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선상에서(2)
선상에서 파티도 열리는군. 매들린은 제 이름이 적혀진 초대장의 겉면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졌다.
이민자들이 엉겨서 아무렇게나 타는 배와 달리, 부유층이 타는 여객선은 역시 달라도 뭐가 다른 모양이었다. 성대한 파티도 열리고 말이지. 문득, 10년도 전에 침몰한 타이타닉호가 떠올랐다. 아버지와 함께 그 소식을 신문으로 접했던 기억이 났다. 침몰할 수 없다던 배가 침몰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무슨 불길한 생각을 하는 거야.’
스스로를 다그치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여자용 일등실은 여느 호텔 못지않았다. 그녀는 머리를 매만져 틀어 올린 후 단출한 화장품들을 꺼내 얼굴에 발랐다. 자못 병약해진 얼굴이 분을 바르자 생기가 감돌았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사부작사부작 드레스 옷감 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옷감으로 만든 드레스는 가슴팍에 자연스러운 주름이 지어져 있었고 어깨에는 장미 모양의 장식이 달려있었다.
“괜찮나.”
머리를 자르고 웨이브를 넣어볼까.
방 밖을 나서서 선실 로비로 나가자 그곳에는 이안이 있었다. 지팡이에 몸을 기댄 것이, 살짝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괜찮으려나. 의족을 끼운 채 오래 서 있거나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부담일 텐데. 하지만 그가 저를 보기 전에 매들린은 언제 걱정했냐는 듯 밝은 미소를 지었다.
머리를 틀어 올리고 드레스를 입은 매들린을 본 이안이 얼굴을 대놓고 붉혔다. 매들린이 그에게 바짝 붙었다.
“이안, 우리 중간에 나갈까요?”
“파티는 시작도 안 했는데.”
그리고 이제 자네는 내 약혼자요. 이안이 재빠르게 덧붙이는 말에 매들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야 약혼자의 의무를 이행하고 싶지만, 당신이 좀 피곤해 보여서요.”
“아.”
남자가 머쓱한지 제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미안하오. 요새 잠을 좀 설치는군.”
매들린의 반짝이는 눈이 점점 신중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이안이 잠시 매들린을 내려다보더니, 금세 그녀의 걱정을 알아차렸다. 그가 주저하며 덧붙였다.
“그런 쪽의 문제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지. 일단 같이 갑시다.”
그가 한쪽 팔을 매들린에게 내밀자, 그녀가 자연스레 제 팔을 감았다.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매들린 자신의 심장에서 나는 건지, 남자의 심장에서 나는 소리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로비를 통과해 계단을 오르자 확 트인 층이 나타났다. 중앙에 거대한 샹들리에가 빛을 뿜고 있었고 악단이 연주를 하는 중이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떠들어대며 챙챙 유리잔을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먼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있던 홀츠먼이 손을 들었다. 그의 옆에는 이미 남녀 한 쌍이 앉아있었다. 중년 부인과 젊은 남자 하나였다.
“이리로 오게.”
홀츠먼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둘은 테이블을 향해 다가갔고 이안이 먼저 사람들과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헤이스팅스 부인, 에머스트 씨.”
“아. 노팅엄 경. 반가워요. 햄튼에서 뵀죠.”
헤이스팅스 부인이 먼저 이안과 악수했다. 예리한 눈빛을 한 여자였다. 희끗희끗해져 가는 머리를 짧게 잘라 뒷덜미까지 길렀다. 눈가의 주름은 연륜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이안과 악수를 한 사람은 젊은 남자였다. 약관이 살짝 넘어 보이는 나이로, 연갈색 머리를 멋지게 넘기고 잘 맞춘 양복 차림이었다. 속눈썹이 길고 풍성했으며 피부가 희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라이오넬 에머스트입니다.”
“이안 노팅엄입니다.”
