정 안 해도 될 거요.”

마침내 이안, 홀츠먼과 함께 차에서 내렸을 때, 매들린은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드디어, 드디어….’

그녀는 회귀 후의, 전인미답의 영역을 걸어 나가고 있었다. 보지 못한 미래와 사건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한치 예측도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선대 백작부인, 마리아나 노팅엄과 이안이 먼저 인사를 나누었다. 그다음 이안와 에릭이. 마지막으로 홀츠먼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이제 매들린이 나설 차례였다.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매들린이 우물쭈물했다. 

이안이 잠깐 머뭇거리더니 매들린을 향해 몸을 돌렸다. 눈을 깜빡이며 작은 가방을 목숨줄처럼 붙들고 있는 여자가 보기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슬쩍 웃더니 말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제 부인될 사람입니다.”

“이안!”

이런 식으로 격의 없이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폭탄선언을 날리는 남자 때문에 심장이 하나로는 모자랐다. 

다행히 선대 백작부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이안. 이미 네가 몇 번이고 전보와 전화를 통해 말해서 알고 있단다. 말 수 없는 네가 그렇게 인이 박이도록 자랑을 하는 통에 잊으려야 잊을 수 없지 뭐니.”

“…….”

매들린이 이안을 노려봤다. 자랑, 자랑이라고? 매들린이 청혼을 한 뒤로 언제 시간이 그렇게 났다고 전화와 전보를 했단 말인가. 뒤통수에 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느낄 터인데도, 남자는 그저 득의만면 웃을 뿐이었다. 

“자랑이라는 단어에는 어폐가 있군요, 어머니.”

“에휴. 형님도 참, 로엔필드 양이니까 받아주는 거야.”

속이 아주 시커매가지고는. 에릭이 중얼거리는 걸 홀츠먼이 받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최근에 저도 모르는 이안의 모습을 너무 많이 봐서, 솔직히 부담스러울 지경이군요.”

“다들 그만해.”

이안이 쯧 고개를 젓더니, 팔을 내밀어 매들린을 앞세웠다. 

“모두와 회포를 풀고 싶지만, 지금 많이 피곤할 겁니다. 푹 쉴 수 있는 방을 주시죠.”

* * *

저택의 새로운 차기 안주인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사용인들 사이에 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어떤 방식으로 전해지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적어도 적의나 냉랭함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의 희망 같은 게 느껴져, 조금 부담스러웠다. 

심지어 세바스천은 눈시울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드디어 백작님께서…. 감개무량하군요.”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네.’ 

세바스천과 악수하면서 매들린은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집사가 도대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자신과 이안의 손자 손녀까지 그리고 있는 일인지는 당최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모두와 통성명을 하고 난 뒤 얼마 안 되는 짐을 풀기 위해 젊은 남자 사용인 둘이 나섰다. 

그녀가 지낼 방은 위층에 있었다. 전의 삶에서 매들린과 이안은 몇 년 간 부부였지만 침실을 따로 썼다. 위층과 아래층에 따로. 그런데 이번에 그녀는 이안과 같은 층의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뭐…,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겠지만.’

매들린은 정갈하게 꾸며진 침실에서 행장을 풀었다. 며칠간 여행을 한 피로가 몸을 짓눌렀다. 그렇게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는 그녀는 뒤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다시 일어났다. 

“누구시죠?”

“에릭입니다.”

* * *

그녀는 어느새 에릭과 함께 복도를 걷고 있었다. 복도를 걸으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저택이었다. 

‘집이라기보다는 궁전이네.’

하지만 다른 생각을 많이 할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에릭은 어쩐지 많이 성숙해져 있었다. 전쟁을 겪고도 앳된 티가 많이 나던 얼굴은 살이 내렸고, 무척 정돈된 기색을 풍겼다. 

“잘 지냈느냐고는 굳이 묻지 않을게요.”

에릭이 멋쩍게 웃었다. 

“고마워. 솔직히 그런 질문을 던지면, 대답하기 어렵거든.” 

감옥에 가고, 총에 맞고 하는 일들이 썩 유쾌하진 않았으니 말이다. 

“뭐…, 형님은 그다지 잘 지내지 못했거든요.”

“…….”

“…그쪽이 미국으로 떠난 이후, 저택에 돌아와서 미친 사람처럼 재활인지 운동인지 하더군요. 처음에는 스스로를 고문하나 싶었어요.”

“…….”

할 말이 없었다. 매들린이 무슨 말을 더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눈가가 자연히 축축해졌다. 자신이 미국으로 떠난 후, 이안이 어떤 마음으로 지냈을지는 떠올릴 수 없었다. 

“그거 알아요? 여기 잘 둘러보면 신식 가전제품들이 많아요. 형님은… 어쩌면….”

당신이 이곳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건지 몰라요. 그 뒷말을, 에릭은 내뱉지 않았다. 하지만 매들린은 알 수 있었고, 죄책감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런 그녀를 보자 그제야 에릭이 실수했다는 듯 안절부절못했다.

“매들린, 울 것 같은 표정 짓지 말아요. 모든 게 잘 되었잖아요. 게다가 지금 당신이 울고 있는 걸 이안 형님이 알게 되면 나 쫓겨날지도 몰라요. 형님이 냉정한 건 알잖아요.”

“울지 않아요.”

“…정말 울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해요?”

“……?”

동시에 에릭의 발걸음이 한 방문 앞에서 멈췄다. 에릭의 시선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가 말했다. 

“화내도 괜찮아요. 슬퍼해도, 일단, 마음의 준비부터….”

그제야 매들린은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이사벨 노팅엄의 방문 앞에 있었다.

“이사벨…?”

“…한두 달 전부터 이곳에 와서 요양하고 있어요.”

“몸이 많이 안 좋은가요?”

“…….”

요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화들짝 놀라 이사벨의 안부를 묻는 모습에 에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짠하고 안타까운 것을 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매들린. 태어날 때부터 부자라는 건, 엄청나게 재수 없는 족속이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어요.”

“그 이야기가 지금 왜…?”

“이사벨처럼 이상주의자 행세를 하건, 형님처럼 현실주의자로 살건. 세상에 대해서 어리숙하고 잔인하게 굴 때가 있단 말입니다.” 

“……”

“이사벨의 그 행동이 아니었다면, 당신이 감옥으로 가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에릭의 말투는 정돈되어있었다. 사실을 직시하는 투에, 매들린까지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건… 에릭, 솔직히 말해 그 낯선 남자를 숨겨줬을 때, 처음에는 이사벨을 위한 게 맞았어요. 하지만, 그 뒤에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

“완전히 원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보고 싶어요. 이사벨은 내 친구니까요.”

에릭이 그 말에 한숨을 쉬었다.

“매들린, 당신은 정말 형님 옆에 꼭 붙어있어야겠군요. 그 정도 감시꾼이 있어야 사기를 안 당할 테니 말입니다.”

“칭찬인가요, 비난인가요?”

“비난입니다.”

에릭이 씁쓸히 웃었다. 그가 다시 표정을 굳히더니, 문에다 노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