존 에머스트 2세. 황색 언론으로 크게 성공해 재벌이 된 남자. 그의 아들인 모양이었다. 이안에 뒤이어 매들린이 소개되었다.
“오. 당신이 바로 그 미스터리한 노팅엄 경의 약혼녀군요.”
“…네?”
“아녜요. 만나서 반가워요.”
여지를 남기는듯한 여자의 말투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다음 악수를 나눈 라이오넬은 더 이상했다.
“안녕하세요.”
“네. 처음 뵙겠습니다.”
천사 같은 얼굴의 남자와 손을 맞잡자, 매들린은 그 서늘함에 잠깐 놀랐다. 하지만 더 이상한 것은 악수 그 자체였다. 오래 머무는 듯한 손 아귀힘, 그리고 떨어졌을 때 고운 손가락이 제 손바닥을 두드리는 느낌이 있었다. 그녀는 얼른 손을 빼 제자리에 돌려놨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 자리에 앉았다.
물론, 그 미묘함은 금방 뇌리에서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테이블로 와서 인사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팅엄 백작이 약혼녀를 데려왔다는 소문이 언제 그렇게 난 건지-그녀는 줄곧 별장에서 지냈는데 말이다-다들 한 번씩 말씀 많이 들었다느니, 반갑다느니 아는 척을 했다. 물론 국왕 앞에서 데뷔탕트까지 마친 매들린이 당황하는 법은 없었다.
모르는 사람을 살갑게 대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번듯하게 웃으며 사람들을 맞이했다. 사람들은 호의적이었다.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노팅엄 백작의 약혼녀에게 잘 보여서 나쁠 게 없을 테니까. 또 옆에서 이안이 서슬 퍼렇게 두 눈을 뜨고 있는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매들린은 사람들 쪽을 보니 이안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인사를 나누는 매들린을 지켜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람들이 물러난 뒤 떠들썩한 디너가 시작되었다. 저마다 담배를 피우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끌벅적했다. 그녀가 앉은 테이블도 마찬가지였다. 주로 떠드는 건 홀츠먼과 헤이스팅스 부인이었다. 스페인독감으로 남편을 잃은 후 가업을 크게 부흥시킨 여걸이었다. 남부 악센트가 강한 말투가 매력이었다.
홀츠먼은 그녀와 죽이 잘 맞는듯했고, 이안이 이따금 담배를 피우다 말며 그들의 대화에 종종 단답형으로 참여했다. 한참 주식 이야기가 나오다가 어느새 대화의 주제가 몇 년 전의 전쟁으로 흘러갔다.
매들린은 긴장했다. 별로 유쾌한 주제가 아니었으니까. 힐끗 바라본 이안의 옆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일부러 그런 건지 그는 늘 매들린과 나란히 앉을 때 제 흉터가 안 보이는 쪽으로 앉았다.
그는 헤이스팅스 부인의 말을 경청하는 것처럼 차분히 여자의 얼굴을 보는 중이었다.
“전쟁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랐죠. 예상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그렇게 오래 끌지도 몰랐고요. 노팅엄 경, 감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미국의 참전을 극구 반대했었답니다. 은행가들이야 돈 벌 궁리로 윌슨 대통령을 꼬드겼겠지만요.”
“미국의 참전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될지 몰랐을 겁니다.”
그다지 유쾌한 주제는 아니었다.
홀츠먼이 라이오넬을 향해 말했다.
“에머스트 씨는 그때 나이가 어렸지요?”
라이오넬이 한번 눈을 깜빡였다. 그가 질문을 던진 홀츠먼 대신 매들린을 향해 말했다.
“저는 그때 뉴헤이번(※예일대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리 어린 나이는 아니지요.”
그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참전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형님이 그렇게 전쟁터에서 실종된 후 부모님께서 많이 힘들어하셨거든요.”
황금에 가까운 암갈색 눈동자에 슬픔이 묻어나왔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때는 다들 힘들었죠.”
참전 여부를 밝히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홀츠먼이 살짝 실수했다 싶었는지 주제를 돌렸다.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잘 지내고 계신가요.”
“요즘 많이 안 좋으세요. 원체 호흡기가 좋지 않으신지라…. 게다가 당신이 젊을 적 워낙 고생을 많이 한 게 병증으로 돌아오더군요.”
그 말을 하는 라이오넬은 많이 걱정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또 말실수했군. 홀츠먼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보다 못한 매들린이 구원 투수로 나섰다.
“그보다 춤이라도 추실까요?”
그녀가 살짝 이안을 바라보았다. 양해해달라는 눈빛을 보내니 그가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매들린이 홀츠먼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플로어로 나가는 둘을 보며 이안은 손가락 사이에서 타고 있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작고한 형님께서 비행기 조종사였다고 들었습니다.”
에머스트 3세.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받은 에머스트 가문의 상속자. 이안은 원래 에머스트 가문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주인 에머스트 2세와의 친분이었지만 말이다. 따라서 지금 눈앞의 라이오넬이라는 애송이는 초면이었다.
“네. 그쪽으로 관심이 많았거든요.”
침묵. 이안은 더는 눈앞의 남자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태생적으로 예의를 차려버릇하는 습관이 있긴 했지만, 지금은 무척 피로했고 기분도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플로어에서 뭐가 재밌는지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는 홀츠먼과 매들린도 눈에 거슬렸다. 둘 사이를 의심하거나 하는 건 전혀 아니었으나, 약간의 박탈감이 그의 골수에서 들끓고 있었다.
어쩌면 질투심일 수도 있겠지. 그는 씁쓸하게 속으로 되뇌었다.
별장에서 같이 느릿느릿 춤을 추던 기억을 어찌나 곱씹었는지, 이제 어디까지가 자신이 덧붙인 상상이고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키스를 했을 때 그녀의 입안이 어땠는지만은 확실했지만 말이다.
뜨겁고, 부드럽고 또 연약한 감각에 소름이 돋았었다.
“약혼녀께서 참으로 미인이십니다.”
라이오넬의 말 한마디가 그를 일깨웠다. 그제야 이안은 그를 처음으로 제대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살짝 곱슬기가 있으나 굽이치듯 넘긴 머리칼, 화려한 이목구비. 아버지를 닮진 않았으니 외탁인 모양이었다.
나름 예쁘장하다 볼 수 있겠지. 이안은 잘 알지도 못하는 젊은 남자가 함부로 매들린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싫었다. 하지만 딱히 무례라고 할 수도 없는 말이었으니, 그는 그저 다시 라이터를 더듬었다.
“좋은 사람입니다.”
딱히 그 이상의 말을 더 덧붙이긴 싫었다. 매들린은 좋은 사람이다. 나에게 좋은 사람이고, 또 그 자체로 좋은 사람이지. 결점도 있겠지만, 가타부타 평가하고 싶지 않았다.
“부럽군요. ‘좋은’ 분과 약혼하게 되다니.”
“뭐. 에머스트 씨도 좋은 인연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진심이라고는 1퍼센트도 없는 예의 치레였다.
헤이스팅스 부인까지 춤을 추러 나간 지금 테이블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간호사셨다고요.”
과거형. 뭐, 그렇지. 이안은 매들린이 계속 고된 간호사 일을 하는 데에는 반대 입장이었다.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과 별개로 말이다.
“…맞습니다.”
“숭고함까지 갖추셨군요.”
“본인은 선뜻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그때였다. 춤을 다 췄는지 매들린이 이안 쪽으로 왔다. 그녀가 허리를 숙여 이안의 귀에 속삭였다.
“제가 플로어에서 쭉 지켜봤는데, 당신 엄청 지쳐 보여요. 이만 돌아가자구요.”
이안이 그제야 처음으로 피식 웃음을 짓더니, 제게 귓속말을 하는 매들린의 허리를 당겼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군.”
영국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밤이었다.